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라캉의 이론에서 환상이 욕망의 대상-원인인 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제논이 배제한 것이 바로 환상의 차원이다. 환상은 일반적으로 주체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시나리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일차적인 정의는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조건 위에서는 아주 적절한 것이다. 환상이 상연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즉 충분히 만족되는 장면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것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내고 무대화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근본적인 초점은 욕망이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주체의 욕망을 조정하고 그 대상을 특화시키며 그 속에서 주체가 취하는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환상의 역할인 것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되는 것은 오직 환상을 통해서다.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 핵심적인 논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유명한 공상과학 단편인 로버트 쉬클리 Robert Scheckley의 <세계들의 상점 Store of Worlds>을 살펴보자.

이 단편의 주인공인 웨인 씨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노인 톰킨스를 찾아간다. 그는 폐허가 되어 썩어가는 쓰레기만이 가득한 외딴 곳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톰킨스는 특수한 종류의 약을 써서 사람들을 그들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평행차원으로 위치이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그 사람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물건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다. 톰킨스를 만난 웨인은 그와 대화를 나눈다. 톰킨스는 자신의 거래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위치이동 경험으로부터 아주 만족한 상태로 되돌아오며, 되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웨인은 망설인다. 그러자 톰킨스는 그에게 결심하기 전에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웨인에게는 내내 그 생각 뿐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아내와 아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이내 그는 가족생활의 즐거움이라든가 사소한 문제거리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의 매일 그는 스스로 다시 톰킨스 노인을 방문할 것이며 욕망 충족의 경험을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의 주의를 흩어 놓으며 그로 하여금 방문을 연기하도록 하는 가정사가 끊이지 않는다. 우선 그는 부부동반으로 연말 파티에 가야 한다. 그러고나면 아들놈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여름 휴가 때에는 아들과 배를 타러 가기로 약속해 놓았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새로운 약속이 생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 년 내내 웨인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그가 조만간 분명히 톰킨스를 방문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갑자기 그가 톰킨스의 오두막에서 깨어날 때까지. 톰킨스는 그에게 친절하게 묻는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떤가? 만족스러운가?” 어리둥절해진 웨인은 당황해서 “아, 예.. 그럼요”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물건들(녹슨 칼, 오래된 캔, 그 밖에 몇 가지 작은 물건들)을 톰킨스에게 건내준다. 그러고는 저녁 감자 배급에 늦지 않으려고 무너져가는 폐허를 서둘러 떠난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그가 지하 은신처에 도착하자 한 떼의 쥐들이 쥐구멍에서 나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뒤덮는다.

이 이야기는 물론 핵전쟁 – 혹은 그와 유사한 사건 – 이 우리의 문명을 붕괴시킨 이후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공상과학 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측면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반드시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효과는 바로 이 함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함정 속에 욕망의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물(物) 자체’인 것을 물 자체의 지연으로 혼동하며 사실상 욕망의 실현인 것을 욕망의 추구로, 욕망 고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그것이 ‘충족되는’ 것, ‘충분히 만족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의 재생산, 욕망의 순환운동과 함께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웨인은 환각 속에서 자신의 욕망충족을 무한정 지연시킬 수 있는 상태로, 즉 욕망을 구성하는 결핍을 재생산하는 상태로 자신을 위치이동시킴으로써 욕망을 실현했던 것이다.

불안 anxiety에 대한 라캉의 개념의 특성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은 욕망의 대상-원인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핍 자체를 상실할 위험이다. 욕망의 소멸이 불안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 헛된 순환운동 속에서 대상 a는 정확히 어느 지점에 있는가? 대쉴 해밋 Dashiell Hammett(1894-1961)의 <말타의 매 Maltese Falcon>의 주인공 샘 스페이드는, 어느 날 갑자기 안정된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한 남자를 찾기 위해 고용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페이드는 그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몇 년 후 다른 도시에서 그 남자가 발견된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명으로 살면서, 건축부지에서 들보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빗맞히고 떨어지자 그 곳을 피해 달아났던 때와 거의 유사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라깡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이 들보는 그에게 세계의 부조화에 대한 표지, 즉 였다. 그의 ‘새로운’ 삶이 과거와 거의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새 출발이 헛되지 않은 것이며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대상 소문자 a의 기능을 발견한다. ‘지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해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벗어나려고 했던 것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왜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대신 우리의 평범한 운명에 만족하고, 하찮은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어디서 우리는 대상 소문자 a를 발견하는가? 대상 소문자 a는 바로 그와 같은 잉여이며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키도록 그 남자를 충동질했던 그 알 수 없는 가상 make-believe이다. ‘현실 reality’ 속에서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공허한 표면(단절 이후에도 그의 삶은 전과 똑같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 “환상에 있어서의 목표와 목적”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을…

슬라보예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발췌”에 대한 6개의 댓글

  1. 오래된 글인데 리플을 남겨도 될지? 전통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절이라는 것은 그것을 시도한 이후의 상황으로 얻는 것이 시도하기 전의 상황을 포기했을 때 오는 손해보다 커야하는데, 대상소타자a를 좇아서 하는 남자의 행동은 그렇지 않다. 그냥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며 가치가 있다. 이게 마지막 문장인 것 같습니다 ..

