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학력사회의 전복을 꿈꾼다

김요한(고대문화 편집위원) john81kim@hanmail.net

Ⅰ. 들어가며

지난 20년 동안 당신의 삶을 지배해 온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겠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대학진학’이라는 절대적이고도 현실적인 명제 속으로 수렴될 것이다. 혹자는 이를 부인하려 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대생이라는 네임밸류를 얻게 된 당신은 분명 “정상적(으로) 고교교육을 이수한 학생”이고 흔히 학력사회라고 규정되는 한국사회에서 고학력을 획득한 ‘승리자’이다. ‘전쟁’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입시경쟁의 장에서 누구나 희구해 마지않는 제한된 고학력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당신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누구보다도 학력의 획득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전과’를 입증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그 보상(?)인 남부럽지 않은 학벌에 대한 자긍심으로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당신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이제 명문대생으로서의 갖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당신은 자신있게 ‘분명 고등학교 시절엔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며 대학에 매달릴 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지금의 학력경쟁구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일단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같은 질문에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뚜렷이 존재하는 수험시절의 억압된 기억은, 또한 그 억압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불행한 현실은 우리가 이제 그 고통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해서 마냥 즐겁게 그렇다라는 대답을 내놓기에는 부담스럽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억압했던 사회구조는, 그리고 앞으로도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을 옭아맬 그 구조는 분명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의 견고한 현실은 우리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잊고 싶은 과거만으로, 그리고 이 사회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거부감만으로는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은 자신을 구속했던 사회구조에 대해 그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현실의 변혁 지점과 대안을 모색하는 것일 테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점을 살펴보는 글이다. 이 글에선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계속적으로 고민하며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기에.

Ⅱ. 학력사회란 무엇인가? – 학력사회의 계급적 편향성

여기서는 우리를 그토록 당연하게 구속했던 학력사회에 대해 과연 학력사회가 무엇이기에 우리의 삶을 그토록 억압했는지, 학력사회의 개념과 그 성격을 살펴보자.
학력사회는 일반적으로 “학력이 사회구성의 핵심지표가 되고, 이러한 사회의 객관적 조건에 상응하는 학력주의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사회”1) 김부태, 「학력사회화의 이론 구조」, 『한국 학력사회론』, 31쪽. 여기서 ‘사회구성의 핵심지표’란 일반적으로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 그리고 이로써 얻어지는 경제·문화적 권력의 양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 정의된다. 즉 학력사회란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이 학력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들이 제한된 학력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학력이 개인이 보유한 학업 수행의 능력[學力]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학교교육력(學校敎育歷)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특히 학력을 통해 획득된 ‘학벌’2) 학벌(學閥)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의 학력사회에서는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로 이어지는 단계적 학력 차이, 즉 종적 학력이 중요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단계의 학교들 간에서 서열이 매겨지는 횡적 학력이 중요시된다.이 사회적 연줄망으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의 학업능력을 뜻하는 실질적 의미의 학력보다도 이처럼 형식적 의미의 학력―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따위의―이 더욱 보편성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학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형태로 결혼, 취업, 승진, 인간적 가치의 평가 등과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학력에 대해 절대적인 신념을 표현한다.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하려면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당연하듯 10대 시절을 입시경쟁에 소진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력―사회적 가치를 획득하는 도구로써 작용하며, 이로써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은 과연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그 획득과정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다시 말해 사회구성의 지표로서 충분한 객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얼마 전 2000년도 서울대 신입생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들 중 49.8%가 전문직·관리직 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한국사회의 남성 경제인구 가운데 관리직과 전문직 종사자는 9.1%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학력이 흔히 생각하듯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객관적 결과물이 아니며 오히려 특정 계급에 편향적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왜 학력은 이러한 계급적 편향성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는 전술했듯, 학력이 공교육체제에서의 교육경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력이 공교육 체제에서의 교육경력만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의 형태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그들의 가치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러한 형식적 학력을 획득하기 위해 전제되는 학력의 선발 방식과 기준이 경쟁구조 속에서 그 개인의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지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3) 형식적 학력의 획득은 보통 대학입시를 통해 한 번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주의로 등장하고 이것이 현실에서 과외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홍월이, 〈인민의 지성으로 학력화폐 개혁을〉, 《고대문화》 50호. 그 비용이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는 과외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경제적 배경에 의한 경쟁구조의 왜곡을 낳는다.는 점, 즉 학력의 획득과정이 계급격차를 나타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배집단의 가치를 대변하는 사회적 산물로서의 학력, 그리고 그 획득과정이 사회경제적 배경과 밀접히 연관된 학력이란 결국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에 대한 객관적 보상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학력획득에 유리한 위치에 있거나 그 산출 과정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 집단을 옹호하는 편향적 성격을 내포하는”4) 김부태, 위의 책, 33쪽.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학력은 실상 형성과정이 그 자체로서 대단히 불평등한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는 합리적 모습을 띠기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이 이를 객관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학력사회는 어느 시점에 있어서 정태적으로 주어진, 사회의 고정된 모습이 아니며 그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체계―지위상승을 위한 자발적 욕구―에 의해 끊임없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이다.
