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유사와 상사-

실패한 칼리그람

“칼리그람은 우리의 알파벳 문명의 가장 오래된 대립들, 그러니까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그리기와 말하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모방하기와 의미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들을 놀이로 지워버리려고 든다. (…) 자기가 말하는 것을 이중으로 몰아가면서, 칼리그람은 가장 완벽한 덫을 설치한다. 이중의 통로에 의해서, 그것은 말이나 그림만으로는 불가능한 포획을 확실하게 성공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공간 속에서 서체가 부릴 수 있는 꾀들을 통해 말들에 그들이 지시하는 대상의 모습을 또렷하게 부여함으로써, 본래 말들이 결코 이길 수가 없는 그 완강한 부재를 쫓아낸다.” (S.35)

‘칼리그람’은 ‘현전의 형이상학’의 은유다. 중세에 사물과 기호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의 차원에 속했다. 그 시절 사물은 기호였고, 사물은 기호였다. 하지만 근대의 철학은 세계를 현실의 세계와 표상의 세계로 이중화한다. 이때부터 철학은 현실과 표상, 원본과 모상을 일치시킬 과제를 갖게 된다. ‘칼리그람’은 사물의 세계와 기호의 세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눈앞에서 합류하는 것을 보는 생생한 현전의 체험이다. 하지만…

“우리를 낭패시키는 것, 그것은,  텍스트를 그림과 관련시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단언이 사실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모순된다거나 등등을 말할 수 있도록 해줄 바탕을 결정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내 생각으로는 하나의 칼리그람이 만들어졌다가 해체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칼리그람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과 그 실패가 남긴 아이러니컬한 잔해들이다.” (S.33)

마그리트에게서 칼리그램은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말은 사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물은 말로 명명되지 못한다. 이는 곧 현전의 실패, 재현의 실패, 지시의 실패를 의미한다. 언젠가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듯이, 바벨의 언어로 현전의 체험, 아담의 언어의 체험에 도달하려는 근대철학의 형이상학적 열망 역시 결국은 좌초하고 만다. 바로 이 철학적 사건을 현대예술에서는 대상성과 재현성의 포기로써 예고한다.

클레, 칸딘스키, 마그리트

“내 생각으로는 두 개의 원칙이 15세기 이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그림을 지배해 왔다. 첫 번 째 원칙은 조형적 재현(유사를 함축한다)과 언어적 지시(유사를 배제한다) 사이의 분리를 단언한다. 우리는 유사를 통해 보며 차이를 통해 말한다. 그래서 구 개의 체계는 교차하거나 용해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종속이 있어야 한다. 텍스트가 이미지에 의해 규제되거나 (책이나 비명, 문자, 한 인물의 이름이 재현되어 있는 화폭들에서처럼) 혹은 미지가 텍스트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그림이란 오직 좀 더 지름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듯, 말로 재현해야 할 것을 그림으로 마무리하는 책에서처럼). (…) 본질적인 것은 언어기호와 시각적 재현이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의 질서가 형태에서 담론으로 혹은 담론에서 형태로 가면서 그것들을 위계화한다.” (S.51-52)

클레는 그림과 기호를 동일한 공간에 병존시킴으로써, 사물과 기호의 근대적 이분법을 폐기한다. 중세에는 기호와 사물이 하나의 존재론적 공간에 존재했다. 근대의 환영주의 회화의 등장과 함께 사물과 기호는 이제 각각 다른 존재론적 공간에 위치하고, 양자 사이에는 ‘회화적 재현을 통한 지시’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오랫동안 회화를 지배해 온 둘째 원칙은 유사하다는 사실과 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의 등가성을 제시한다. 하나의 형상이 어떤 것(혹은 어떤 다른 형상)과 닮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게, 회화의 게임 속으로 <당신이 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분명한, 진부한, 수천 번 되풀이된 그러나 거의 언제나 말이 없는 언표가 끼어 들어온다. 여기에서도 어느 방향에서 재현관계가 제기되었는지, 다시 말해, 회화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귀속되는지, 아니면 회화가 스스로 그와 닮은 비슷한 것을 창조하는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S.54)

