Hello To Philosophy에서 펐습니다
저도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김현 선생님이 쓰신 르네 지라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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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NUMBER199703250115- 이글은   “김현 문학 전집 10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 지성사, 1992.”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폭력의 구조: 르네 지라르 연구

-그렇다면 하느님을 맨 처음 생각해낸 놈은 어떡하면 좋지? 백양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놈을 말이야.

-하느님이라는 걸 생각해내지 않았다면 운명이란 것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없었을 거라고? 하느님이 없었다면?

-네![도스토예프스키,『카라마조프의 형제』, 문학과 지성사, 1984, -상: 190]

1. 글머리에

욕망의 뿌리와 그것의 구체적 자리,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는 초월적 자리 등에 대해 사유하면서, 나는 욕망의 뿌리가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모든 욕망은 역사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나는 사회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을 다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지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고는 믿는다. 그 믿음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종합, 극복해보려는 내 오랜 시도와 맞붙어 있다. 그러다가 나는 르네 지라르를 읽고 그것이 종교적인 것과도 붙어 있다는 것을, 아니 차라리 욕망이 종교의 시원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욕망은 심리적, 사회적인 것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다.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 그 수태, 분만의 과정이 지라르에겐 너무나 자명하고 투명하다. 그 투명성과 자명성이 지라르 이론의 검증 결과를 불안 속에 기다리게 만들지만, 거기에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래서 지라르의 이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검토해보기로 작정하였다. 거기에는 더구나,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폭력은 어디까지 합리화될 수 있는가? 지라르를 통해 던지는 그 질문에는 또 다른 아픔이 배어 있다.

2. 지라르의 저서들과 그에 관한 연구서들

a)저 서:
ⅰ)『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
한국어 역: 『소설의 이론』, 김윤식 역, 삼영사, 1977.
ⅱ)『프루스트론』,1977.
ⅲ)『도스토예프스키론』,1963.
ⅳ)『폭력과 성』,1972.
ⅴ)『지하실의 비평』,1976.
ⅵ)『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온 것』,1978.
ⅶ)『이중 규제』,1978.
ⅷ)『속죄양』,1982.
ⅸ)『사악한 사람들이 걸어간 옛 길』,1985.

그의 서지와 연구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라르는 1961년 그의 첫 책을 펴낸 이후 1972년 『폭력과 성』을 펴낼 때까지 주로 문학비평 쪽에 관심을 쏟았으며, 그 책 이후부터 그가 기본적 인류학이라 부른 종교적인 것의 인류학에 매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연구는 1979년 이후부터 활발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연구는 경제학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철학, 신학, 인류학, 종교학 쪽으로 번져나가고 있는데, 그것에 비해 문학비평가로서의 그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은 고전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것이 그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비평가로서의 르네 지라르가 삼각형의 욕망의 이론가로 축소되어 있는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현상이다. 문학비평가로서의 그의 모습은 총체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있거나, 그의 삼각형의 욕망 이론은 많은 문학 연구 논문의 전거를 이루고 있다.

3. 한국에서의 지라르 수용

한국에서의 지라르 수용은 김윤식, 김치수 의해 주도되었다. 김윤식은 1977년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8장을 한국어로 옮기고, 그 말미에 골드만의 지라르 비판을 덧붙임으로써ㅡ 지라르 수용을 골드만, 더 나아가서는 루카치적인 입장에서 처리하려 하고 있음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으나, 그 자신은 순전히 지라르 이론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기 위함에 있을 뿐임을 명기하고 있다. 그 번역서의 제목을 『소설의 이론』이라고 붙인 것에 대해서는 총12장으로 되어 있으나, 중복된 부분이 많아, 그 중 이론의 핵심이 되는 8장만을 옮기고 표제를 『소설의 이론』이라 하였다. 원래의 장들을 살펴보면, 1장 : 삼각형의 욕망(욕망의 삼각형) 2장 : 사람은 서로에게 신으로 보여진다.