이제 학력사회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Ⅲ. 학력사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학력사회 형성과 그 작용
학력사회 현상은 비단 우리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특히 서구의 경우에서 일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모습이다.
서구의 경우,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생산양식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맑스가 올바로 분석했듯이 발전하는 부르주아지들은 그들의 상품 판매를 위해 단일한 언어, 단일한 문화로 구성되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근대적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는 맑스가 이를 부르주아지 계급의 위원회라고 규정했듯이, 여러 국가 권력 장치를 통해 새로운 지배계급의 이익을 담보해 낸다. 하지만 근대국가의 수립은 단지 그것을 지배계급의 교체로 규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조망했을 때 그 자체로서 역사의 진보5)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그것이) 특정의 목적을 향해 진행하는 것이며, 이 목적은 인간의 처지를 개선하는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고 한 마르쿠제의 정의를 빌리자.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부르주아지들은 그들의 새로운 지배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피지배층에게 봉건적 예속관계의 해방이라는 선물을 선사함으로써 다소나마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의 정도를 완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봉건적 신분관계 대신 자유와 평등―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듯 하지만 한꺼풀만 벗겨내면 그것이 대부분 재산증식의 자유와 평등임을 알 수 있는―이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피지배계급으로부터 자신들의 새로운 지배질서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낸다.
학력주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에서 분석했듯, 학력주의 역시 그 피상적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본가를 비롯한 지배계급에 편향적인 성격―학력의 획득을 위한 경쟁과정이 이미 불평등하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출신 가정에 의해 결정되던 봉건제 사회에서, 그것이 국가에 의해 공인되는 학력에 의해 결정되는 근대 사회로의 이행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분명 지위결정에 있어서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가능성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학력에 따른 지위의 결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이로써 결정되는 개인의 미래에 대해 훨씬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등 새로운 지배질서에 대한 자포자기적 태도를 내면화하였다.
이렇게 피지배층에게 존립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낸 학력주의는 지배계급에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요구되는 양질의 기술을 보유한 노동력을 제공받는 도구이자 자신들의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상징체계로, 그리고 피지배계급에게는 지배질서를 인정하고 그 체제 속에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실제로 이는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해당된다―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피지배계급인 노동계급은 그들 내부를 학력에 의해 분할하는 것―학력에 따른 임금의 차등지급을 뜻한다―에 대해 정당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연대 가능성을 축소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적 관계를 인정하는 모습을 띤다.
결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성립된 학력주의는 이처럼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배질서를 반영함과 동시에 이를 합리적으로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학력주의의 특수성 ― 과잉교육열
이러한 학력사회의 일반적 성격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의 현실에도 적용가능하다. 특히 교육을 중시하고 이에 따른 입신주의, 관존민비의 유교적 전통이 존재하는 한국에서는 학력에 의한 사회계층의 분화 현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력사회는 이러한 자본주의 지배질서의 유지라는 일반적 성격 외에도 한국의 역사적, 구조적 맥락을 이해함으로만 알 수 있는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곧 한국의 학력주의가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구성원들에게 ‘과잉교육열’로 표현되듯 절대적 신념체계를 이루었다는 점인데, 이는 한국의 독특한 계급구조의 성립과 계급갈등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설명가능한 부분이다. 