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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청춘을 불사른 반란의 불꽃


68년 유럽을 뒤흔든 젊은이들의 혁명 열기… 씁쓸한 패배로 끝난 반권위주의 몸부림


(사진/‘반권위주의’에 대한 공감이 68년 유럽의 학생들을 반란의 광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사회적 행동주의에 냉소를 퍼붓는 분위기이지만, 68년 유럽에서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힘을 합쳐 사회를 한번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던 사람들이 있었다. 엉뚱하게도 그 꿈의 주체는 자본주의하에서 착취를 당한다는 노동자계급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후의 경제붐 시대에 태어나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대량소비시대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대체 왜 이들이 혁명의 주체로 나섰던 것일까? 갑자기 다가온 혁명의 파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급진적 혁명의 요구는 오직 제국주의적 침략과 착취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일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럽의 길거리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체, 체”라고 외치는 게바라의 티셔츠가 걸어다녔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답답한 세상, 버릇없이 살고 싶었다

원래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64년부터 미국의 학생들은 마틴 루터 킹의 흑인운동과 연대를 표명하고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격렬한 정치적 운동, 잘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탈주하려는 히피문화와 같은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이 운동이 70년까지 비교적 조용하게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미국에서 불어온 이 새로운 바람이 유럽에서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유럽의 전후사를 나눌 정도로 요란한 운동을 낳았다. 이 운동은 짧고 격렬했다. 독일에서는 길어야 1년이었고 프랑스에서 이 운동의 생명은 고작 한달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에 학생들은 학교를 점령하고, 공동체를 결성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수십만의 인파를 모을 수가 있었다.

(사진/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앙시앵 레짐’까지 걷어내지는 못했다)


대체 왜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독일의 경우 이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된 것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이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에서도 그 운동을 이론적으로 대변할 법한 푸코 같은 사람조차 시위현장의 밖에 머물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졌던 68의 아이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현란한 이론이나 그들이 표방한 요란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반권위주의라는 문화적 특징일 게다. 언젠가 아르테라는 방송에서 내보낸 68특집에서 이제는 중년이 된 당시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버릇없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구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문화혁명, 그러니까 급속한 경제성장기를 거쳐 바야흐로 ‘보수적으로 철저하게 관리되는’ 안정기로 이행하던 시기의 답답한 사회에 숨통을 트려는 마지막 생명의 몸부림이었을 게다.


학생들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원했다. 그들은 당시에 지구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던 또 하나의 대중 반란, 즉 마오의 문화혁명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이 원하던 민주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민의를 왜곡하는 구세대의 부르주아적 대의체제를 대체할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물론 이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독일 학생들은 기성세대에게 이러저러한 요구를 내세웠다. 민주적 대학개혁, 비상조처법 도입 반대, 극우파의 의회진출 저지, 미디어 무굴제국의 여론조작에 대한 반대, 그리고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 및 종전. 극우파의 의회진출을 저지한 것 하나를 빼면 이 요구들 중 어느 하나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68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꺼져가는 불꽃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짧게 퍼득이던 반란은 곧 사그라진다. 시위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해산되고, 운동의 지도자 두치케는 우익에 암살당하고, 한 때 반란의 열기에 도취했던 배우들은 운동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하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어 다시 보수의 역공이 시작되고, 살아남은 자들 중의 일부는 민족공동체주의를 설파하는 우익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 실패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집요한 극성파들은 좌익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고, 이들이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그 잔인한 납치극과 처형극은 물러가는 68의 이미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68년 봄은 더이상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 된다. 그리고 떠들썩한 주연 뒤에는 언제나 취중에 했던 언행에 대한 부끄러움이 따라다니는 법.


68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그것도 완벽히 패배한 운동이다. 하지만 원래 운동은 패배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잔인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68의 반란은 거기에 참여했던 대중의 머리 속에는 황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체제에 반란을 하는 것처럼 완벽한 해방의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세대가 앞으로 또 그런 경험을 하겠는가? 68은 실패했으나 사람들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거리에서 외치던 이상은 현실 속에 ‘무의식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효과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 하숙집 방에서 만나는 연인이 주인 아줌마에게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방문을 열어놓을 필요가 없게 된 것도 68 이후다. 학교에서 사제관계를 규정하던 권위주의가 무너진 것도 68 이후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오늘의 정치에는 분명히 그 반란의 경험이 각인되어 있다. 사민·녹색 정권의 수장인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요슈카 피셔도 68년 봄에는 청바지를 입고 길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광란을 바라고 있는가

68세대의 반란을 우리는 386이라는 이름으로 체험했다. 우리의 저항은 체포와 강집, 투옥과 고문, 학살과 변사로 얼룩졌다. 그러하기에 확립된 복지제도와 비교적 확립된 대의민주주의를 가졌던 선진국에서 일어난 아이들의 반란이 우리 눈에는 그저 배부른 애들의 투정으로만 보인다. 우리세대는 그들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 우리는 바스티유를 무너뜨렸다. 87년 거리에 나갔던 어느 후배는 그때의 경험이 “황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네티즌의 말대로 “바스티유는 무너졌으나 앙시앵 레짐은 남아 있다.” 정확하게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앙시앵 레짐과 싸웠던 68의 반란은 아직 우리에게 다가와야할 미래의 축제로 남는다.


우리의 운동이 패배로 끝났듯이 그 축제 역시 패배로 끝날 것이며 또 패배로 끝나야 한다. 이 답답한 시대에 그 반란은 언제 시작될 것인가? 낡은 우리 세대가 신세대와 연대하여 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독일에서도 68세대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체험을 한 ‘89세대’를 연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신세대의 그것에 비해 우리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집단주의적이다. 68세대가 가졌던 그 철저한 반권위주의, 래디컬한 평등의식이 우리에게는 없다.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려면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적을 닮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저 실패한 그 혁명의 효과를 조용히 자기 삶의 주위에 퍼뜨리면 된다. 우리 역시 잠시 후면 사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오를 것이다.


흉물스럽게 남은 앙시앵 레짐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신세대의 일이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과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서울대에 처음으로 비운동권 학생들이 학생회장에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학생회라는 또 하나의 앙시앵 레짐에 대한 반란인지도 모른다. “×같은 세상, ×같이 살자.”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는 진보적인 면까지 있다. 하지만 나를 씁쓸하게 하는 것은 이 ‘광란’이 실제로는 가짜 광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말 광란이 되기에 그것은 너무나 안 위험하다. 유세장에서 춤추고 어쩌고 하는 유치한 짓은 제발 중·고등학교와 함께 졸업하고, 이제 정말로 위험한, 정말 막가는 진짜 반란을 일으켜 보라. 그렇게는 못 하겠지?


진중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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