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오시이 마모루
제작 : 반다이 비쥬얼, 미디어 팩토리, 미디어 팩토리, 덴츠, 일본 헤럴드 영화
각본 : 이토 가즈노리
촬영 : 구제고시 겐젤스키
음악 : 카와이 켄지
주연 : 마우고쟈타 포렘난크, 마우고쟈타 포렘난크, 디스와후 코르스키, 이에지 그데이코

오시이 마모루라는 이름을 잡지나 TV에서나 보아 왔던 나로서는 이 ‘아바론’이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사실 작가로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나는 박제화된 지식만 가지고 있고 게으르며 빈 깡통이 요란한 그런 놈이다.

아바론은 아더왕의 전설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어릴 적 극장에서 보았고 그 이미지의 잔상만을 간직한 채 최근에 다시 보게 된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저주받은 아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죽음에 이른 아더왕이 호수의 여신들이 호위하는 배에 태워져 유유히 사라져 간 그 곳, 아더왕이 최후의 순간 다다른 섬의 이름이 아바론이라 한다. 그래서 위대한 영웅의 공간, 그곳을 아바론이라 부르며(실은 아발론이 정확한 발음이리라. Avalon이니까.) 가상 게임의 세계에서 영웅들이 잠드는 곳, 그곳을 아바론, 그리하여 이 영화가 다루는 가상의 세계를 아바론이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설정한 것이다.

몇몇 잡지 기사나  TV 프로에서 소개하며 밝혔듯이 그 현란한 디지털 화면에 현혹되어 스팩터클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보겠다면 큰 오산이리라. 현대 테크놀로지의 총아인 디지털의 스팩터클이 대부분 그 자체로 관객을 압도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데에 충실하다면 아바론의 그것은 현실보다 현실적인 가상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며 – 아니 오히려 가상보다 더 가상적인 현실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의도가 매우 다분한 화면이었다 – 눈요깃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그 화면 질감이 비현실적인 관계로 오히려 눈을 불편하게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한 만큼 영화 속 공간의 국적도 매우 모호하다. 말은 폴란드 말인데 아더왕의 전설과 9 여신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위하 찾은 도서관에서 내놓는 책들은 다 일본어로 되어 있다. 헷갈린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규정하고 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미래. 어느 지역. 인간 문명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일반인들의 끼니는 알 수 없는 개죽같은 것으로 충당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잊으려는 듯 가상 게임에 몰입한다. 아바론이라는 게임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장악하는 게임 같으며 게임 안에서의 레벨과 스코어 등은 실제 화폐와 같이 유통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게임이 일상생활이자 생계 수단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 중 애슈라는 이름의 여자는 우리나라 게임계에서 흔히들 ‘길드’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인 파티를 이루어 게임을 진행해 가는 이들과 달리 개인 행동을 하는 ‘파이터’로서 대단한 고수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해 있었던 위저드 파티가 어느 순간 해체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중 한 멤버였던 머피의 로스트(게임에서 길을 잃고 영혼이 귀환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듯함)를 일종의 짐이자 의문으로 안고 있다.
그 의문을 풀고자 애슈는 아바론의 최고 경지인 클래스 SA(Special A)에 도전하고 그곳의 관문인 고스트를 잡아내고 만다. 그리고 다다른 클래스 SA, 일명 리얼 클래스. 여기서 화면은 이전의 조작된 화질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실제같은 질감의 공간이 나타난다. 무슨 의미일까. 리얼 클래스에서 그리는 가상 공간을 더욱 현실감 있게 그리려 했던 의도는. 우선 영화 속 인물들이 바라는 세계가 리얼 클래스라는 가상 공간의 세계와 닮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현실과 가상의 느낌을 뒤바꿔 놓음으로써 이 영화 속에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지으려 들지 말라는 마모루의 당부도 숨어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발견한 머피의 말과 같이 황폐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더럽게 살기보다 현실에서는 식물인간일지언정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 던져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현실이라 추정되는 세계의 모습은 황폐하고 비루하게 묘사된다. 그 먹기조차 거북하게 보이는 음식들은 물론이며 애슈에게 접근한 옛 위저드 파티의 동료가 간만에 먹는 ‘진짜’ 계란 후라이, 햄 등을 우걱우걱 먹어대는 것이나…심지어 마모루는 개를 중간중간 등장시켜 인간의 삶을 개와 병치시키고는 한다. 개에게 ‘진짜’ 음식을 먹이면서까지. 이런!

애슈는 자신의 짐이었던 머피의 무사귀환을 목적으로,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사명을 짊어지고 리얼 클래스에 도전했겠지만 리얼 클래스 속의 머피와 맞닥뜨리는 순간 더욱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렵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현실인가 가상인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는 듯도 하다. 이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리 친절한 내러티브를 가지지도 그리 흥미로운 사건을 준비하지도 않은 이 영화를 현란한 스팩터클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려든 이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후덥지근했으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 역시 현란한 스팩터클에 일정 정도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모 영화 잡지에 실린 정성일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것과 같이 요즘 주목받는 아시아 영화의 일종의 연대된 듯한 주제의식이 ‘그래도 살아라’라는 전언은 이 영화에도 정확하게 꽂히는 것이었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추악한 현실이든 간에 그대는 그 속에서 ‘존재’하라. 그 공간을 벗어던지고 부재하기보다는 존재하라. 그 땅 위에 발딛고 서라. 버티고 극복하라. 뭐 그런 말이 이 영화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참아내며 보았을까 하는 일종의 경이감마저 든다. 나같이 깃털처럼 가벼운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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