이제 한국학력주의의 특수성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학력사회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어 지금과 같은 질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는 해방 공간으로 돌아가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한국사회는 식민지배의 뚜렷한 기억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분명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식민지 시절, 일제는 그들의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매우 민족차별적인 교육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조선인 내부의 분할을 목적으로 엄격한 학력제도를 시행한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은―이후 새로 수립된 남한정부가 반민중적이었던, 혹은 반역사적이었던 간에―그동안 일제의 민족차별정책, 민족분할정책으로 고통받았던 식민지의 기층 민중들에게 그동안 억눌려왔던 교육에 대한 욕구, 그리고 이에 따른 ‘지위경쟁’의 욕구를 실현해낼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인지되었을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그나마 잔존하던 봉건적 질서가 철저히 붕괴되어, 사회이동의 욕구가 더욱 광범위하게 유통되면서 한국인들은 신분상승에 대해 더욱 열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기 한국인들의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혹은 신분상승의 의지는 일제 시기 부분적으로 선택된 이들에게 부여되던 학력에 대한 열망을 강화하는 일차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시기 새로운 지배층 역시 공교육 체제를 강화하여 학력을 중시해야 할 필요가 컸었다는 데에 있다.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남한 정부는 주지하다시피 당시 민중의 열망과는 달리 철저히 미국의 반공·반혁명 노선에 편승한 이들에 의해 수립되었던 정부이다. 남한의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 이들은 대개가 한민당 계열의 친일 지주 출신이었고, 이들은 과거의 친일 경력 때문에 해방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기에 용이치 않았다. 이들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미군정의 반공노선과 결탁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이름 아래 반공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계속 지켜내려 한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군정에 의해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신탁파동 이후 우파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 이후에도 여전히 좌파세력에 대한 지지도가 77%에 이르고 있다.6) 강정구, 「북한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일시대의 북한학』에서 재인용.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불안정한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반대 정치세력에 물리적 탄압을 가함과 동시에 피지배층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이 결여된 지배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교육 체제를 강화한다. 이 시기 시행된 초등 의무교육제도의 도입 역시 겉보기에는 교육의 기회를 확대한 것이나, 이러한 공교육제도 확립의 기저에는 국가 공인 학력을 통해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려는 지배층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학력주의는 “반공국가의 억압적 통치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조속한 도입을 통해 상쇄하면서…격증하는 계급갈등을 교육경쟁을 통해 체제 내화하려는 (지배층의) 전략”7) 김동춘, 「한국의 근대성과 ‘과잉교육열’」, 『근대의 그늘』, 167쪽.
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위에서 지적한 해방 공간에서의 민중들의 거대한 사회적 지위 상승 열망이 좌파 정치세력의 소멸로 집단주의적 방식(사회혁명)이 불가능해지면서 그 유일한 대응으로서 개인적 지위상승 방법, 즉 학력의 획득을 통한 사회이동의 방법이 크게 재생산되었음을 덧붙여야 한다. ‘과잉교육열’이란 결국 이러한 사회구조적 배경에서 빚어진 개인의 생존전략의 하나로 일종의 정치경제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담보하는 학력제도가 피지배계층에 의해 크게 재생산되면서 한국사회에서의 학력획득을 위한 경쟁은 그야말로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경쟁적 구조에 의한 고학력 수요 증대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대학의 폭발적인 양적 팽창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는 고학력으로 인해 사회적 효용이 드높은 사회에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학력을 획득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서 “계급상승을 지향하고 계급탈락에 저항하는 여러 집단들과의 경쟁, 즉 학력자격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경쟁 효과에서 (발생하는) 반드시 구조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8) 삐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옮김. 「사회공간과 그 변형」,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22쪽.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력의 인플레 현상은 교육 전반의 질적 하락을 가져옴과 동시에 학벌의 성립을 촉진함으로써, 학력사회 모순 구조의 완화라는 긍정적 계기보다는 또 다른 모순 구조의 생성을 배태한 부정적 동기로서 작용한다. 결국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은 학력사회의 모순을 한층 더 심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Ⅳ.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그들의 논리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지금까지 우리는 학력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실상 학력사회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계급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한국과 같은 신생독립국가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구성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학력사회가 모순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은, 즉 특정 계급에 편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모순적 사회구조의 국가에 의한 강제는 구성원들에게 이 질서에 부합하는 삶을 강요하였고, 이는 우리들의 인식체계를 통해 발현되었다. 이제 학력사회가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기에 의해 어떻게 유지되는지 우리 주위의 모습들을 통해 살펴보자.

