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 거대한 소란의 속살
강준만, 김규항, 김정란 비판 그리고 ‘군중과 다중’

 

이 글은 <문예중앙> 가을호에 ‘군중이냐, 다중이냐’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으로 해당 출판사와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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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으로 벌어진 거대한 소란. 얘기할 가치도 없는 해프닝.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논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와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이쯤에서 그 영화의 옹호자들이 쏟아놓은 주장들을 점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학적으로 논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옹호론은 대부분 궤변에 불과하다. 그 궤변들에도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는 임상학적 성격의 것이리라. 즉 그 궤변들은 한국 사회가 앓는 정신질환의 실체를 보게 해준다.

보르헤스가 말했던가? 케네디의 머리를 관통한 총탄은 링컨의 가슴을 관통한 총알이었고, 그 이전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던 못이었고, 시저의 가슴을 꿰뚫은 브루투스의 칼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들이마신 독배였고, 아벨에게 던진 카인의 돌이었다고.

 

동일자의 영겁회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며 계속 반복되는 어떤 원형 같은 게 있는 듯하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칼 마르크스도 어디선가 역사의 ‘반복’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문자문화의 합리성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영상문화의 공습이 언젠가 다른 곳에서 이미 벌어졌던 것과 너무나 비슷한 별자리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이 현상은 과거에 이미 있었던 일의 반복, 하지만 ‘희극’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우울한 패러디다.

대중의 환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대결하겠다던 이 영화를, 이제는 그 열광자들마저 “방학 특선 어린이용” “B급 괴수영화”라 부른다. 전 세계에서 8조를 벌어들이고, 중소기업 4만 5천 개를 먹여 살리겠다는 경제적 야심,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따라잡겠다던 예술적 야심은 상식을 가진 사람의 귀에는 허황하게 들린다.

 

 

   
 
 

 

그런데 누가 들어도 이 허황한 얘기가 졸지에 대중의 열망이 되고, 또 대중의 확신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제작비가 모두 2000억이 들었다’, ‘100% 미국 투자로 만들어질 것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와 계약을 했다’, ‘유수한 외신과 회견을 할 것이다’ 등등. 학력에 관한 언급은 접어두고라도, 심형래 감독이 제 영화에 대해 늘어놓은 거짓말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대중은 그를 변함없이 신뢰한다. 바이트 할란 감독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한 자가 ‘그’였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 되었다.”

자신이 겪은 좌절을 심감독에 투사하는 대중을 따뜻하게 이해하자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대중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던 한 사내의 말이 떠오른다. “대중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는 극장과 영화관 밖의 환상이 필요하다. 인생의 고통에 대해 그들은 겪을 만큼 겪었다.”

 

이 다감한 사내가 대중과 더불어 썼던 민족의 서사시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애인과 함께 자살을 하는 극적 장면으로 끝났다. ‘그’가 말했기에 거짓도 진실이 되었다던, 그 사내의 얘기다.

 

영화와 전쟁

할리우드에 대한 열등의식도 이미 오래 전에도 있었다. 연합군 함대로부터 노획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나서, 괴벨스는 독일 영화의 뒤떨어지는 색채효과에 치욕을 느꼈다. 덕분에 Agfa 컬러 기법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긴 했다.

 

패망의 그 순간까지도 괴벨스는 “그 화려함에서 미국의 호화판 초대작을 능가하는 서사시”를 꿈꾸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사단이 궤멸당한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전선의 병력을 빼내어 영화 촬영에 동원하려 했다.

영국군의 기습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영화 촬영에 전함과 항공기, 공수부대를 동원하려던 이 계획은 “영화를 위해 죽는 것보다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병사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콜베르크>(1945)라는 영화의 제작을 위해 히틀러는 장비부족으로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말 6만 마리와 20만 명의 사람을 촬영에 동원한다. 1945년 영화가 드디어 개봉 준비를 마쳤을 때, 폭격을 맞은 베를린에는 더 이상 상영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전략이 한국영화의 일반적 전략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대중은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한국 영화의 도약을 방해하는 “매국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100억의 자본 규모를 갖고 있어 300~700억짜리 영화를 찍는 데에 부담을 느끼는 충무로의 일상에 대중은 환멸을 느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 정복의 환상이다. <위대한 승리>를 찍은 레니 리펜슈탈의 말이다. “갑자기 평범한 일상을 끔찍하게 느끼면서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유혹에 매혹되는 인민들…”

대중의 반란

“이건 전쟁이다. 처음은 몇몇 평론가와 네티즌 사이의 작은 설전으로 시작되었다. (…) 언론이라는 이름의 표지를 건 군수업자들이 이송희일, 김조광수씨의 숨어있는 개인 블로그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광장에 모여든 군중들 앞에 전시하고 외쳐댔던 것이다.

