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지운
출연 : 신하균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 3인3색이라는 제명으로 아시아 3인의 감독이 나름의 디지털 영화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그에 못지 않은 걸출한 감독들의 또다른 디지털 3인3색이 시도되었다. 씨네21을 뒤적거릴 때마다 큼지막하게 광고를 실어놓던 이 영화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넘겨 버리다가 이번에 혹하는 마음에 보았다. 사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데다 컴퓨터 실시간으로 화면도 작으니 감상하는 맛은 떨어지겠지만, 또 나름의 재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 아무래도 공짜라는 점이 주요하다 – 훌쩍 봐 버렸다.

김지운 감독의 커밍아웃. 분명 이건 동성애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그 예상대로 차곡차곡 진행된다. 한 사람이 자기 누나에 대해 한 사람과 인터뷰 형식으로 대화를 하는데, 대충 누나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녹화해 놓은 테입을 보아도 안 믿겨진다 그런 얘기였다. 그러다 인터뷰하던 사람이 자료 화면을 보자고 한다. 그러고는 인터뷰하던 사람이 외친다. ‘페이드 아웃!’

누나일 것으로 짐작되는 여자가 차분하고 비장하게 앉아있고 무언가를 폭로할 듯하다. 캠코더로 찍던 화면은 다시 재연화면으로 바뀐다. 이제부터는 극중극이다. 누나는 밥 먹으로 내려오다 말고 캠코더 가지고 오라고, 고백할 게 있다고 한다. 동생은(신하균 역) 또 뭔가 하면서 카메라를 가지고 오고, 누나는 소파에 침착히 앉는다.

누나는 말한다. ‘먼저 저를 키워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 하고 싶습니다. ……주절주절……지금 여러분에게 밝히고 외국으로 가려 합니다…주절…사실, 저는……흡혈귀입니다.’

이쯤 되면 동생이나 동생 여자 친구가 황당해 하는 것만큼 보는 나도 황당하다. 아니 당황스럽다. 분명 동성애자임을 밝힐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러더니 영화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누나는 흡혈귀임을 증명하려고 자기 손목을 물고, 또 전화박스에서 전화하는 여중생 목을 문다. 동생과 동생 친구는 그제서야 사실을 받아들이고 송별 파티를 준비하고, 누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날 – 영국에 세계 흡혈귀들이 모여 산단다 – 동생 여자 친구는 자기도 물릴 때 기분을 알고 싶다며 물어 달라고 하고 누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며 영화는 끝난다.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어떠한 상황으로 사람들이 실소를 머금게 하는지 알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 학생은 고독이 뭔지 아나?’ ‘저 학생 아닌데요’ 뭐 이런 식이다. 뜬금 없으면서 서로 대화를 하려 해도 대화가 안 되는 상황. 그리고 깡패한테 쫓기다 간신히 모퉁이에 숨었는데 난데없이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는 그런 상황. 이 삼사십 분의 짧은 영화에는 그러한 김지운 감독의 스타일이 다 담겨 있다. 우선 흡혈귀가 커밍아웃한다는 설정은 조용한 가족만큼이나 황당하다. 여중생을 물려고 하는데 여의치 않자 누나는 ‘어, 저기 봐.’라고 하고 여중생은 그 쪽으로 쳐다볼 때 누나는 물어 버린다. 물린 여중생은 동생과 동생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담배 하나 물고는 물릴 때의 느낌을 능청스럽게 얘기한다. 마지막에 동생 친구가 물어달라고 할 때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 준다’. 그런데 무는 부위가 또 황당하다. 이상 야릇하게 동성애의 은유를 깔아 버린다.(물릴 때 동생 친구가 지르는 괴성은 너무 자극적이라 다시 한번 확 깨게 만든다)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설득력있게 보이기 위해 영화는 극중 재연상황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듯하다. 신하균의 연기는 이미 사람들이 그의 말투만 들어도 웃음을 지어낼 정도로 색깔이 굳혀진 것 같다. 이 영화가 얼굴을 정색하고 내뱉는 농담 같이 능청스러움을 갖추는 데에는 신하균의 공도 꽤 큰 것 같다.

나는 디지털 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다. 이 영화를 보면 김지운 감독은 대중성이나,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어느 정도의 약속 같은 것은 일정 정도 내던져 놓고 만든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나름의 대중성이 갖추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요즘 유행이라는 엽기 문화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나도 어느새 말도 안되거나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조용한 가족’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부조리같은 코미디를 즐기고 싶다면 이 영화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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