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영님 홈페이지에서 펌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모두가 조폭 영웅주의와 맹목적인 의리, 폭력의 계몽주의라고 할 만한 뒤틀린 권선징악, 칼부림과 난투극의 잔인무도한 가벼움의 웃음, 그들이 절에서, 가정에서, 고등학교에서, 사회 곳곳에서 우리에게 삶의 깨우침을 안겨주려고 몸부림친다. 강우석은 이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그의 영화「공공의 적」의 주인공은 경찰이다. 그러나 나쁜 놈과 싸우려면 나쁜 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쁜 경찰이 나쁜 부자와 치고 받으면서 법도 질서도 없이 싸운다. 선과 악은 이미 그 경계를 서로 넘나든 지 오래이다.
한 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이 영화는 강우석의 최고걸작이고, (미안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작가영화이다. 어쩌면 (그 자신이 10년 전에 만들었던)「투 캅스」의 하드보일드판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에는 강우석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근심스러운 선과 악의 비대칭에 관한 잘못된 유혹이 담겨 있다.


선과 악의 비대칭에 대한 잘못된 유혹

마치 이동통신 바보광고를 흉내내는 듯한 말투로 강력반 강철중 형사(설경구)는 자기를 소개한다. 아시안게임·올림픽 권투 금메달리스트였던 강철중은 이제 몸매도 형편 없이 불어난 채 뇌물과 치사한 등쳐먹기에 몰두하고 있는 무능력한 형사이다. 아내와는 사별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노모한테 구박받으면서도 장독에 숨겨놓은 ‘삥땅친’ 마약을 어떻게 처리할지만 관심거리일 만큼 한심한 ‘민중의 지팡이’이다.

펀드매니저인 조규환(이성재)은 투자고객을 위해서라면 남을 파산시키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착한 남편이며 아버지이다. 하지만 그는 지는건 못 참는다. 심지어 자기 차에 부딪힌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사과하지 않는다고 길거리에서 망신을 당하자 기어이 찾아가 한밤중에 벽돌로 내려칠 만큼 집요하다. 그는 ‘실업자 천만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야지’를 거듭 다짐하면서 약육강식에서 승자의 자리를 결코 놓칠 사람이 아니다.

그 둘이 마주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장대비가 밤새 내리던 여름날, 강철중 형사는 잠복근무 도중 뒤가 급해서 한밤중에 비를 맞으며 전봇대 아래에서 큰일을 보던 중이었다. 조규환은 일주일이면 열 배가 되어 돌아올 펀드 투자액 18억 원을 고아원을 위해 써야 하니 주말까지 돌려달라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에 분개하여 부모를 몰살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칼부림으로 스쳐 지나간다. 강철중은 이를 악물고 다짐한다. “내가 착한 경찰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를 죽이고 돈 챙기는 놈은 세상에서 같이 살면 안 된다. 니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않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놈들하고 세상에서 같이 숨을 쉬는 것은 정말 역겨운 일이다. 누구라도 비분강개하여 강철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면서 조규환 같은 인간을 끝장내야 한다고 동의할 것이다. 강우석은 시종일관 한눈 팔지도 않고 사건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달려든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범죄 에피소드들이 있는데도(잠복근무 중에 생수를 사먹는 동네 슈퍼마켓의 아줌마를 제외하고) 단 한 명의 여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멜로드라마는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 놈을 때려잡는 일만 남았다. 아, 결국 세상은 다시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우리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이상하다. 우리는 대립의 도식을 정확히 세워야 한다. 선과 악은 결코 대칭적인 대상이 아니다. 인간 존재가 선하다면 왜 인간과 악이 대립하는 곳이 아니라, 선과 악이 대립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본 사람은 칸트이다.「공공의 적」은 잘 정리된 대립처럼 보인다. 경찰과 살인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와 모든 것을 가진 자, 그런데도 가진 자는 더 갖고 싶어한다.
게다가 놈은 부모를 돈 때문에 살해한 패륜아이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차를 가로막고, 뷔페에서 실수로 자기 와이셔츠에 음식을 흘렸다고 상대를 불문하고 사정없이 죽인다. 대상을 용서할 수 없는 악인으로 몰고가기 위해서 점점 더 조규환은 정신병리학적으로 기괴한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이제 괴물을 물리쳐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강철중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강철중,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여기서 강철중도 부패한 경찰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이상한 것은 조규환은 원인이 있는 악의 대상인데, 강철중은 원인이 없는 선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비 오는 날 ‘씨발, 재수 없게 똥싸는 데 엎어지는 바람에 손에 똥묻은 김에 개인적인 원한’으로 조규환을 악착같이 만사 제치고 뒤쫓는다.

