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주의’ 제거만이

마을 어귀의 성당을 지나가다가, 성 프란체스코의 시에 곡을 붙인 < 평화의 기도>를 듣는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익숙한 가사로 시작되는 이 성가를 따라 부르면서,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운 이타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유장한 하모니의 합창소리가 반가운 단비가 내리는 저녁 거리를 밀도 높게 고양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자주, 그것도 대담하게, 게다가 정면으로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어느 날, 혼혈아인 한 아이는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어느 날, 촉망받던 젊은 개그맨이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자, 방송사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그를 퇴출시킨다. 어느 날, 한 외국인 노동자는 동료인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유없이 집단 폭행을 당한다. 어느 날, 입사원서를 제출했던 한 장애인은 휠체어에 기대고 있는 자신의 두 다리가 시험탈락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를 방관한다.

프란체스코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실천의 출구를 얻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각별히 요청된다. 우리들은 어른들의 파괴적인 `아동학대’에 대해 분노하지만, 그것을 `아동인권’이라는 좀더 근본적인 범주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소리를 높히지만, 외국인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 무감하다. 우리들은 여성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하지만,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멸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우리 사회에는 거시적인 것은 물론 미시적인 억압의 범주들을 해체하고,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수호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을 소명으로 삼는 많은 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실천이 현실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대중의 폭넓은 관심과 통념의 변화 역시 동반되어야 한다. 통념의 변화라니?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사회를 그 근저로부터 규정짓는 차별적인 통념이 `순종주의’에 있으며, 소수자의 인권뿐만 아니라 인간 일반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한 실천의 출발점이 `순종주의’라는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의 제거로부터 가능해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우리 사회의 순종주의는 성·계급·인종과 같은 거시적인 범주로부터, 학연·지연·혈연이라는 미시적인 범주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억압구조를 작동시키고 있다. 순종주의가 문제인 것은 강자에 의한 약자의 억압을 합리화하는 현실에서 더 나아가, 약자에 의한 또다른 약자의 억압을 당연시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가령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에 직면해 있는 일부 노동자들이, 더 강도 높은 착취에 노출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또 다른 억압과 차별의 주체로 간혹 등장하는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인종이라는 범주에서의 순종주의가 발생시키는 억압의 한 사례인 것이다. 이때, 한국사회의 순종주의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는 홉스의 싸늘한 명제를 현실화시킨다.

다시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로 돌아가자면, 나는 그의 기도가 아름답기는 하되, 더욱 근본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화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꿈꿀 권리를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동일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할 의무를 감당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꿈꾼 만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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