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영화 한 편으로 한 배우가 좋아지게 된다. 이것은 최면 같은 거다. 나에게는 성현아가 그렇게 됐다. 가수로 나왔을 때, 영화 ‘애인’에 나온다 했을 때 나는 그가 여느 이들과 다름없는 ‘인형’이나 ‘연예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영화에 나온 그의 모습을 이에 대한 반론으로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그 영화가 그를 바꾸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영화 ‘주홍글씨’도. 하지만 난 이 영화를 아직 제대로 못 봤다. DVD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아직…)
그러나 나는 영화 ‘시간’을 보고 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길가의 큰 나무줄기를 마구잡이로 걷어차고 있었다. 과격하지만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는 발짓이 아니라, 말그대로 마구잡이로.
그리고 정말 미친듯이 무심하고 상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느 배우들처럼 미친듯이 보이기 위해 미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는 영화에서 배우는 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도구조차도 때로는 나름의 관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가 아름답게 보였다.

우연히 보게 된 프리미어에서 그와의 인터뷰를 퍼 나른다. 간만에 재미붙였다.

 

에서 성현아

 

성현아는 가늘고 길게 산다

2006-08-21

신기주 기자 / 사진김선태

성현아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게 두렵다. 막막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건 살아지는 대로 가 아니라 살아가고 있어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성현아에겐 <시간>이 약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여리다?
정말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는 참 여린 사람이다. 섬세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거다.

승승장구하지 못했던 게 오히려 행운이다?
가늘고 길게 가는 거지.

김기덕 감독에 얽힌 소문들도 많다. 예전엔 여배우들과 유난히 각별하다고 해서 말들도 많았다.
감독님 본인도 그런 소문들 얘기를 한다. 김기덕 감독에 대한 소문은 소문이 소문을 낳은 듯하다. 사람들은 겪어보지 못한 채 다른사람을 평가한다. 한때 나한테 그랬듯이 말이다. 내가 본 김기덕 감독은 순진하진 않아도 순수한 사람이다.

김기덕 영화는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다. 요즘은 덜해진 듯하지만 <시간>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하정우 씨의 옛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너 옛날에 나 좋아했지?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서 좀 헐었지만 그래도 날 가져. 그 대사 말인가?

여배우가 김기덕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어떤 건지 궁금해지더라.
모든 사람에게 다 친절할 필요는 없지 않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그의 룰에 나를 맞춘다는 얘기다. 그게 배우다.일단 그의 룰을 받아들이면 남들의 잣대가 무엇이든 문제될 게 없다. 나 역시 모든 인간들에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고싶지도 않다.

무슨 얘긴가?
김기덕 감독처럼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어차피 나는노출에 신경 쓰는 배우도 아니고 대중들이 선호하는 스타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길을 가는 것뿐이다. 관객들이 내영화를 안 보면 난 안 보는 사람이 손해라고 생각한다. 난 그렇다.

꼭 영화를 해야 했나? 연기나 연예 활동 말고 아예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할줄 아는 게 있어야지. 또 영화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어쨌든 영화는 연기자들의 로망이니까. 알고 보면 영화계가 참 배타적인곳 아닌가. 보수적이고. 그런데 나한테는 오히려 문을 편하게 열어줬다. 영화는 어려울 때 유일하게 내 손을 잡아줬다.

