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살고 있는 지인 한명이 얼마 전 한국을 다녀 가면서 남긴 말이 여전히 필자의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한다. 그이는 “웬만하면 이제, 한국을 다니러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너무나 숨이 막혔다고 그는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너무나 ‘막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금의 품위라곤 찾아 볼 수 없이, 그저 생존에만 급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이 다시 이땅에 돌아 올 수 있을까를 염려했다고 한다. 국내의 또 다른 친구 한명도 그 엇비슷한 얘기를 필자에게 전했다. 얼마 전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조카 두명이 우리나라에를 왔는데, 시내를 다닐 때마다 아이들은 ‘도무지 즐길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황량하고 이상한 도시’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하루 빨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외국으로 돌아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풍요로운 외국의 삶과 비교해서 우리의 처지를 지나치게 비루한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겠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그같은 외부의 시선은 반대로, 우리가 그만큼의 가혹한 생존 조건을 나름대로 잘 버텨 온 얘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들이 지적했던 것이 단순히 물질적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 혹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얘기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에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김창완씨와 두개의 방송 프로그램을 같이 한다. 하나는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인데 둘이서 같이 진행하고 있고, 또 하나는 그가 매일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한번씩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그는 요즘 방송계에서 알게 모르게 엄청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 앞서 얘기한 두개의 프로그램말고도 또 다른 공중파 방송의 주간 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진행하고 있고 심지어 일일 어린이 드라마에도 출연중이다. 간간히 뮤지컬도 하고, 얼마 전에는 동요집이긴 하지만 새 음반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또, 그 와중에 개인 콘서트까지 열기도 했다. 더 열거할 것이 남아 있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가히 슈퍼 맨 수준이다. 도데체 이 많은 일들을 그는 어떻게 다 해내고 있는 것일까?

콘서트장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머리는 완전히 ‘번개 머리’ 스타일로 꾸몄는데, 콘서트 제목이 아무리 ‘록 글라디에이터’라고 한들, 그래서 자신을 검투사로 변신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들, 이건 좀 ‘심하다’하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에고, 머리가 워낙 흉해서..”를 연발해 좌중을 웃겼다. 머리 모양이 어떻든, 그는 이날 콘서트 무대에서 매력적인 멘트를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다. “후배들하고 이런 얘기를 종종 해요. 내가 이젠 록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잖니? 그건 나도 잘 아는데, 그렇다고 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잖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그러니까 죽기에 아까워서라도 록을 해야 돼,라고 말이죠”. 또 이런 말도 있다. “콘서트 제목에 왜 글라디에이터란 말을 넣은 줄 아세요. 공연을 할 때마다 늘 느끼는 건데요, 무대밖에서 공연이 시작될 때를 기다릴 때면 꼭 콜로세움에 끌려 들어가기 전의 검투사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 안에는 무시무시한 사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참 무섭고, 외롭고 그렇지요.” 등등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참 말의 성찬을 즐길 줄 아는 사람같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필자는 세상사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맞는 말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지나 온 과정들이 너무 아까우니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즘에 와서 특히,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혹은 그런 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급 영화보다 < 오! 그레이스>같은 ‘작은’ 영국 영화들에게 더욱 마음이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요즘의 영국 영화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삶의 피곤함과 또 이를 이겨낼 줄 아는 공동선의 지혜가 담겨 있다. 남편이 자신에게 남겨 준 것이라곤, 엄청난 빚밖에 없는 여주인공 그레이스의 한심한 현실은 지금의 우리 현실을 닮아 있다. 정치는 저자 거리의 아우성과 다를 바가 없고 꽤나 잘난 체 해온 일부 언론은 알고 보니 그동안 세금 떼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주노총의 위원장은 5공때나 6공때나, 문민정부 시절이나 지금의 국민의 정부 시절이나 쫓겨 다니기는 매한가지다. 비가 안오면 안 와서 난리다가 조금만 비가 내려도 이번엔 너무 많이 와서 힘겹다고 한다. 그 와중에 우리들 호주머니에는 찬바람만 쌩쌩 분다. 영화속 그레이스마냥, 남들 몰래 대마초라도 재배해 돈도 벌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위선투성이의 구겨진 세상을 통렬하게 꾸짖고 싶지만 그건 그냥 영화로만 만족해 할 얘기다. 우리들 주변에서는 그레이스마냥 그녀를 이해해 줄 착한 청년 매튜나 그의 애인, 혹은 그녀의 비리를 모르는 척 눈감아 줄 마을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희망과 삶의 끈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다고 필자는 믿는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아침 7시부터 나와 일을 찾아 나서는 후배들이 있고, 방학이 되도 학교에 나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특강을 듣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비록 세상의 비루한 때를 덕지덕지 묻히고 살아가고 있다 한들,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다음 세대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라고.

2001.06.25 /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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