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넷 뉴먼

모더니즘

대공황과 2차대전의 경험. 그러나 이런 위기 앞에서도 서구 회화는 “가장 깊은 경험을 묘사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대의 황폐함과 도덕적 충격을 표현하려면 유럽의 전통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예술의 본질은 교조의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저항에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뉴먼은 모더니스트다. 유럽의 전통과 단절하고 그것과 구별되는 미국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학적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뉴먼은 ‘미’를 거부하고 ‘숭고’의 범주를 내세우게 된다. 이를 위해 Longinus, Burke, Kant, Hegel의 숭고론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결론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려고 함.

내용과 형식

뉴먼의 추상회화는 형식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형식의 추상성은 사유의 추상성과 관계, 즉 “추상적 사유”와 관련이 있다.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subject matter)다.” 주제의 우선권. 그에게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예술은 추상적 사유, 즉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한다.

추상과의 싸움

‘시각적 사실의 형식적 추상’이 아니라 숭고한 감정을 실어나르는 “살아 있는 물건”, “살아있는 매체”를 만들어내려고 함.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형태는 묘사의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마술적 수단이다. 그것은 논리적, 수학적 추상의 결과가 아니라 인디언 회화에서 비롯된 형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몬드리안을 비판한다. “그의 기하학(=완성)이 그의 형이상학(=exaltation)을 삼켜버렸다.” 뉴먼의 작품은 동시대의 색면회화(color field)나 옵아트와 달리 주제가 있는 회화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학이론의 시각화, 형상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학과 예술의 관계는 조류학과 새의 관계와 같다.”

숭고의 체험

그에게는 어떤 체험이 있었다. 언젠가 그는 자기의 그림에 스스로 압도당한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그것과 함께 살았다.” 후에 그는 “나는 내게 감명을 주는 진술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내 현재 삶의 출발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상징주의가 아니다. 언어로 번역될 수 없고, 연상을 통한 지시로부터 해방된, 그 자체가 절대적인 예술적 진술이었다. 그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로서 “현전”으로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동’, 즉 ‘사건’의 체험이다. 뉴먼은 자신을 추상화가라기보다는 액션 페인터에 가깝게 보았다. 한 마디로 뉴먼에게 회화는 숭고를 위한 심벌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숭고 그 자체를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료타르는 이를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불렀다. 흔히 큰 그림은 먼 거리에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뉴먼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뉴먼의 그림 앞에 서면 관찰자는 열광을 경험하게 된다. 혹은 감정, 감각의 물결을 뒤집어 쓰게 된다. 뜨거운 숭고와 차가운 시각적 사실 사이의 동요가 뉴먼의 캔버스의 제의적 효율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주제영역

(1) 창조의 행위와 사건(창세기=Genesis의 연출).
(2) 위치함의 행위와 성스러운 장소(“내 목적은 환경이 아니라 장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장소는 ‘공간’이 아니라 ‘장소’, 즉 유태교적 의미의 Makom이다.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
(3) 영웅적, 숭고한 인물들.
(4) 빛.
(5) 존재의 상태.

zip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웅적 경험이 바로 매체를 변형시키려는 예술의 투쟁, 예술가 자신의 투쟁. 예술적 창조=신적 창조라는 유비. 바로 이것을 통해 숭고함에 ‘참여’하게 된다. 굳이 이를 위해 높은 산, 넓은 바다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다. 화면을 거의 무(無)로 돌림으로써 창조를 위한 신의 공간을 만들려 함. 이를 료타르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름.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수직선(“zip”)은 어떤 초자연적인 가르침, 즉 oneness와 placeness의 영적 긴장을 표현한다.

숭고의 부정적 묘사

숭고는 노랗지도 파랗지도 빨갛지도 않다. 그는 예술에서 자연을 배제하려고 했다. 색채는 “사고의 복합체” 속에서 파괴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색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성과 그것의 효과였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 하랴> 다양한 색채-> 3원색->이윽고 전체 속에서 사라지는 영점. 형이상학적 기능을 위해서 형태와 색채는 사라진다. 크기, 모양, 색채, 재료에 관계 없이 ‘일자'(Oneness)가 되는 것, 그 일자성(oneness)를 전달하는 것이 회화. 따라서 emptiness가 필수불가결한 배경이 된다. 총체성과 공허함의 모순적 결합. 존재와 부재의 결합. 세속예술을 통한 종교예술의 효과. 이를 위해 체->면->선->점… 이윽고 모든 형상은 점이 되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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