    • 이 글의 번역이 제대로 된 건지를 먼저 의심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이 문장으로만 재구성해 보면 대상소문자 a는 (불가능한 것, 즉) 잉여이자 단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키도록 충동질하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공허한 표면이며, 결국 단절을 지나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 반복지점에 섰을 때 비로소 이 대상소문자 a의 진실을 대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단절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이런 말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제가 꺠우치기 어려운 것은 단절을 시도하는 동인은 대상소문자 a, 내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켜 줄 그 무엇, 이것을 달성했을 때의 희열을 가정하는 것일텐데, 과연 ‘희열 이후’ 단절의 허무한 반복성을 인식한 주체라면 새로운 단절을 애써 시도하려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주체는 대상소문자 a를 욕망하는 한에서만 주체일 것이고 대상소문자 a를 ‘착각없이 받아들이는’ 주체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이 부분이 항상 고민됩니다.

  2. 제가 지젝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옮겨오신 레비아스의 글을 통해 처음 알다시피한 탓에 레비아스의 글이 지젝의 책을 읽은 후의 진중권과 디워 논란에 대한 감상일 뿐인 것 같아 할말이 없었는데, 위 글의 내용에 의하면 지젝은 재미있는 사람이 분명하군요. 읽어봐야겠어요.

    제가 파악, 이건 파악뿐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하기로는 대상소문자 a는 일종의 변수이며 그것은 욕망하는 자의 욕망의 대상의 자리인데, 칼리토 님은 욕망하지 않는 자의 욕망의 대상을 찾고 계신건 아닌가요? 아마 아닐 것 같네요.(써놓고 보니 똑같은 질문의 반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 마지막줄에서 언급된 시도할만한 가치란, 아마도 안락을 주는 일상(공허한 표면)의 가치를 말하는게 아닐지.. 욕망의 소멸이 불안을 초래한다면, 불안은 허무를 공격하기 위해 욕망의 대상을 찾고, 그렇게 보면 허무는 삶의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방안에 앉아 스스로 욕망을 채우고 허무에 머무는 사람에게 줄 욕망을 찾아야 할까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물음도 일종의 환상이고 욕망의 단서가 아닐지…

    • 어떻게 답글을 달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저도 지젝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이제는 기억나는 것도 많지 않아 정리가 잘 안 되거든요.
      제 생각에 지젝은 주체는 욕망하는 한에서만 주체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체에게서 욕망의 소멸이란 불가능한 것이겠지요.
      아마 그가 언급한 욕망의 소멸은 불가능하지만 가정으로서 어떤 상태 또는 임시적인 – 주체가 아닌 – 상태를 가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위 글로 보면 그는 욕망에 대해 오해하지 않는 어떤 상태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욕망이 욕망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주체를 욕망에 대해 오인하고 있는 주체보다 우위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그 이유는 아마도 욕망에 대한 오인은 불안을 내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불안은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어 다리에 대한 패티시즘은 다리 그 자체로 갈수록 피부, 혈관, 관절 등으로 이루어진 신체기관의 내용적으로 텅 빈 지점에 닿겠지요. 그럼 다리 패티시즘의 환상은 깨집니다. 환상이 깨짐으로써 다리-욕망이 소멸하는 것이 불안하므로 다리 패티시즘은 다리 자체로 가지 않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리 이상의 불가능한 그 무엇을 다리에 투사하(면서 다리 자체를 봉합해 버리)게 됩니다)
      욕망에 대해 오해하지 않는다면 이 불안의 무모함을, 즉 욕망충족을 위한 무한질주를 지연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없앨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주체는 애초에 없으니까).
      욕망에 대해 오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 자신의 욕망의 대상-원인(위와 같이 욕망의 대상은 종착지점-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시작지점-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씁니다), 즉 대상소문자 a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의 보호막을 걷어 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고요.
      단절이란 이처럼 대단한 무언가가 바로 앞에 놓여 있을 것만 같았던 환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돌리는 것(진짜 그것으로 돌리는 것?), 즉 주체 자신이 갖고 있던 욕망을 철회, 소멸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상징적 자살이라고 말하기도 한 것 같고요.
      그런데 단절 이후에도 주체는 새로운 욕망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절 이후의 주체도 불안의 무모함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단절을 경험하고 난 후 욕망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는(욕망을 오해하지 않는) 주체라면 다리의 텅 빈 지점을 감추려고 굳이 망사스타킹까지 입히려 들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냥 다리를 보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거죠.
      다시말해 지젝은 단절 이후 다시 획득할 욕망의 대상-원인이 그 이전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절 자체, 또는 욕망의 대상-원인에 대한 욕망의 지연, 환상의 축소(?) 또는 철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가 가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써 놓고 보니 답글이 아니라 혼잣말을 한 것 같네요. ㅡ.ㅡ;;;

  3. 칼리토님의 댓글과 함께 다시 읽어보니 제가 오해한 부분이 보입니다. ^^

    욕망과 욕망의 실현 방식을 규정해냄으로써 현실에서 환상과 가상(공허한 표면)을 구분해내고 때론 철회하게 하는 단절(이것이 일으키는 문제에도 불구하고)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단절의 동인은 그 철회의 대상이 잉여이자 공허한 표면일 뿐이라는 깨달음인 것이죠…?

    지젝에게(적어도 칼리토님에게) 직접 모국어로 이것저것 캐묻지 못하는 이상 충족 불가능하고 무분별한 의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단절을 통한 공허한 표면의 철거가 ‘지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점(정말 단순히 문제를 일으키니까?), 단절의 이전과 이후의 삶이 똑같다고 말한 이유, 불가능하다고 단정한 것들, ‘가장 순수한 대상소문자 a’를 제대로(?) 알게 된 주체라고 해도 욕망결핍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을텐데 그는 <욕망의 대상-원인에 대한 욕망의 지연, 환상의 축소(?) 또는 철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를 갖는 것 외에 욕망의 순환운동의 내부에 어떻게 개입(적어도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할 수 있는지,,, 등 몇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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