3장 : 욕망의 변신

4장 : 주인과 노예

5장 : ‘적’과 ‘흑'(『적과 흑』)

6장 : 스탕달, 세르반테스, 플로베르의 기법의 문제

7장 : 주인공의 고행

8장 : 매저키즘과 사디즘

9장 : 프루스트의 세계

10장 : 프루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법 문제

11장 : 도스토예프스키적 묵시록

12장 : 소설의 결론(욕망의 궁극적 의미)

위의 12장에서 그가 번역하지 않은 것은 6, 7, 9, 10장의 네 장이며(괄호 속의 제목은 번역자의 것이다), 그 네 장을 빼고 순서대로 자의 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5장 이후의 장은 원문과 번역서가 다르다. 장을 바꾸고, 제명을 소설의 이론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낭만적 거짓은 소설 일반 이론서로 잘못 이해되어왔으나, 번역자 자신은 지라르의 입장이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은 소설의 결말 또는 그 전환이 희랍적 해결 및 기독교적 부활을 상기시킨다는 것, 이 최후의 순간에 소설가는 서구 문화의 높이에 도달된다는 것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지라르의 기독교적 성향을 그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지라르 수용에 있어서의 공적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의 번역서는 서지상의 오류와 함께 비록 그것이 영어판을 옮긴 것이라 해도 지나치게 의역을 한 흠을 지울 수가 없다.

김윤식에 뒤이어, 김치수는 1980년 『낭만적 거짓』의 1장을 불어에서 직접 옮기고, ‘지라르의 욕망의 이론’이라는 해설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에서 지라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맡아 한다. 그러나 그는 지라르의 이론을 삼각형의 욕망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욕망의 포기, 화해라는 기독교적인 주제를 자연히 제거시켜버린다. 그것은 지라르의 의도를 완전히 뒤집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지라르가 화해로 가기 위해 제시한 삼각형의 욕망을 그는 목표로 받아들인 것이다. 김윤식, 김치수의 뒤를 이어, 지라르 이해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은 서인석이다.
김윤식에 의해 종교적 성향의 일반 소설 이론가로 이해되고, 김치수에 의해 삼각형의 욕망 이론으로 축소되었던 지라르의 이론은 서인석에 의해 비교적 정당하게 이해되고 수용된다. 그러나 지라르의 수용에 있어 아직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외국에서도 그러하지만, 김치수가 정석화한 삼각형의 욕망 이론이다. 그것은 사회학에서 널리 알려진 명제, “현대인은 타자 지향적이다.”라는 명제의 멋있는 번안으로 이해되어 수용 지평선이 아주 넓다. 그것은 물화, 소외, 등과 쉽게 결합되어 후기 산업 사회의 한 징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핵심은 거기에 멈추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데 있으므로, 지라르의 정확한–그러나 인문과학에서 말의 엄격한 뜻에서 정확한 말을 쓸 수 있을까?–수용은 급히 서둘러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4. 지라르의 생애

1)가족 상황: 결혼, 아이는 셋(그 아이들의 성별은 밝혀져 있지 않다.)

2)1923년 12월 25일 아비뇽 출신

3)이비뇽중학을 졸업, 1941년 철학 부문 바칼로레아 통과, 점수는 2등급

4)1943-1947년 파리 고문서학교 수학, 졸업

5)고향 탐색 후에 미국 유학.

1947-1950년 인디아나 대학 수학, 역사학 박사(1950), 학위 제목은 ‘1940-43년간의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여론’인데, 그것은 그가 여하튼 미국과 프랑스를 연결해보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6)인디아나 대학 프랑스어 강사 (1947-1952)

듀크 대학 강사 (1952-1953)

브린모 대학 조교수 (1953-1957)

조스 홉킨스 대학 조교수 (1957-1961)

동 대학 정교수 (1961-1968)

동 대학 로망스어과 주임교수 (1965-1968)

뉴욕 주립대학 교수(1969-1976)

스탠포드 대학 현대 사상, 프랑스 사상 담당 교수(1974- )

프랑스어문학, 문화 교수 (1981- )

7)1973년 『폭력』으로 프랑스 아카데미상 수상. 그의 문화적 역할 중에서 중요한 것은 프랑스에 미국 문화를 소개하고, 미국에 프랑스의 새로운 흐름들을 소개하는 중개자 역할이다.