 

‘보라! 여기 너희들이 타격해야 할 적이 있다’고. (…) 이제 전쟁은 충무로와 일부 언론 대 전체 대중들 사이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김동렬, <디워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무로를 타격하라> 데일리서프라이즈 08/07/2007)

대중은 급기야 <디 워>를 “충무로와 전체 대중들 사이의 전쟁”으로 만들어 버렸다. 평론가는 권위주의에 찌든 권력자로 폭로되고, 대중은 권력의 특권을 철폐하는 디지털의 전사로 상찬된다. 이 반지성주의 슬로건도 새로운 게 아니다.

 

“1789년 이래로 혁명은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작품이었다. 지식인은 국가의 단합에 반대하는 썩어빠진 목적으로 갖고 있기 마련이다. 반면 영웅적인, 전민족적인 나치혁명은 그것의 결정적인 국면마다 지식인의 지배력에 대항하여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거대한 해프닝이 감독의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도대체 충무로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충무로’라는 게 대체 실체가 있는 집단일까? 하지만 그가 손가락으로 충무로를 가리키자, 한국 영화계 전체가 그 이름에 묶인 채 타격해야 할 공공의 적이 되었다.

 

자신의 실패를 변명하는 개인의 이데올로기가 곧 대중의 세계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의 표상이 곧 너희의 세계다.” 벙커에서 자살한 망상증 환자의 말이다.

영웅담의 시대

33조를 벌어다 주겠다던 황우석의 약속. 8조를 벌어다 주겠다던 심형래의 약속. 언젠가 심감독은 황박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선진국의 국민들은 영웅이 나오면 격려와 함께 제도적으로 밀어주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영웅이 나오려 하면 비난하거나 짓밟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대중도 다르지 않아, 인터넷 여기저기에 “개비씨(MBC)의 심형래 죽이기는 황우석 죽이기의 복제판“이라는 주장이 떠돈다. 청동기의 영웅시대로 몰입하는 것이 게임 세대의 일상. 대중은 영웅과 더불어 신화를 쓰려 한다.

33조나 8조라는 약속은 결코 ‘현실적인’ 액수가 아니다. 어떻게 이 허황한 액수가 대중의 확신이 되었을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과장법을 남발하는 이를 외려 불신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것은 구차한 ‘현실’이 아니라 화려한 ‘환상’.

 

약속은 작을수록 현실적으로 되나, 환상은 크게 부풀릴수록 더 현실적으로 된다. 히틀러의 말대로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더 쉽게 속기 마련”이다. 대중은 믿고 싶어 한다. 거짓말이 클수록 믿고 싶은 마음도 더 커진다.

영웅이 위대해질수록 대중은 왜소해진다. 대중은 위대해지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영웅과 동일시하는 것. 그리하여 대중은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처럼 기뻐하고, 그의 좌절을 나의 좌절로 슬퍼하며, ‘그’에 대한 찬양을 ‘나’에 대한 칭찬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어느 심감독 지지자가 나를 비난한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놈.” 남 잘난 맛에 사는 이들에게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은 치욕인가 보다. 대중의 자기소외. 이 역시 1930년대의 패러디다.

대지와 혈통의 신화

<디워>를 둘러싼 벌어진 해프닝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뚜렷해지는 어떤 일반적 경향의 한 예로 봐야 한다. 황우석 사건 때에도 대중은 이번과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반응했다.

 

앞으로 또 다른 몽상가가 또 다른 ‘기술’로 세계를 정복하겠노라고 ‘자극’을 주면, 대중은 아마 지금과 똑같은 열역학적 에너지를 가지고 뜨겁게 ‘반응’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워>는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보편적 정신질환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얼마 전 유엔에서 한국 순혈주의의 인종차별적 측면을 지적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방송 토론에 참여했을 때의 일. 패널로 나온 교수가 한반도에서 출토된 구석기인과 현대 한국인의 두개골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이를 ‘민족적 정체성’의 근거로 제시한다.

