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선생님의 홈페이지에서 펌

대중 지성 시대의 미학을 위한 비망록

1.미는 삶의 존재 양태의 하나이며 창조적 생동성을 본질로 하지만, 그것의 실존은 오직 역사적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

2.우리 시대의 미는 자본에게 노동의 형태로 포섭되어 있는 삶을 환기(喚起)시키고, 그것을 해방시키며 그것을 창조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있다.

3.예술은 미를 구현하는 현존하는 다양한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생활, 수련, 운동, 혁명 등 미 구현의 여타의 양식들과 등가를 이룬다.

4.자본주의 하에서 예술은 노동자계급의 생활과 노동, 그리고 투쟁 속에 잠재하는 생동하는 삶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구속하고 있는 조건을 밝히며 해방의 잠재력들을 탐색하고 이를 정신적으로 확장하는 능동적 실천일 수 있다.

5.이러한 능동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은 ‘노동자 계급 자율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 특징을 갖는다.

6.’노동자 계급 자율성’은 국가나 자본, 의회와 같은 포섭적 대의(代議)의 기계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정당이나 노조와 같은 저항적 대의의 기계들로부터도 독립적인 대중의 삶의 내재적 힘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7.이 개념은 전통적 혁명운동에서 널리 사용되어온 ‘노동자 계급 당파성’ 개념이 지녔던 적대의 측면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대의적 성격을 거부한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 당파성’ 개념이 나타냈던 자생성에 대한 폄하, 그리고 자생성의 상위에 의식성을 옹립하려는 경향을 전적으로 기각한다. 대신 자율성의 관점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 속에 내재하는 자생성과 의식성의 동시성과 평행성을 옹호한다. 자율적 삶의 힘은 자발적 행위이면서 동시에 의식적 실천이다.

8.’노동자 계급 자율성’의 관점은 ‘민중성’을 옹호하지만 그것을 ‘민중과의 연대’라는 대의적이고 지식인적인 관점에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성은 자본의 가치화에 맞서 노동자 계급이 자기가치화하는 잠재력을 표현하는 말로 훌륭하게 이용될 수 있다.

9.자율성의 예술에서 어떤 특정한 형식이나 방법을 표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자본은 대중의 삶을 노동이라는 일률적 형태로 환원시키지만 그것은 다양하고 혼돈스러운 무한으로서의 삶을 가치화의 틀 속에 강제적으로 가둔 것의 결과일 뿐이다.

10.삶의 환기, 해방, 확장을 지향하는 미적 실천을 위해 어떤 방법, 어떤 형식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예민한 감각은 예술가의 고유한 몫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래된 다양한 수법들, 형식들, 방법들이 노동자계급 자율성의 관점에서 이용, 변용될 수 있고 또 새로운 것들이 개발될 수 있다.

11.종래의 현실주의 예술들에서는 전형화가 예술적 형상화의 하나의 표준으로 제시된 적이 있다. 전형화를 표준으로 강제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미적 실천은 고정적 틀에 갖히게 되었고 국가나 당과 같은 통제 기구에 예술 활동이 쉽게 예속되어 버렸다.

12.물론 전형화는 현실의 어떤 일반적 특징들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의 일반화하는 경향은 현실의 다양성과 그 독특성들을 추상해 버림으로써 대중의 혁명적 힘들이 잠재하는 삶의 지절들을 잘라내 버리는 경향이 있다.

13.삶의 다양성과 독특성들을 드러내고 확장시키는 방법을 창안하는 것은 예술의 주요한 과업 중의 하나이다.

14.노동자 계급 자율성의 예술에서 사실성은 중요하다. 사실성은 삶의 현존 조건을 밝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성만으로 삶을 환기하기에 충분치 않다. 사실들 속에 삶아 움직이는 내재성의 지평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15.내재성의 지평은 인류의 사회적 삶, 개인들의 가려진 호혜관계, 연대와 공명의 층위이며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일상의 각질을 폭파시켜야 한다. 비판, 풍자, 역설이 해학에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비리얼리즘적 예술들, 혹은 고전적 예술들이 사용한 많은 수법들, 형식들이 자율성의 예술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

16.자본주의적 근대는 대중의 예술적 힘에 적대적이었고 그 결과 예술은 소수 전업적 예술가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17.그러나 노동자 계급 대중은 자본의 이러한 억압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중은 자신의 억압된 삶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예술에 호소했다. 때로는 예술의 생산자로 때로는 예술의 소비자로 말이다. 예술의 기술복제 시대는 대중의 이러한 주체적 힘에 의해 열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이 대중의 예술적 욕구를 포섭하여 이윤의 채널로 그것을 끌고 가는 공격 무기이기도 했다.

18.대중예술의 등장은 이렇게 양면성을 갖는다. 그것은 대중의 예술 욕구의 실현이면서 동시에 자본에 포섭된 형태로의 실현이다.

19.대중예술은 삶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 이것은 현시대를 특징짓는 주요한 요소인 정보(inform+formation)가 대중의 지성(intelligence)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과 동일하다. 정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앎이지만 그것이 타자와의 살아있는 공동체적 관계의 산물이자 그에 대한 지식임은 감추어진다.

20.정보시대(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 지성의 시대)에 삶을 드러내는 것은 지난한 노력과 투쟁을 요구한다. 예술적 재능들의 상당 부분이 지금 자본의 수중으로 팔려가고 있지만 예술을 이용하여 삶을 감추고 통제하려는 자본의 노력을 허무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21.오늘날 노동자들의 예술적 자기표현들, 특히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이며 여타 일체의 대의 기구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 자기표현들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만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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