5. 매개된 욕망

그는 주로 소설 인물들의 심리학을 분석하여, 소설의 인물들은 가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나, 위대한 소설들의 경우, 그것의 허위성을 깨닫고 진정한 삶으로 개종한다는 과감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다. 소설 인물들의 욕망은 삼각형의 욕망이라 주장한다.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한 타자가 숨어 있다. 지라르에 의하면 모든 욕망은 타자에 의해 매개되고 촉발된 욕망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욕망하게끔 촉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타자에 의한 욕망은 겉으로 드러나 있거나 아니면 숨어 있다. 그의 욕망을 촉발시킨 타자, 전범으로서의 타자는 상상 속의 인물일 수도 있으며 실제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 욕망의 중개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매개자와 욕망의 주체 사이의 거리가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커서, 그 욕망이 모방 욕구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현상이다. 앞의 것을 지라르는 외적 중개라 부르고, 뒤의 것을 내적 중개라 부른다. 외적 중개에 있어ㅡ 중개자는 훌륭한 전범이며, 욕망의 주체는 그를 마치 기독교도들이 예수를 모방하듯 모방한다. 모방은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추구된다. 그러나 내적 중개에 있어서, 타자는 전범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쟁자가 되어, 타자와 욕망의 주체 사이에는 경쟁상태가 이뤄지고 전범은 방해자가 된다. 모방은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부인된다. 타자는 전범이기 때문에 경쟁자며, 경쟁자이기 때문에 전범이다. 경쟁자-전범과 그 사이에는 계속적인 욕망이 오고 감이 있으며, 그것은 갈수록 강화되어, 둘 사이의 차이점은 갈수록 줄어든다.
그것이 외적 중개에 의한 것이든 내적 중개에 의한 것이든, 모든 욕망은 중개된 욕망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욕망은 자발적이며, 자기가 주인이라고 믿는 것은 낭만적 환성, 낭만적 거짓이다. 진정한 소설은 그 낭만적 거짓을 드러내, 모든 욕망은 매개된 욕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낭만적 인물들의 고독과 자율성은 욕망의 삼각 구조를 반영하는 낭만적 거짓이다. 그 고독과 자율성은 경쟁적 고독이며 자율성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의식에 편재해 있는, 신을 죽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적 약속은 거짓 약속이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편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기만이 지옥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바로 그 믿음이 지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 매개된 욕망은 한이 없는 욕망이기에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육체적으로 죽거나 정신적으로 죽는 수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그 두 죽음은 같이 일어난다. 그 죽음을 통해 끝없는 욕망은 끝이 난다.

6. 지라르의 스탕달 분석

7. 지라르의 소설 결말 분석

8. 지라르 비평의 특징

지라르의 반-낭만적 비평은, 엄격하게 현실적인 비평도 아니며, 엄격하게 고전적인 비평도 아니다. 그의 비평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진리를 중요시하는 서구의 전통 안에 있는 프로테스탄트적 비평, 더 폭넓게 말한다면 휴머니즘적 비평이다. 그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의 비평은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양식과 휴머니즘을 되살리고, 현대주의의 무절제한 경쟁 심리를 까발리는 탈신비화의 길을 감으로써, 허무주의로의 길이나 초인주의로의 길을 막는 도덕 비평이 될 수 있다.

9. 외디푸스 콤플렉스 비판

프로이트와 지라르 이론의 차이는 프로이트가 욕망의 뿌리를 성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데 비해, 지라르는 그것을 모방 욕망이라고 보고 있다는 데 있다. 지라르는 모방 욕망이 더 깊은 뿌리이며, 성욕은 그것의 한 예라고 주장하지만, 프로이트의 입장에 서면 모방 욕망은 성욕의 승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0. 초석적 폭력과 성(聖)

『낭만적 거짓』을 쓰고 난 뒤의 지라르에겐 세 방향이 탐구 지평으로 열려 있었다. 하나는 일반 소설 이론 쪽으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사회심리학으로 가는 길이며, 마지막으로 종교적 체험의 의미를 밝히는 길이다. 일반 소설 이론은 이야기 기호학자들이 뒤에 개척하게 되는 길이고, 현대 사회에서의 대중 심리 분석은 사회학자들의 길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세 번째 길만이 남게 되었다. 그 길은 종교인류학으로 가는 길이다. 그를 인문과학자들에게 널리 알린『폭력과 성』은 종교인류학으로 가는 첫 번째 시도이다.