 

한민족이 구석기시대 이래로 한반도의 터전을 지켜왔다는 얘기다. 이는 물론 과학이 아니라 신화에 속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30년대에 나치들도 아리아인종의 순수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골상학을 동원했었다.

토론 후에 시청자 게시판에 들어가니, 애국애족의 목소리가 아우성을 친다. “솔직히 히틀러 총통께서 인종청소를 안 해주셨으면 지금 유럽 열등 유태인들로 인해 온갖 악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위대한 히틀러 총통의 정기와 근성을 지닌 위대한 독재자가 출현하여야 한다.”“단군 왕검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펴 주소서. 민족주의 만세! 순혈주의 만세!!! 국제화 운운하는 민족의 반역자들은 동남아 열등 인종들과 함께 대량 멸절시켜야 한다. 배달민족 만세다.”

삼족오와 하켄크로이츠

 

작년에 있었던 ‘삼족오 소년소녀단’ 사건. 고구려의 얼을 되살리겠다고 만든 이 스카우트의 복장이 공교롭게도 히틀러 유겐트의 유니폼과 너무나 흡사했다. 논란이 일자, 주최 측에서는 ‘왜 자신들을 나치와 비교하느냐’고 항변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나치’라 불리는 사람들이 실은 별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 역시 일상에서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자신의 애국심을 유니폼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취향이 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까?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세례 없이 오로지 심정만으로 성립한 프로토파시즘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스카우트를 조직하게 된 계기. 그 단체의 홈페이지는 “KBS, MBC, SBS.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로 방문객을 맞는다.

 

한 마디로, 방송 3사가 방영한 고구려 관련 드라마를 본 감동에서 소년소녀단을 조직하게 됐다는 얘기다. 드라마는 ‘역사’가 아니라 ‘허구’다. 허구가 허구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려 할 때, 문자로 쓰는 역사는 종언을 고하고, 영상으로 그리는 신화가 부활한다.

문자문화가 저물어 가면서 그것의 역사적 성취였던 합리적, 이성적, 비판적 사유도 사라져 간다. 문자문화의 성취를 채 흡수하지 못한 영상문화는 영웅적 민족서사시를 쓰며 문자문화 이전의 신화적 사유를 강화한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우익은 국가주의, 좌익은 민족주의로 쪼개어져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진보와 보수의 구별을 모르는 새 세대의 의식 속에서 국가와 민족은 더 이상 갈등하지 않는다. 둘은 만나서 하나가 된다. 그 화합의 절망적 징후를 인터넷의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군중이냐 다중이냐

대중을 능동적 주체로 만든 것은 미디어의 기술이 가져다 준 역사적 성취다. 모든 테크놀로지가 그렇듯이, 미디어 기술 속에서도 해방의 잠재성은 억압의 위험성과 한 몸으로 붙어 있다.

 

대중이 문화적 발언의 주체로 나서는 것 자체는 진보적이나, 대중이 그 힘을 소수의 견해를 억압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반동적이다. 황우석 사태는 사이버 공간에서 대중독재의 순수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방송사 하나를 날릴 뻔했던 그 가공할 파괴력에 비하면, 심형래 사태(?)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대중은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한 ‘군중’이 될 수도 있고,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 텔로스를 상실한 대중은 더 이상 민중이 될 수 없기에, 이제 파시스트적 군중이나 자율주의적 다중이 되어야 한다.

 

자율적 개인으로 흩어져 지성의 연대를 구축할 때, 대중은 다중이 된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감정의 에너지를 모아 폭력적으로 분출할 기회를 찾아 배회할 때, 대중은 군중이 된다. 이번 사태에서 대중이 보여준 양태는 과연 어디에 가까울까?

기사를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몇몇 매체는 파시스트 군중의 행태를 외려 ‘대중지성’으로 축성하기에 바빴다. 놀라운 것은 이 군중의 폭력에 이른바 제법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까지 편승했다는 사실.

 

대중이 다중이 되기 위해서는 문자문화의 성취인 합리성이 필요하나, 그들은 그 폭력적 사태를 버젓이 지켜보고도 군중과 지식인 사이에 그 허구적으로 설정된 전쟁에서 기꺼이 군중의 편을 들었다. 이론적 미련함의 소치일까? 아니면 정치적 영리함의 결과일까?

