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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공장 공장장의 결핍

얼마전 친구와 후배가 우리집에서 이틀 동안 묵고 갔다. 친구는 자신의 사진책 발간을 위해 온 것이었고, 후배는 된장 장사를 하기위해서였다. 20여 년 전에 야학에서 만난 그 후배는 제대 후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진로그룹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 당시 연락이와서 한 번인가 만났는데 그후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두절이라기보다는 안 만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술을 거의 못하던그로서는 연구소에서 맛보는 술만으로도 충분했을 테고 워낙 가정적인 친구라서 허랑방탕하게 지낼 위인이 아니었다. 퇴근 후에는아파트 단지에서 테니스를 치고 주말이면 주로 절을 찾는다고 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상한 열정과 집착과 절망적인 심리 상태에서지내던 내가 그 후배에게 연락을 안한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고 진로그룹이 망한 후그 후배는 지리산 견불동에 들어가서 된장공장을 차렸다. 공장만 차린 것이 아니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식솔을 이끌고 들어간것이었다. 나는 걸핏하면 매체에 소개되곤 하던 ‘첼리스트 여자와 스님 출신의 남자’가 만드는 된장 마을을 떠올리며, 그가 또다른허상을 좇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은근히 했다. 하지만 그는 캐나다 이민을 위한 모든 수속을 다 밟은 상태에서 돌연 걸려든지리산 그곳에 반해 ‘환상적인 꿈’을 꿀 겨를도 없이 정착을 했다고 한다. 이제 삼 년째로 접어든 그의 지리산 생활은 제법촌냄새나는 구색을 갖추고 있었고 이제는 영업망을 확보할 단계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그 후배가 유기농산물 영업망과 관계를 맺기위해 서울에 왔던 것이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모처럼 온 그들과 함께 약간 들뜬 상태에서 지냈고, 그들을 떠나보내던 날 서울날씨는 유난히 흐렸고 마음 또한 흐렸다. 그 후배가 도착한 후 게시판에 올린 글은 “집에 도착해 내가 이뤄놓은 것들을 보면서드는 생각. 정말 잘 내려왔구나,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살아야지… 서울 사는 형들에게는 미안하네요,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로끝을 맺고 있었다. 그 후배야 진심으로 그런 글을 썼겠지만 나는 그것을 매개로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 과연 그는행복할까라는 생각이 첫째였다. 행복이란 그야말로 마음에 달린 것인데, 도시 경제와 관계를 맺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형편에과연 ‘단절된 행복’이나마 가능할까? 극도로 불리한 농촌의 교육조건은 어떻게 견딘다 하더라도 어차피 세상에 내보낼 아이를 둔부모의 입장에서 느끼는 경쟁심은 어쩔 것인가?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접할 수밖에 없는 도시의 문화환경으로부터 느끼는 상대적박탈감은 또 어쩔 것인가? 스쳐 지나가는 시골이야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시골 역시 외양간부터 부엌까지 자본주의의 때가덕지덕지 묻어 있다는 것은 잠시라도 그곳에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안다. 도시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도시보다 훨씬 더, 누구네 자식이명절 때 무슨 차를 타고 오느냐, 무슨 직업을 갖고 있으며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가 가장 관심사인 것이 요즘 시골의 풍경이다.시골의 논밭을 버리고 도시로 떠날 수는 없어도, 도시의 복잡함과 숨이 칵칵 막히는 공기 때문에 살지 못할 곳이라고 말하면서도,시골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선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매일 흙을 손발에 묻히며 사느라 한번도 앉을 일이 없을 것 같은 가죽소파가놓여 있는 양옥풍의 실내, 텔레비전 드라마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내 미장센, 내가 이 년 정도 살았던 어느 시골에 있는삼십대 부부의 집이 바로 그랬다. 다행히 후배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는 자연의 귀중함을 알고 있으며 목회적 삶을 유지하기위해서는 덜 인공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선택이 타인을 향한 ‘간접적강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재래식 자연된장을 모르는 사람보다 그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오해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런 선택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괜찮은 과거와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거를 갖지못했거나 도와줄 가족이 없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선택은 호사스런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음식을선호하기는 하지만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품은 사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의 직장이 문을 닫지않았다면, 자신이 누렸던 안정이 박탈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선택은 ‘사람다운 삶’을능동적으로 지향한 것이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개인적 행위였을 뿐이다. 물론 워낙에 품성이 착하고 도량 또한 있는 그가 잇속차리는 장사를 위해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 같으면 된장조차 만들지 않고 소박하게 살고 싶었겠지만 세상에공짜는 없는 법,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좋은 뜻이 담긴 장사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궁극적인 대안은커녕 차선책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만약 그가 건강한 음식의 생산과 소비로 얽힌 자족적인 도농 공동체의 구성에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가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나도 가끔은 그런 생활을꿈꾼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며 못할 것이다. 법도 도둑도 들어올 수 없는 깊은 오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삶을선택하지 않는 한, 혁명적 열정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는 각오로 버무려진 계획이 없는 가운데서 실행한 공간 이동은 결코 결핍을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적 삶은 어차피 결핍투성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는 절망적인 판단도자주 한다. 도대체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려고 들면 들수록 우리네 삶은 꼬이게 되고, 어느 것 하나가 채워지면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결핍이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결핍이란 그것을 애써 감추려들면 더 크고 또렷하게 드러나는법이다. 마음을 비워? 이건 웃기는 소리거나 수사에 불과한 소리다. 나는 내 후배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기 방식을고집하면서 그때까지도 ‘내려오길 잘했다’는 말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양질의 우리 농산품을 천연적이며 전통적인 방법으로맛있게 만든 그의 된장이 음식의 소중함을 아는 도시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 현재적 삶을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에게 ‘운동’이나 ‘사생적 결단’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는 그런 폭력적 권리도없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 어쩌구 저쩌구” 하는 혹세무민 발언에 서로가 속아주면서 도취될필요도 없다고 본다(세상을 살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위로나 위선이 필요하듯 구태여 위악을 떨 경우도 있다). 그 후배만큼착하고 예쁜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백돌이라는 개는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떠오르지만, 그들이 어렵사리 ‘자본’을 밀어내면서빚어내고 있는 삶의 결을 보는 내 눈에는 다른 것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빚어내는 그 삶의 결에도 자꾸만 ‘자본’이 끼어드는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천국의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아주 딱한 표정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착한마음 고운 눈물로 얼룩진 <선물>을 애써 냉대하는 것이고, 위악적인 손길로 빚어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와 김수영의산문 그리고 세상을 둘러싼 껍질을 끝없이 벗겨내는 학자 촘스키의 정치적 실천을 동경하는 것이다.

2001.04.20 / 이효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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