쉬운 수능 논란과 ‘안티수능인플레이션’
학력사회는 개별 사회의 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순들을 나타내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 학력사회의 모순은 대학의 철저한 서열구조, 이른바 학벌에 의한 폐해로 집중된다고 해도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고졸과 대졸이라는 단계적 학력 사이에 엄연한 사회적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해방 이후 대학의 폭발적인 양적 증대가 일단 고학력 지원자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대부분 소화해냈기 때문에 이제 한국사회에서 학력간 격차라 함은 고졸-대졸 간의 차이가 아닌 대학간 격차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학력사회의 모순은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의 격차, 혹자는 신분제적 차별이라고까지 표현하는 대학서열구조의 모순으로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러한 한국학력사회의 대학서열구조 모순을 확연히 드러낸 작은 논란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01학년도 대학입시를 둘러싼 ‘쉬운 수능’ 논란이었다. 당초 교육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 ‘쉬운 수능’의 의도는 지나친 경쟁 위주의 입시를 완화함으로써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당시 보수언론에 의해 크게 공격받게 되는데, 이들에 의하면 ‘쉬운 수능’으로 학생들간의 변별력이 상실되어 명문대에서 학생 선발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로써 심각한 국가경쟁력의 저하가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실상 학력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하는 도구임을 입증하는 이들 보수언론의 주장은 국가주의적 선동에 약한 면모를 지닌 한국인들에게 일면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숭고한 애국심으로 보여졌겠지만, 사실 이들의 주장은 지금까지 그들이 내세워왔던 스스로의 논리와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보수언론은 하버드 대학의 예를 들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엘리트 집단화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하였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각 대학마다 특성화·전문화된 영역을 개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던 이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9)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도 기형적 학벌 구조는 타파되어야 마땅하다. 3%의 엘리트를 양성함으로써 얻어지는 효용이, 나머지 97%의 가능성을 살림으로써 얻어지는 효용보다 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갑자기 왜 수능시험이 끝나자 목소리 높여 명문대를 비호하는 주장을 펼쳤던 것일까? 이것은 한편으로 학력이 지배계급에게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상징으로서,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학력이 학벌의 형태로 사회·문화적 권력에 접근가능한 입장권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보이는 이러한 모순적 태도는 이미 학력의 획득을 통해 이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보여준 ‘자기분열적’ 태도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이 시기 보수언론에 의해 크게 보도되었던 고등학생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다음넷에 개설된 ‘안티수능인플레이션’이라는 카페였는데 이들은 변별력을 상실한 쉬운 수능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진학에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교육부의 사과를 목표로 집회와 소송을 준비중이라 하였다. 언론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사실’로써 이를 크게 보도하며 이들을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찾아가는 당찬 10대들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가 그 성원들에게 경쟁과 배제의 논리를 내면화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이들에겐 이미 3%의 상위권 학생들만이 수능의 직접적인 당사자였다. 나머지 97%의 학생들에게는 그 쉽다는 수능이 여전히 충분한 변별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지 자신이 쉬운 수능으로 인해 어쩌면 명문대로의 진학에 실패하고 이로써 명문대생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리고 분명 자기보다 석차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왔던 동료들이 자신과 같은 위치로 올라온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카페의 구성원들이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상위권 학생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이 카페에는 이른바 ‘중위권’ 학생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역시 이처럼 ‘쉬운 수능’으로 위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에 대하여 옳지 못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 많이 노력한 자가 더 많은 보상을 얻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논리―실상 결코 그렇지 않음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로 말이다.
어쩌면,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한 이들에게 이러한 태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 배제의 논리, 비단 대학입시라는 틀만이 아니더라도 이 나라의 교육제도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걸러내는 논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선택된 이는 선택된 이로서의 삶을, 배제된 이는 배제된 이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엄연한 현실은 가끔 매스컴이 크게 보도하는 입지전적인 성공담―지방대 출신의 한 평사원이 대기업의 요직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과 같은―이나 앞으로의 사회는 학벌보다는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현실과 너무도 괴리된 주장들로는 결코 가려지지 않았다. 학력을 통해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객관적 현실’은 이들에게 맹목적인 성적제일주의 의식과 경쟁의식을 내면화하여 이로써 그 누구보다도 체제에 순응적인 인간상을 창조해낸 것이다.
물론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로, 조금이나마 사회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 구조 속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지 3%만이 그 자격을 얻고 나머지는 스스로 체념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 논리는 분명 새로운 사회의 상을 모색하기 위한 논리로서 작용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기존의 지배질서를 재생산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교육을 통해 ‘간판’을 획득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갖고 계층상승을 꾀하려는 행동은 사실 기존 질서에 가장 충성스러운 행동”10) 김인회, 『한국인의 교육학』. 김동춘, 위의 책에서 재인용.인 것이다.

고대! ― 또 하나의 학벌 생산 기지
이제 논의의 공간을 우리의 주생활 공간인 고대로 제한시켜 학력사회의 수직적 체계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돌아보자.
‘고려대학교’라는 이름은 분명 한국의 학력사회에서 학벌로서 존재한다. 전술했듯, 학력의 전반적인 인플레 현상은 학벌의 성립을 촉진하였다. 학력이 한편 계급사회에서 특정계급의 자격증명으로써 이용되는 상징체계라면 이러한 학력자격의 전반적 인플레이션은 고학력의 상대적 희소성을 크게 저하하는 요인으로서, 곧 학력이 계급분화의 ‘객관적 기준’으로써 작용할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국사회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로 대표되는 학벌이 성립되는 객관적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다.
