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보

감독 : 이재용
출연 : 이정재, 다치바나 미사토
(영화음악 : 조성우)

무더운 여름이라는 시간에 서울과 일본이라는 두 공간에서 우인과 아야가 살고 있다. 그 둘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과연 어떤 관계일까? 이 물음을 애써 처음부터 지고 감상이라는 달음질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지루하고 답답하거나 그 어느 것 하나 애정을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들의 여름날의 장면들을 차근차근 묘사하는 대로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된다.

우인은 부모의 살림이 그런대로 넉넉해서 떡하니 자기 집이 하나 있지만 그런 안정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다. 무감각이라는 그의 병은 왼쪽 새끼손가락의 신경이 마비돼 있다는 설정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다. 그는 즐거움도 슬픔도 느낄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놓쳐 버렸거나, 아니면 일부러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찌는 듯한 더위 아래 눌려 탈진해 버린, 수분이 다 빠져 축 늘어진 고목과도 흡사하다. 한편 무기력한 그는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아니, 이또한 스스로 의사소통이라는 선물을 던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잃어버린 매형이 혼자만의 집 안에 들어오는 것도 탐탁치 않아 하며 심지어 중국 화교들의 모임에서는 한국 땅에서 중국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노골적인 주정을 하며 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대화의 통로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대화하는 통로를 버린 대신 판타지의 영역에서 그 통로를 찾으려 한다. 그는 미아를 훔쳐보며 애를 태우면서도 정작 그녀 앞에서는 떳떳치 못하고 실제 섹스에서는 발기도 되지 않으면서도 그 결핍된 욕구를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통해 위무하려 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결핍을 판타지에서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판타지의 통로는 일방적이다. 이는 우인의 소심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만 확대해석하면 인간성이 현실 속에서는 박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더 확대해석하면 현대인의 표상으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애처롭고도 답답한 일상은 일종의 자기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아야는 죽고 싶어 한다. 그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듯 하나, 사거리 한 가운데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아야 가족의 아침은 피상적으로나마 그 이유를 시사한다. 아야 또한 대화가 끊겨 버린 가족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듯하며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할머니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그녀는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뚜렷한 물증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사거리에서의 흩어짐이나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상실은 그 상태를 제시해 주는 표식일 수는 있으나 자살 충동에 대한 서사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역부족이다. – 어쨌든 그녀는 죽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로 숨을 참아 죽을 수 있기를, 특히 자신이 태어난 날, 아니 그것이 자신의 생일인지 그 전날인지 구분하기 힘들 날짜 변경선이라는 공간 – 시간의 영역을 혼란케 하는 공간 – 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알레스카행 비행기를 타고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숨을 참고 죽기로 계획하고 경비 마련을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하는 작은 회사를 찾는다.
이전의 일자리에서 알게 된 리에라는 여자는 아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야에게서 사라진 삶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야에 삶의 전환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었지만 애써 그 연결점은 생략되고 죽음행 비행기에 그녀를 태워 버린다.

이 두 인물은 엇비슷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춘다. 다른 두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결핍적인 모습을 공유한다. 타자와의 고리에서 떨어져 나와 원자화되고 심지어 고립되어 버린 삶, 나 자신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져 버린 건조한 자아. 그러한 이유로 이 두 인물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의 인연으로 엮을 명목은 어느 정도 마련된다.

명목은 만들어졌다. 그 명목을 발판으로 그들을 엮어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을 엮어가는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인은 단지 미아와 닮은 그녀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관음적으로 훔쳐보았을 뿐이고 아야는 98년 수학여행 때 경복궁에서 우인과 같이 사진 찍었던, 인연도 아닌 우연만이 있을 뿐인데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어디선가 본 듯한 서로를 본 순간의 그 ‘필’로 그 둘은 비약적으로 엮여 버린다. 그 필이라는 것이 실제에서도 간혹 일어나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것을 필로서 인정할 수 있도록 풀어내려면 사전 준비가 탄탄했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소통과 애정,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표방하는 것이라면 그 자기 극복을 가능케 하는 동기가 충분히 개진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이 두 인물의 개별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는 일단 성공을 했던 이 영화는 – 적어도 나는 그들 일상의인 단면들을 가지고서도 충분히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었다 – 마지막 결정타에서 진을 다 빼 버린다. 무더운 여름의 시간에 지쳐 버린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향해 떠 버린 이 영화는 본 지 약 30분이 지난 지금에 허탈함을 안겨 준다.
그러나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톤은 강하게 각인된다. 우인과 아야를 장식하기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소홀했던 장면들이라 할지라도, 징후로서 기능하는 선에서는 훌륭했던 장면들 – 예컨대 우인의 마비된 손가락을 비추는 몇몇 장면이나 텅 빈 수영장을 부유하는 아야의 장면, 모니터 속의 아야를 바라보는 우인과 촬영 세트에 갖혀 있다 창 밖으로 뛰어 내리는 아야의 꿈 같은 것들 – 과 대사들, 그리고 조성우의 음악은 잡히지는 않지만 어른거리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들을 통해 나는 최근에 본 멜로영화, ‘나는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보다는 이 영화를 한 수 위로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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