칸딘스키의 작품은 재현을 통한 지시 관계를 파괴한다. 이제 회화는 기호로서의 잃고 자기지시적인 사물, “동일자의 예술”로 변화한다. 이제 회화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현시(presentation)으로서의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현대 회화는 파울 클레의 표현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파울 클레와 칸딘스키에게서 근대 환영주의 예술을 지탱해주던 두 개의 원리는 파괴된다. 클레는 말과 그림을 위계질서 없이 하나의 질서 속에 배치함으로써 양자가 지시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봉쇄하고, 칸딘스키의 작품은 “유사”, 즉 현실의 재현이기를 포기하고,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예술의 본질로 여겨져온 ‘재인식’, 즉 ‘확언’의 기능을 파괴한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속에는 아직 3차원의 환영이 존재하고, 재인식이 가능한 대상성도 들어있다. 게다가 그 대상성은 교과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할 정도로 자연주의적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칼리그람을 통해 말과 사물의 만남을 방해하고, 이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는 더 급진적으로 대상성과 공간의 환영을 파괴한다. 철학적으로 이는 현전의 불가능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과 같다.

유사와 상사

“내가 보기에 마그리트는 유사(ressemblance)와 상사(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유사’에게는 주인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반복에 쓰이며, 반복은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전범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전범을 다시 이끌고 가 안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시물라크르를 순환시킨다.”(S.72-73)

마그리트에게서 현전은 파괴된다. 이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의 동일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유사성은 한갓 상사성으로, 원본이 없는 복제, 원본과의 일치를 요구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로 전락한다. 의미는 탈동일화한다. 의미는 소쉬르가 말하듯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동일시, 즉 현전이 아니라, 시물라크르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의 놀이 속에서 구성된다.

“이 전사술 덕분에 우리는 유사에 대한 상사의 우위를 알게 되었다. 유사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재인식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어 못 보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유사는 유일한, 언제나 똑같은 단언을 내포한다. ‘이것, 그것, 또 저것. 그것은 저것이다.’ 상사는 함께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겹치는 상이한 단언들을 (여러 겹으로) 배가시킨다.”(S.76)

이 차이의 놀이를 통해 의미는 열려진다. 그리고 한번 열려진 의미는 이제 생산적,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서로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포개짐으로써 단언의 의미를 다변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세계의 질서가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을 우리에게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캠벨, 캠벨, 캠벨.” (S.89)

김현의 독해 비판

15세기 이후의 서양의 환영주의 회화의 두 원리에 대한 푸코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곰브리치가 말하는 ‘아는 대로’와 ‘보이는 대로’의 대립은 15세기 환영주의 회화의 원리가 아니라 미술사 전체에 적용되는 개념. 추상의 수준을 달리하기에 경쟁개념이 될 수 없다. ‘아는 대로’와 ‘보이는 대로’는 서로를 배제하는 개념쌍이지만, 푸코가 말하는 두 개의 원리는 서로 배제하는 게 아니라 상보적이다.

김현의 글에는 정작 푸코가 말하려는 바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유사성과 상사성의 대립이 의미하는 푸코의 언어철학적 전제를 그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푸코의 책에서 지적하는 것은 현대회화에서 대상성의 파괴와 근대적 현전의 형이상학의 파괴 사이에 존재하는 homologie이다. 아울러 대상성과 재현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푸코의 초현실주의 속에서 실은 대상성과 재현성의 파괴가 가장 급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이다. 책의 주제를 이루는 이 부분이 그의 평론 속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벨라스케즈와 마그리트를 연결시키는 논리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 ‘주체 없는 표상’은 17세기 합리주의의 표상론의 엠블렘으로, 탈근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첫째, 고전주의자들의 ‘표상론’은 18세기에 인간학주의적 전도가 이루어진 후의 표상론과는 달리 주관적 관념론이 아닌 객관적 관념론의 형태를 띤다.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표상론은 어디까지나 근대의 형이상학 테두리 내에 있는 반면, 마그리트는 이 ‘표상’ 자체를 파괴한다. 둘째, 푸코의 마그리트론 역시 ‘주체의 죽음’이라는 주제와 그다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체의 소멸이라는 주제로 벨라스케즈와 마그리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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