학벌은 한국 사회에서 갖가지 사회·문화권력에 접근가능한 ‘입장권’으로써 기능하는데, 이는 연고주의적 성격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몇 개의 학벌이 제한된 사회권력을 독점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사회에서 선후배관계가 돈독하다는 말은 곧 그 학벌이 사회에 있어서 영향력이 지대하며 독점지위가 견고하다는 말을 나타낼 뿐이다.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인정된 학벌은 이미 그것의 획득을 통해 사회적 권력을 획득한 선배들의 ‘밀어주고 끌어주는’ 힘에 의해, 그리고 이미 계급적 편향성을 지적한 바 있는 학력구조 속에서 새로이 학벌을 획득한 후배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며 사회적 권력을 유지한다.
특히 철저한 경쟁구조 속에서 자신이 성취한 학력에 대해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모든 성과를 개인귀속화하는 가운데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 우월의식과 배타의식을 드러낸다.
고대생들의 모습을 보자. 이들은 학벌 보유자가 가지는 이러한 일반적 속성 외에도 고대만의 ‘그 무언가’에 의해 학벌의존적 성향11 다소 진부한 논거이지만, 고대교우회가 대한민국 4대 집단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만큼 이를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대한민국의 4대 결속력 연구〉, 《월간조선》, 1999년 5월호. 극우반동 수구족벌언론도 때로는 진실을 보도함을 전제하자. 이 더욱 강하다. 혹자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고대의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를 부정적으로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만 최근 사회적 쟁점이 되었던 권력형 비리에 고대 교우회라는 막강한 연줄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고대의 공동체 문화는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특권화된 선별의식, 혹은 근거없는 엘리트 의식을 재생산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데, 이는 곧 ‘비(非)순수혈통 솎아내기’를 통한 집단적 순수성의 유지라는 모습으로 현상한다.
고대 홈페이지 자유광장의 모습은 이같은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되었던 비리사건에 고대의 인맥이 연루되자 이들은 “서창이 무슨 고대야?”, “왜 서창경제가 경영학과 욕을 먹이냐?”(정현준), “중퇴가 무슨 고대야?”, “원래 학교 다닐 때부터 이상했어”(진승현)라며 그들과 구별을 짓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인기그룹 SES의 멤버 유진 양의 부정입학을 두고 보여진 그들의 배타적인 모습, 그리고 특례입학생에 대한 그들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유진을 둘러싼 논쟁의 경우 ‘유진 따위가 고대 이미지 다 깎아내린다’라는 말 속에서, 특례논쟁의 경우 ‘수능치면 전문대도 못 갈 것들이’라는 말들 속에서 이들에게 제일의 관심사는 단지 고대의 집단정체성 유지임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의 정체성은 곧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이용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같은 모습은 단지 주어진 체제 속에서 순응하며 자라온 이들이 이제 다시 그 체제를 어떻게 확고히 다져나가는가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Ⅴ. 나가며 ―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학력사회든, 아니면 그것이 더욱 모순적인 형태로 증폭된 학벌사회든 이미 공고히 자리잡은 사회구조는 분명 변화되기 어렵다. 또한 그것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질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대화된 현재에 있어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도록 추동한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너무나 친숙해진 우리는 이제 그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학력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 정확히 직시하고 계속하여 변혁을 모색하는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사회의 엄연한 모순을 직시할 수 있는 우리의 날카로운 시각이 자칫 명문대생의 특권으로 흐려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우리들의 힘이라면 그것은 명문대생의 자기부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범생으로 살아온 당신에게 그리고 이제 그 특권을 향유하게 된 당신에게 학력사회의 모순을 타파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지난 삶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 주위를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여전히 우리 주위엔 비인간적인 학력경쟁구조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그 안에서 기쁨을 얻는 이들보다 훨씬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며, 지금의 사회구조는 계속적으로 소외되는 이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코 당신에게 값싼 동정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학력구조는 당신의 삶을 제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모순에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면,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부당한 특권을 포기하는 데까지 진행될 수 있다면, 아무리 공고한 사회구조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나는 당신이 “학창시절 시종일관 괴롭혀 오던 입시 제도에 관한 불만으로 서태지와 RATM과 핑크플로이드를 들으면서 정말 갈아엎어야 한다고 분기탱천해 있다가도 운 좋게 대학에 들어와서는 사발식과 엘리제 한 방에 이미 남 일로 생각(하는)”12) 최동룡, 〈군대에서 축구 안 한 이야기〉, 《고대문화》 52호. 고대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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