그랬던 성현아가 다른 여배우가 돼 있다. 김기덕,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모두 출연한 여배우는 당신뿐이다. 시간은 그렇게 사람을변하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이 성현아를 <시간>에 캐스팅한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시간이 만들어내는 부침을 당신만큼온몸으로 체험한 여배우도 드물다.
<시간>엔 김기덕 감독의 지금 정신 상태가 많이 배어있다고 본다. 물론나를 닮은 부분도 있겠지. 남자의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한 여자는 성형수술을 한 다음 딴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간이 권태를만들어냈다고 믿었으니까. 새로워지면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건 대중을 상대하는 배우한테도해당되는 일 아닌가? 대중은 처음엔 신선해 하지만 금세 질려버린다. 여배우는 노출 연기를 아껴둬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른이유가 아니다. 옷을 벗으면 사람들은 다 봐버렸다고 느끼고 금세 식상해버린다는 얘기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불리한 상황이다.
이상하다. 내가 노출 연기를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다 봤다 이거다. 나도 봤다.
…내가 이제 와서 예뻐 보일 것도 아니고 고상한 척하기에도 이미 많은 걸 잃어버린 거 아닌가. 이젠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진않는다. 어차피 난 비호감 배우니까. 크게 달라지겠나. 단지 지금처럼 일할 수 있으면 그뿐이다. 과정이 행복하면 내 인생이행복한 거다. <손님은 왕이다>에선 명계남 선배와 일할 수 있어서 좋았고 <시간>에선 김기덕 감독과 일할수 있어서 좋았다. 평생 <시간> 같은 작업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비호감도 호감이 되는 세상이다. 와이어에 매달려 날아다니던 당신이 지금은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과 일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전에도 몇 차례나 당신을 캐스팅하려고 했었다던데?
좀와전된 얘기다. 몇 차례 인터뷰를 했었는데 인연이 잘 닿지를 않았다. 처음 홍상수 감독은 날 마음에 안 들어 했다. 내가 온갖치장을 다 하고 인터뷰를 하러 갔었거든. 홍상수 감독이 나를 딱 보더니 ‘어휴’ 그러더라. 그러니 홍상수 감독이 나를 꼭캐스팅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지금은 나한테 연락도 안 한다. 난 전화번호도 모른다. 어쨌든 나 자신이많이 바뀐 건 맞다. 숙련됐다고 해야 하나. 지금 이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어차피 달라지지 않는다면서 가수는 왜 했었나?
웃긴 거지. 뭐,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미있었다. 흐뭇할 때도 있다. 내 음반도 있다.

노래 잘하나? 춤 잘 추고?
전혀. 몸이 뻣뻣해서 춤이 춤 같지가 않다.

그런데 왜 했나? 게다가 음반을 낼 무렵엔 배우로서도 슬그머니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무렵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홍상수 감독과 칸에 가지 않았나?
사실 발라드를 부르려고 했는데 댄스가 워낙 강세여서… 그러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캐스팅 됐는데 계약 조건이 촬영시작부터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는 영화 말고는 일절 다른 걸 하지 않는다는 거였거든. 한참 늦어져서 뜬금없어 보이게 된 거지.

그것도 예쁘니까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나?
요즘은 예쁜 애들이 너무 많다. 난 하나도 안 예쁘다.

미스코리아 출신 아닌가?
그러게 말이다.

독특한 거 같긴 하다. 뼈에 금이 가고도 한참 동안 모르고 방치했다가 얼마 전에 알았다던데 둔해도 너무 둔한 거 아닌가?
그게 정말 나다. 미스코리아는 외모지.

<시간>의 성현아는 여러 가지로 재미나게 읽을 구석이 있다. 시간은 미모를 앗아가니까. 그걸 새롭게 해도 얼굴만 바뀔 뿐결국 그 사람이 새롭게 되는 건 아니다. 다시 사랑을 얻을 수는 없는 거다. 미스코리아라는 미모도 시간이 그걸 앗아가거나지루하게 만든다.
그런 걸 따지면 너무 심란해진다. 아마 죽어도 여러 번 죽었어야 했을 거다. 난 중간 아닌가. 톱배우가 아니다. 늘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는 그런 대단한 스타들은 금세 사람들이 질려버릴까 노심초사하겠지. 하지만 난 중간에서묻어가니까 자유롭다.
중간에 시련이 있었던 게 오히려 행운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졌으니까.어떤가? 사랑이 변하나?
김기덕 감독은 <시간>의 시나리오 첫머리에 이렇게 써 놓았다. 사랑이 식은 건 아닌데 마음이 식고 몸이 식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안 그런가?

시간이 흐르면 사랑도 식더라. 몸이 식고 마음이 식으면 그게 사랑이 식는 거 아닌가? 사랑이 식은 건 아니라는 얘긴 이상하다.
그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오래 사귀면 사랑 때문에 만난다기보다는 정리할 게 많아져서 관계를 유지하게 되니까.