지성계의 영구들

시인 김정란은 <디워>에 대한 열광이 애국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디워>를 “용녀의 귀환과 모성성의 재발견”으로 읽는다. 이 페미니스트 수사학, 그 지지자들까지 “아동용 B급 괴수영화”라 부르는 영화에 붙이기에는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자면, 거대한 뱀은 프로이트를 따라 남근의 상징으로, 또 이 뱀은 사라라는 여성을 삼켜야 용으로서 승천할 수 있으므로, <디워>야말로 남성성의 완성을 위해 여성을 희생시키는 울트라 마초 영화라 해야 할 게다.

강준만 교수 역시 대중의 분노에 슬쩍 편승해 <디워>에 대한 열광을 느닷없이 ‘캠프’로 읽는다. ‘캠프’가 뭔지 알고 하는 얘길까? ‘캠프’라는 말로써 나는 동성애자의 문화, 여자로 분장한 뒤샹의 사진, 피에르와 질의 과장된 키치, B급 취향을 예술로 끌어들인 앤디워홀 등등을 연상하나, 그는 그 말로써 다른 것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캠프’라는 개념 자체가 아무리 모호해도, 이송희일과 김조광수 감독을 “호모”라고 부르는 군중의 취향을 ‘캠프’라 부르는 것은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영구스럽다.

칼럼니스트 김규항은 ‘B급 좌파’라서 그런지 ‘B급 괴수영화’에서 연대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지식인의 교만을 탓하며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라”고 설교한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평론가가 대중의 취향을 무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외려 대중이 평론가의 취향을 무시함으로써 발생했다.

 

‘무시’만 한 게 아니라 아예 온갖 욕설과 폭언을 동원해 집단으로 ‘공격’까지 했다. 그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켜 놓는다. 왜 그는 힘들게 물구나무를 서서 글을 쓰는 걸까?

기생충으로서 비평가

예술의 최종 목적은 대중의 취향을 섬세하게 하는 데에 있다. 창작을 향해 피드백을 하면서 평론가는 동시에 수용을 향해 작품과 대중을 매개한다. 100년 전에 대중의 비난을 받던 현대예술을 오늘날 우리가 즐기게 된 것도 비평가들 덕이다.

 

대중은 한국의 평론가들이 쓰는 글이 어렵다고 불평하나, 외국 평론가들이 쓰는 글은 더 어렵다. 도대체 평론가들의 글이 어려우며, 그들의 평가가 자기와 다르다는 게 평론에 전쟁을 선포할 이유가 된단 말인가? 이 전쟁을 축성하는 B급 좌파의 글을 보자.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 영화평론가란 대개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음악평론가란 작곡이나 연주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문학평론가란 작가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출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평론가란 대개 애초 생산을 꿈꾸었으되 재능의 부족이나 의지의 박약, 혹은 지나치게 운이 없어(본인의 주장이 그렇다는 얘기) 꿈을 접었으나, 아예 그 바닥을 떠나려니 너무나 서럽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남의 생산에 평론이나 일삼으며 사는 사람‘이다.”

괴테와 쉴러를 낳은 빙켈만, 추상표현주의의 아버지 그린버그, 미디어 이론의 선구 벤야민이 어디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었던가? 평론은 생산이 아니란 말인가? 그의 말대로 평론가들이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평론가를 비난하는 글을 쓰는 김규항은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에 기생하는 사람’일 게다.

 

그는 예술과 학문이 제 이해력의 안쪽에 머물기를 원하는 듯하다. 한국의 예술과 인문학이 무지한 개인의 이해력 너머로 발전 좀 하면 안 되는가?

대중의 지성?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이 지경이니 대중은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자칭 ‘문화평론가’의 말은 대중이 전문가에 대드는 수준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미학이론이 복잡한 수식이 있는 물리학도 아니고 의사처럼 특별한 수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학문이라서 일반인들도 쉽게 경쟁자로 나설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하다못해 주먹질에도 전술이 있고 훈련이 있다. 일반인이 복서 앞에 “쉽게 경쟁자로” 나서면, 맞는다. 그리고 맞으면 아프다.

강준만을 추종하는 또 다른 ‘문화평론가’는 제 스승에게 배운 스킬을 활용해 내게 “미학을 제대로 공부했는지 의심스럽다”고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해 검색해보니, 미학분야에 저서가 하나도 없다.

 

그는 또 내게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고 인신공격을 한다. 그가 자랑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뭔지 찾아보니, 대충 이런 것이다. ‘에로 배우 유리, 제2의 진도희가 될 것인가.’ <디워>에 대해 한 마디 하기 위해 젖소 부인의 가슴 사이즈를 알아야 하는가?