지라르의 가설 –문화는 금기와 제의(祭儀)라는 짝패에서 솟아나온다.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폭력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폭력을 오래 속이는 방법 외엔 딴 방법이 없다. 폭력을 속이는 폭력과 불순하고 비합법적인 폭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합법적 폭력의 초월성은 나쁜 폭력의 내재성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11. 지라르의 외디푸스 해석

12. 지라르의 비판 1

지라르에게 주어진 비판들은 용어 선택이 부정확하고,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13. 근본적 인류학의 기본 구조

ⅰ)인간이 대면해야 하는 중심 문제는 폭력이다.
ⅱ)폭력은 어떤 사람을 모방하려는 경쟁 상태에서 생겨난다.
ⅲ)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이, 모방 욕망처럼 끝이 없다는 것을 보아왔다.
ⅳ)희생양이 발견되어 바쳐지면 폭력은 일시적으로 끝이 난다.
ⅴ)이 희생양이 성화된다.
ⅵ)그것이 종교적 제의의 시작이다.
ⅶ)재판은 그것의 연장이다. 폭력만이 폭력에 끝장을 낼 수 있다.

“사람들이 욕망의 유토피아가 온다고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이다.”

“사람들이 욕망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택하면 택할수록, 사실 그들은 경쟁 사회의 완성을 독촉하는 셈이다.”

욕망의 유토피아를 서로 실현하기 위해, 서로의 욕망을 해방시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문화적 위기, 무차별 현상이 가속화된다.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해방적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공격하여 없애려는 사항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따름이다. 그가 들고 있는 희생양은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아버지, 법 등이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부르조아, 자본가 들이며, 니체의 노예의 도덕, 타자들의 원한 ….등이다.

지라르는 현대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이 해방적 이데올로기임을 명백히 알고 있다.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억누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억누르는 것, 금기를 지라르는 그들 이론의 속죄양이라 부르고, 그것의 해방이 욕망의 유토피아를 부르기는커녕 그것의 갈등을 더욱 초래할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14. 지라르 비판 2

15. 속죄양의 의미

16. 성서적 텍스트의 중요성

17. 될 뻔한 속죄양: 욥

나의 생애는 끝났고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실날같은 희망마저 끊기었네

밤은 낮으로 바뀌고

빛이 어둠을 밀어낸다지만,

저승에 집터를 마련하고

어둠 속에 자리를 까는 일밖에

나 무엇을 바라겠는가? (욥기17:11-13)

욥의 그 불평을 이해하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난다.
욥은 그리스도를 예고한다.

18. 지라르의 눈으로 한국의 신화 읽기: 분석의 한 예

19. 지라르의 눈으로 한국 설화 읽기: 분석의 한 예

20. 지라르의 눈으로 제주도 개벽 신화 읽기: 분석의 한 예

21. 욕망과 욕망의 욕망: 지라르와 헤겔

인간은 한없이 서로를 모방한다는 지라르의 가설은 인간은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그 타자에게 자기 자신을 최고의 가치로 강요하기 위해 그와 싸운다라는 헤겔 도식의 한 나이브한 번역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헤겔의 욕망이론:

ⅰ)동물에게 최고의 가치는 생명이며, 모든 동물의 욕망은 생명 보존 욕망이다.
ⅱ)인간의 욕망은 그 동물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ⅲ)나는 타자가 나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인정해주기를 욕망하며, 나를 자립적인 가치로 인정해 주기를 욕망한다.
ⅳ)모든 인간적 욕망은 인정에 대한 욕망의 기능이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남녀 관계에 대입시켜보면, 사랑에서의 인간적 욕망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의 육체가 아니라, 욕망을 욕망할 때, 서로 인간임을 인정하고 인정받고자 할 때 보여진다.

그러나 지라르의 욕망은 대상이 없는, 타자에 의해서 대상이 만들어지는, 그러나 곧 없어지는 욕망이다. 그것은 반작용만 있지, 작용은 없는 순환의 욕망이다.

지라르의 제자들은 지라르의 욕망이 보편적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욕망은 끝도 시작도 없다고 단언한다. 헤겔의 욕망은 제의적 욕망이다. 자신의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절대적 폭력이 감춰져있다. 그러나 헤겔식으로 이해하자면, 지라르의 모방 욕망은 동물적 차원의 욕망, 생존만이 최고의 가치인 그런 욕망이다. 거기에는 인간적 가치가 없다. 그의 욕망은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오래된 도식의 교묘한 위장이다.

22. 지라르를 넘어서 1

인문, 사회과학의 분야로 적용 — 뒤퓌/뒤무셸

23. 지라르를 넘어서 2

경제학에 적용 — 아글리에타/오를레앙

24. 지라르를 넘어서 3

정신분석학에 적용 — 우구를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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