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감독 : 홍상수
출연 : 이은주, 정보석, 문성근

세상의 연애라는 것이 다 이런 것이라면 참 연애라는 것은 못할 짓인지도 모른다. 영화속에 등장하는 수정과 재훈은 서로가 스스로를 속이면서 가식을 더하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도 만들면서 억지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하는 것 같아 연애가 참 힘들고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으로만 찍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찍었을까…영화를 보다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듯 하다. 내 짐작이건대,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완벽한 진실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수정(이은주)과 재훈(정보석)의 기억 속에 자기 나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건들일 것이다. 그건 이 영화가 같은 사건들을 가지고 여러번 반복하며 약간씩의 변화를 주고 새롭게 이야기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 이 영화의 내용은 영화 속에서조차 ‘사실’로서의 사건이 아니고 ‘기억’으로서의 추측일 것이다. 천연색, 칼라는 마치 보고 있는 영상이 실재하는 것인양 하는 입체안경 같은 것이고 그 입체안경을 벗어 놓고 보아야 기억 같은 아련함과 긴가민가 하는 아리송함이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홍상수 감독의 배려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영화는 초반에는 재훈과 수정, 그리고 영수라는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야릇한 삼각관계 같은 모습을 띄는 것 같다. 그런데 뒤에서 더해지는 정보들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다. 재훈은 돈많은 미술가라는 사실이 뒤늦게 관객에게 알려지고 그 후부터는 재훈이 수정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정이 재훈을 타겟으로 정하고 적당히 애타게 만들면서 자기를 확 움켜쥐게 의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수정은 초반부에 보여준 것처럼 그리 순결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여자였다. 오빠의 부탁에 수음까지 대신해 주는 엽기적인 장면이나 영수와 편집 중에 나누는 성에 대한 이야기는 수정이 ‘처음이에요’라는 말로 섹스를 피하려는 모습이 한낱 내숭처럼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재훈이 순정파의 남자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알고보니 친구집에 술마시러 왔을 때 영수의 술주정을 수정이 받고 있을 때 재훈은 옆방에서 다른 여자와 열렬한 키스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수정과의 애정행위 중에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르기까지 한다.
영수는 어떤가. 영수도 알고보니 케이블 TV 사장 조카라는 이유로 근근히 회사에서 PD 노릇하는 무능력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 영화 속 인물은 위선의 가면을 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들에게서 연애라는 것도 그 배후에는 또다른 음모나 음흉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

내 생각에 수정이 재훈을 타겟으로 삼은 데에는 돈이 중요한 요인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재훈은 어리숙하게 보이는 돈많은 남자였으니 그 배경을 알아버린 영수보다는 더 낳은 남편감이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돈에 의해 자신의 순결과 처녀막을 던져준 것 같다. 그리고 이 처녀막에 재훈은 감격하고 자신의 모든 단점을 목숨을 걸고 고칠 것을 맹세한다. 재훈은 자신이 만난 그 어떠한 여자들보다도 순결하고 매력적인 여자라고 생각하는 수정에게 흑심을 품었고 그렇게 처녀막의 증명을 통해 수정과 모든 험난한 앞날을 극복해 나갈 것을 맹세하며 일체감을 느낀다.

정말이지 우리네 삶은 위선과 결별할 수 없나. 홍상수 감독은 어차피 인간은 위선적이야…라는 조소를 끊임없이 내뱉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게 짧아서 다른 구구절절한 이야기 꺼리는 떠올릴 수 없지만 대충이라도 보았던 두 개의 전작품과 이 영화를 보면 계속 그러한 것이 떠오른다. 어찌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경멸의 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속내를 까발리고는 ‘자, 속이 이렇게 까맣지 않느냐’며 인간을 비웃는 것 같다.
그러니 내 속내를 들어다보며 ‘아, 나도 그런데…이 사람 나한테 욕하는 거 아니냐’며 나는 내내 불편해 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지내온 내 날들을 반성해 봄직하다.

연애란 저렇게 내숭 떨고 조목조목 따지면서 숨기고 보여주고 하면 피곤하고 기만하는 찝찝한 마음이 들어 못할 것 같다. 적어도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라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고 진실되게 그 사람만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교과서적인 연애론을 아직도 믿고 있는 나이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연애를 해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도 재훈과 수정 꼴이 나겠지?

홍상수 감독 홈페이지(홍상수 감독이 만든 것은 아님)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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