방송 인터뷰에서까지 이런 대중의 헛소리에 대한 나의 견해를 요구한다. 이를 반박하려면, 역으로 인신공격을 퍼붓거나 내 입으로 자기자랑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웃고 넘어가지요”라고 했더니, 또 ‘왜 대답을 회피하느냐’고 아우성들이다.

 

굳이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제3자의 평가를 들이대야 하는데, 굳이 방송에서 자칭 대중문화 전문가가 쓴 책의 판매지수가 22이고,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자의 것은 지수가 11788이라고 너절하게 늘어놔야겠는가?

정치적 욕망들

이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이다. 그 와중에도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이들도 있다. 조선일보는 진중권에 대한 네티즌의 분노가 정권을 잡고서도 일자리 하나 못 만든 386세대에 대한 포스트 386의 반란이라고 주장하며, 12월 19일 날 이 싸움의 결판을 내자고 선동을 한다.

 

이 황당무계한 주장의 근거를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은 엉뚱하게 소설가 김영하와 사석에서 나눈 얘기에서 끌어온다. 그래서 소설가는 수준 낮은 기자와는 술을 안 먹는 게 좋다.

강준만의 추종자는 <디워>를 위해 경쟁작을 공격한다. <화려한 휴가>가 열린우리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황당한 주장은 호남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민주당의 시각이자, <조선일보>의 필자에게 따르는 의무의 충실한 수행이자,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사건에 편승해 이용해 자기가 만든 매체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다목적 포석이다. 안티조선에서 프로조선으로 변신한 꺼삐딴 변은, 귀순용사는 환영대회 끝난 뒤엔 용도폐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김정란이 스스로 망가지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뤄야 할 어떤 정치적 대의 때문일 게다. 그의 글을 실어준 <데일리 서프라이즈>는 대표적인 친노 매체. 황우석 사태 때에도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표로 연결시키려 그 열기에 편승한 바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지지자들과 달리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디워>와 보조를 맞추되, 이를 <화려한 휴가>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화려한 휴가>의 관객이 500만이 넘으면 대선에 승산이 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것은 민중주의적 버전이다. 그는 ‘포스트모던’ 먹물의 어려운 언어에 울분을 터뜨린다. 한국 지식인들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론적으로 비판할 일이지, 대중의 분노를 선동할 문제는 아니다.

 

모든 학문은 분석을 위해 B급 좌파의 모자라는 교양수준을 넘어서는 특수한 언어체계를 사용한다. 가령 ’내쉬균형‘이 뭔지 모른다면, 그 사태는 그가 책을 읽음으로써 해결할 문제지, 그 낱말을 내뱉는 수학자나 경제학자를 타도할 일이 아니다. 지식인에게는 무식할 자유가 없다.

진화냐 퇴행이냐

<디워>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분출된 에너지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 영상문화와 더불어 신화적 의식이 강화되고, 네트워크의 힘으로 개인들이 군중으로 뭉치고, 냉엄한 현실에서 허황한 환상으로 비약하고, 이 과대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영웅을 만들어내고, 자기를 소외시켜 자신을 그 영웅과 동일시하고, 그와 더불어 민족적 신화를 창조하려 하고, 그 목표를 비웃는 자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는 상황.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인지다.

 

 

   
 
 

‘대중과 지식인의 전쟁’이라는 것도 실은 공격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군가 날조한 허구에 불과하다. 대중들 중에도 영화를 그저 영화로 보는 개념인이 있는가 하면, 지식인 중에도 영화에 온갖 해괴한 해석을 붙여대며 대중의 가장 후진적 층위에 영합하는 이들도 있다.

 

이번 사태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최고의 표현. “심형래 감독은 영화에서는 역시 감독의 연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탁월한 문학성은 인터넷에 부유하는 무명 대중의 것이다.

과개발된 인터넷과 저개발된 인문성. 인터넷 대중은 비판적 합리성을 가지고 ‘다중’으로 진화하느냐, 원시적 폭력성을 가지고 ‘군중’으로 퇴행하느냐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아니, 대중은 이미 분화를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난독증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가 되고, 어떤 이들은 집단에서 독립한 자율적 주체로서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개인과 접속해가며 지성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간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지형을 인지하는 것. <디워>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2007년 09월 20일 (목) 11:11:29 진중권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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