우리 사회에 대한 두 개의 혐오
그게 당신은 우스운가? 나는 소름이 끼친다. 그 밑바닥에는 결국 강철중도 조규환과 같은 인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진실의 증후가 깔려 있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여기에는 사악한 순환의 술래잡기가 존재한다. 그것이 술래잡기가 된 가장 은밀한 이유는 그 술래들이 왜 자기가 술래가 되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규환이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된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며(그는 펀드에 성공하지 않아도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강철중이 그렇게 망가진 형사가 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는 오직 인물의 전형성만이 두 주인공을 지배한다. 부자는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으며, 형사는 타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두 주인공이 영화에 등장할 때 그들은 이미 망가진 다음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우리 사회에 대한 두 개의 혐오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 하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천민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등쳐먹는 국가 관료제도의 억압에 대한 자포자기이다. 얼핏 보기에 대조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사실은 매우 비대칭적인 관계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형사로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며 그의 ‘숨은’ 공권력을 과시하는 강철중 형사의 비리현장은 세세히 밝혀지고 있지만, 정작 괴물 같은 조규환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왔으며,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에 대해서 이 영화는 함구무언이다. 정반대로 조규환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과 집안이 세세히 담기는 반면, 강철중의 가정은 그의 장독대 말고는 나온 적이 없으며, 그는 엄마 없이 자라는 두 아이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아버지로서 걱정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부의 사적 축적과 국가권력의 공공성이라는 대조가 그들의 개인적인 묘사에서조차 선명하게 그 끔찍한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그 둘은 서로 빈여백을 채워준다. 그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습의 모순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영화는 그 둘이 평화롭게 공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의 비극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에 마주친다. 누가 나쁜 선택이며, 누가 더 나쁜 선택인가? 강철중과 조규환이 마주치는 순간, 미끄러지듯 엎어지면서 똥을 밟은 것은 사실은 우리들이다. 우리는 ‘똥 밟은’ 기분으로 그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비겁한 침묵의 결사공동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순간 결정을 미루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어보아야 한다. 왜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지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웃으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똥 밟은’ 강철중을 선택한다. 여기서 이미 결판이 난 것이다. 강우석(과 우리들)은 조규환을 버리고, 강철중을 선택한다. 같은 말이지만 천민 자본주의를 버리고, 야비한 국가권력을 선택한다. 차라리 뇌물을 적당히 주고, 적당히 타협을 하고, 교통법규에 걸리면 1만 원을 찔러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편이 부자들의 약육강식을 보는 것보다 나은 세상이라는 믿음이 이 영화의 결론이다. 우리는 천민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타협한 관료제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정답은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부림을 하는 자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모든 부자들은 부자들의 적이며, 모든 관료들은 (카프카의) 그레고르이다. 감추어진 범죄의 원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우리들의 무능한 시선은 사소한 일에만 분노한다.

「공공의 적」은 세상은 단순명쾌한 이분법으로 단칼에 보여준다. 대중들은 그러하기를 바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바로 이 복잡한 구조의 범죄에 얽혀 있으며, 자신이 불행한 피해자이자 동시에 은밀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의미심장하게도) 악덕 사채업자와 맞서 싸우는 강철중은 전기톱을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든다. 그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는 강철중의 커다란 얼굴에 비명을 집어삼키며 영화관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 비명을 지르면 당신이 범행을 자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웃음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총총걸음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는 비겁한 침묵의 결사공동체이다. 세상의 위태로운 조화는 그 침묵의 변기통 위에 놓여진 줄 위에서 곡예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선택한다는 것은 ‘똥 밟은’ 것이다. 하여튼 밟아야 한다. 결국 밟은 것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게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올해 첫 번째 한국영화로부터 보내온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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