그렇게 흘러버린 시간을 억지로 되돌릴 수 있는 걸까? 성형수술 같은 걸로?
안 되지. <시간>도 그런 행위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끌어내려는 영화다. 정말 되돌릴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게 아니지. 시간이 흘러버린 사랑은 끝내야지. 헤어지는 게 맞다.

사랑이 사는 데 그렇게 중요한 걸까?
살면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복한 감정이 사랑 아닌가. 그것도 나이가 들면 귀찮아져서 느낄 수 없게 된다더라. 여자는 서른다섯 살만 돼도 사랑이 귀찮아진다더라.

그렇다면 당신도 몇 년 안 남은 셈이다.
그래서 다들 만나던 사람을 만나는 거다. 어떤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진다. 그러면 서로 싸우게 되지.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완벽한 게 아닌데 이 남자가 내 단점을 애써 참아주고 있겠구나 느끼게 되면 문득 고마워지는 거지. 또다른 사람을 만나봐야 다를 게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렇게 사는 거다.

성현아는 화려한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닐 거 같고.
어릴 때 쇼핑 참 좋아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돈도 시간도 참 아깝다. 요즘은 쇼핑할 돈도 시간도 없다. 틈이 나면 인터넷쇼핑을 한다. 그게 참 재밌다. 잘 보고 있으면 밤 12시가 넘어갈 무렵이면 가격이 5만 원이었던 게 3만 원으로 잠깐 내려갈때가 있다. ‘새로고침’ 스위치를 누르면 바뀌어 있는 거지. 그때 딱 사는 거다. 어찌나 행복한지.

정말 그런 거에 행복해 하면서 사나?
대신 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느끼면 불행해진다.

살아지는 순간이 더 많지 않나?
그러면 난 내가 뭘 위해 이러고 있는지 고민한다. 그런데 언제나 결론은 그런 고민도 삶의 일부라는 거다. 이러다 내가 죽어버리면 내가 안고 있던 고민도 사라지는 거 아닌가. 내 존재가 있어서 고민이 있는 거지.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나? <애인>도 그렇다. 하고 싶어했던 건 아니지 않나? 당신은 제작사가 섹스만 강조한다면서 홍보를 안 하겠다고도 했었다.
배웠다는 영화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답답한지. 그때까진 일을 하면서 고집을 피워본 적이 없었다. 그땐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소심하게 내 블로그에 글을 올렸는데 일이 커졌다.

영화라는 게 원하지 않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게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김기덕 감독도 <시간>에관련해선 인터뷰를 전혀 안 하겠다지 않나. 어차피 뜻대로 되는 게 아닌데 나서서 이러쿵 저러쿵 말해봐야 소용 없는 거니까.
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은 언론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었다. 나 역시 그런 편이고.

그렇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배우를 하겠다는 이유를 모르겠다.
솔직히 외국 나가서 다른 걸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든다. 난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배우인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배우니까 성현아가 있는거지.

연기를 하면 사는 데 자신감이 생긴다?
적어도 일할 땐 제대로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살아지고 있는 게 아니지. 다들 말로는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고들 하는데 난 뭘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현장에서 배울 게 더많은데 말이다. 빨리 다음 작품을 하고 싶다.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고 하지만 난 매 순간이 기회인 거 같다.

어떤 배우들은 당신을 부러워할 거다. 칸에도 가고 카를로비 바리에도 가봤으니까.
내가 거기 가서 한 게 뭐가 있나. 이번에 카롤로비 바리에 갔을 때도 내가 백 마디 하는 것보다 김기덕 감독이 한 마디 하는 게 더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더라.

그래도 성현아는 꽤 용기 있는 여배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용감한 여배우는 귀하니까.
용기는 무슨… 내가 처한 상황이 한 번도 넉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애쓰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나한테 좋았던 적이 있었나? 크게성공한 적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거 같진 않다. 계속 영화를 할 수 있다면 그게 나한테는 큰 성공인 거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유)지태가 연극 극단을 만든다던데 출연시켜 달라고 졸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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