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Age of Access)- 제레미 리프킨

책 제목인 소유의 종말은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 원제인 ‘접속의 시대’가 이 책을 대변하기에 더 적절할 것이다. 한국어판의 제목이 장밋빛 미래를 담보로 한 상술이 느껴진다면 원제는 오히려 담담하고 냉철함이 느껴진다 – 절반쯤을 읽고 있노라면 ‘드림 소사이어티’와 다를 바 없는 사회를 그리고 있는데 소유의 종말이란 가당치 않은 말이다.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접속권의 소유가 중요해지는 사회일 뿐인데 무얼 더 새로움을 말하며 무얼 더 종말을 말할 수 있겠는가. 리프킨의 말대로 개인의 삶 전체, 모든 시간이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으로 얼룩지게 될 사회에서 소유가 주는 배타적 폭력을 떨쳐내고 더 긍정적인 인간형을 생성해 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아둔하다. 그러나 리프킨의 통찰력은 옌센의 그것보다는 위이다. 나는 이 책의 절반을 넘어서고는 비로소 다가오는 사회의 근본적인 추세에 대해 수긍을 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리프킨이 접속의 시대라 명명한 사회는 이른바 정보화 사회라고 불리는 추세의 극단이다. 그가 정보, 문화, 후기 산업 등의 수식어를 두고 접속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앞의 용어들이 지니는 일반적 경향과 개인 및 사회의 운영 원리를 포괄하기에 접속이라는 용어가 더 알맞기 때문이다. 전자의 용어를 사용하는 학자들이 묘사하는 사회는 리프킨이 제시하는 사회의 일부분일 뿐인 것같이 보인다. 정보 통신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공하는 것, 유형의 제품이 아니라 무형의 문화 체험 상품,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 급부상하는 것, 산업사회의 구조와 다르게 조직되고 운영되는 것, 이 모두는 소유의 반댓말로서 접속이라는 개념에 포섭된다. 부동산은 더이상 토지가 아니라 통신망, 주파수 등 가상의 연결 통로가 되고 제품은 잠시 빌려서 사용하다가 돌려주는 임대 형식으로 바뀌어 체험의 의미가 강화되고 개인들은 끊임없이 자아를 변형시키며 가상 현실에 적응하는 사회는 접속이 지니는 존재론적 의미가 인간 생활의 중심에 놓이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더이상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된 확고한 주체로서 파악되지 않는다. 수많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그 관계망이 작동하는 과정 속의 한 부분으로서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이 일련의 현상들은 소위 탈근대의 인간형을 주조해 낸다.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쉽게 돌변하는 자아, 기의를 간직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인 기표들의 범람, 새로운 체험에 목말라하는 고갈되지 않는 욕구 속의 인간. 그러나 진정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생명성을 상실한 인간.

리프킨은 탈근대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지만 이 새로운 인간형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새로운 인간형은 가상의 공간에 머물 뿐이다. 입고 보고 먹는 것, 사랑하고 결혼하고 장례를 치르는 등 모든 구체적인 나의 생활들은 기업체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포섭된다. 그 어떠한 생활도 기업체의 서비스에 접속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시장 원리는 가장 미시적인 부분까지 파고 들어간다. 한편 거시적으로는 국가가 더이상 관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기업은 다국적화되어 세계 단위로 시장이 형성되어 전세계의 모든 지역은 하나의 생활권, 하나의 문화권으로 모아진다. 아프리카와 동남아, 라틴 아메리카의 토속 음악은 테크놀로지로 가공된 세련된 음반으로 세계 각지에서 수용된다. 이 다양한 문화의 전세계적 유통은 한편으로 진보적이지만 한편으로 위험성을 지닌다. 개인의 세세한 생활부터 한 사회의 문화까지 상품으로 포장되면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정신과 체험들은 사장된다. 시장의 동기가 끊임없이 발굴해내는 문화의 광맥은 시장의 질서가 요구하는 규격대로 변형되면서 그 구체적 생명성을 잃고 만다. 이렇게 지역문화의 소멸 가능성, 사회의 신뢰를 쌓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로서의 문화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리프킨은 심각하게 우려한다. 다가올 접속의 시대는 장밋빛 희망만 던져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은 인간 생활의 가상 현실화이다. 개인부터 집단적 문화까지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으로 되어가는 시대에서 어떻게 개인들은 사회 운영에 있어 주체적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다가올 새로운 사회에 당면한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가상적이었다. 금과 교환될 수 있는 가상의 가치로서 종이 쪽지를 사용했던 자본주의는 후에 금본위제를 폐지하면서 더욱더 그 가상성을 확고히 한다. 신기한 것은 그 가상의 가치를 가지고도 시장은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은 그 생산물과 소외됨으로써 추상적으로 되고 시장 질서 안의 인간들은 더욱더 현실에 대해 추상적으로 되어간다.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거대한 환영의 세계이다. 개인들이 소비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이다. 구체적 사물은 중요하지 않으며 언제든지 버려진다. 이렇게 모든 사물의 실체성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근대 이후의 사회는 모종의 가상에 의존하는 사회 실체를 확장해 왔다. 만일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와 착취를 철폐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면 바로 이 구체적 삶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 가상의 현실이 불가피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되어버렸으며 문제는 가상과 현실의 혼재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 끌어들이는가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전히 논의되지 않은 채 시장의 이익을 위해 변질되고 있다. 이 책에서 이같은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논의를 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이 책이 제시하는 탈근대의 인간형은 자신의 거짓된 체험 상품에 몰입한 채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외시하는 인간이다. 가상은 현실을 잊는 것으로만 사용되고 탈근대 사상가들이 말하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정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가능성으로만 사용된다.

따라서 나는 접속의 시대라 명명한 미래 사회, 또는 현재의 강력한 추세에 대해 순진한 희망을 간직하기를 거부한다. 리프킨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시대에도 전세계의 4/5에 달하는 인구는 구체적 사물을 소유하지 못해 생존을 걱정해야 하고, 가상의 네트워크 시스템은 여전히 물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며, 세계는 여전히, 더욱더 화폐라는 가상의 물질에 의해서 견고하게 운영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 여러 모로 제기되고 있는 정보화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상당 부분 가상적이며 이전 사회의 핵심인 시장 질서의 건재를 주시하지 않고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솔을 범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상업 네트워크에 대한 접속이 아니라 더 다양하고 더 구체적인 삶의 영역들이 소통할 수 있는 접속의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들이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그래서 다른 발상의 가능성을 소외시키고 논의를 가상화시키는 주범인 그들의 보편자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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