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전작전을 틈틈이 보고 있다.
오늘은 이만희 감독의 ‘원점‘이라는 영화를 봤다.
그런데 이 영화 너무 엉성하다.
관객들은 틈틈이 실소를 보였는데, 이는 당대의 문화적 취향에 대한 실소였다 – 실내 신에서 배우들의 입김이 나오거나 싸우는 건지 엉기는 건지 분간되지 않는 엉성한 격투신의 동선, 더빙된 대사가 배우들의 입모양과 전혀 맞지 않는다거나 유치하기까지 한 문어체 대사 등등…이들은 결국 영화의 기술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세련되지 못했던 – 또는 이해할 수 없는 – 과거에 대한 난처한 반응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1967년에 무려 11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당시에는 유명한 감독들이 이렇게 다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유명한 배우들은 한달에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말하면 영화 제작에 왕성한 생산력을 보이던 때다.
하지만 동시에 군사정권의 몰취향스러운 검열에 항상 시달리던 시대였고, 때문에 영화는 작가의 손아귀에서 온전히 꾸며지기가 힘들었다.

물론 나 역시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한국 땅에서의 지난 시대와 현재가 어떤 단절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취향에 이해하기 힘든 어떤 간극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방식 전반이 건너기 힘든 간극으로 불과 수십년 전의 그것과 분리돼 있는 것만 같다.
김기찬의 서울 풍경 사진에 새겨진 사람과 풍경을 지금 이 시대에서 찾을 수 없듯이.
다시말해 한 장소의 건물이 수십번 바뀌듯이 사람도 모습을 수십번이나 바꾸며 전혀 다른 시대를 형성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불과 30여년 사이에 시대적 단절을 이룬 게 아닌가 생각하니 아득하다.
옛 한국영화를 보는 것도 그만큼 아득한 일이다.

사실 우리의 과거를 존중할 만한 자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영화로 국한해 보자면 당시에는 프랑스의 누벨바그, 미국의 뉴아메리칸 시네마 등 영화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발굴되고 있었지만 한국 영화는 스스로 그런 관심을 형성해 낼 만한 자생적인 움직임이 당시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과거를 존중하는 것은 보잘 것 없는(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서 구해 내야 할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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