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속의 진리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이 구두라는 도구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촌아낙네의 세계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하이덱거의 <예술작품의 기원>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에 따르면 고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 구두는 농민여인의 것이 아니라 “그때쯤에는 이미 도시 사람이 되어 있었던 ‘예술가(=고호)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구두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이 아니라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주변을 걸어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농촌에 도시를 대립시키는 이 해석 속에는 ‘대지로의 귀속성’이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하이덱거의 농민적 파토스에 대한 샤피로의 냉정한 반감이 숨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농민적 이상이란 곧 “대지와 혈통의 신화”라는 나치의 정치적 이상이기도 했다. 마이어 샤피로에게 하이덱거의 고호 해석을 소개한 골트슈타인은 우연하게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망명객이었다.

샤피로에 따르면 하이덱거는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고호의 작품 속에 집어넣어 읽은 셈이 된다. 즉 그의 고호 해석은 하이덱거 “형이상학의 주관적 투사”가 된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호의 그림이 우리를 구두라는 도구존재에 관한 진리 앞에 세운다는 하이덱거의 숭고한 명제는 철학사에 유례가 없을 우스운 해프닝이 되어 버릴 것이다. 과연 누가 옳을까? 저 그림 속의 구두는 누구의 것일까? 화가의 것일까? 농민의 것일까? 남자의 것일까? 여자의 것일까? 저 구두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농촌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도시에서 온 것일까? 그림 속의 구두 안에 들어가 있던 몸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회화 속의 진리>에서 데리다는 이 두 사람의 대립 속으로 뛰어든다.

불필요한 동일시?

사실 고호는 여러 장의 구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샤피로의 말대로 그는 “마치 이 모든 구두가 동일한 진리를 말한다는 듯이” 자기가 염두에 둔 구두가 무엇인지 특정하지 않는다. 서신교환을 통해 하이덱거가 그 그림을 어느 전시회에서 보았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마이어 샤피로는 전시회 카탈록을 구해 하이덱거가 본 고호의 구두를 특정한다. 이어 하이덱거의 해석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연다. 마이어 샤피로의 비난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동일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1) 고호의 작품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두의 ‘복사’이다.
(2) 그 구두는 예술가 자신의 것이다.
(3) 농촌의 들판이 아니라 파리라는 대도시에 속한다.

이렇게 샤피로는 그림의 제재(=subjet)를 밝히고, 그것의 소유주를 찾아 그것을 특정 주체(=subjet)에 귀속시키고, 이어서 그것을 특정한 시공간적 좌표 속에 위치시킨다. 이 삼중의 동일시 확실성을 강조하려고 샤피로는 “명백히”, “분명히”와 같은 강한 낱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 중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샤피로가 제시하는 유일한 근거는 작품 외적인 성격의 것, 즉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고호가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고호가 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굳이 특정한 구두를 모델로 삼았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다.

게다가 고호의 작품 세계 전체라는 컨텍스트를 고려할 때 그 구두는 농민의 구두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작품세계는 농민들의 삶에 대한 묘사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고호가 자신을 ‘농부’와 동일시했다는 것도 하이덱거의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내가 내 자신을 농부의 화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이어 샤피로처럼 그 구두가 굳이 파리라는 대도시에 속한다고 볼 근거는 없게 된다. 게다가 샤피로 자신도 고호를 농민에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반 고호는 어떤 면에서는 농부와 같다. 예술가로서 그는 노동을 한다.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소명으로 맡겨진 일을 해 나간다 (…) 대지와 접촉한 똑바로 선 몸의 무게…”

데리다는 샤피로가 문제가 되는 구절을 전체 맥락에서 ‘폭력적으로’ 떼어냈다고 비판한다. 하이덱거는 원래 고호의 그림을 분석하려고 한 게 아니다. “이 모든 진리는 그림에 대한 기술이나 설명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적 도구의 예로써 고호의 구두를 선택했을 뿐이며, 그가 제시한 ‘농민적’ 해석은 구두라는 도구존재에 관해 내릴 수 있는 여러 해석 중에서 하나의 “부수적인 변양태”에 불과하다. 똑같은 그림을 놓고 하이덱거는 얼마든지 도시적 해석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하이덱거에게 중요했던 것은 ‘구두라는 도구존재로 하여금 말을 하게 내버려두는 것’, 그리하여 그 그림 앞에서 우리는 구두의 도구존재에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서게 된다는 것이다. 고호의 그림은 도구(가령 농민여인의 구두)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열어 보여주고, 그 결과 감추어져 있던 구두라는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바, 이를 그리이스인들은 ‘알레테이아'(=진리, 탈은폐)라 불렀다. 샤피로는 이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노철학자의 주관적 ‘투사’라 비난하는 샤피로에 대해 아마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술이 주관적 행위로서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꾸며대 그 안에 집어넣었다고 보는 것은 가장 극심한 자기기만일 것이다.”

마이어 샤피로가 보기에 하이덱거의 실수는 그저 잘못된 예를 골랐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하이덱거는 고호의 그림에서 “개인적인 것”, “관상학적인 것”을 읽어내는 데에 실패했으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오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동일시에 이어서 네 번째 동일시를 도입한다. 고호 자신의 언급을 의식한 듯 “어떤 면에서 반 고호는 농부와 같다”며,

(3) 고호의 그림 속의 구두를 화가의 ‘알터에고'(alter ego)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고호의 그림 속의 구두를, 자신을 농민으로 여겼던 화가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일종의 초상으로 읽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결국 모든 것을 화가의 ‘자의식으로, 하나의 주체성으로 소급’시킨다. 여기서 고호가 자기 몸에서 떼어내어 벗어놓은 저 한 쌍의 구두는 마치 고호의 몸에서 잘려나간 두 귀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것은 “낡은 사물로서의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old thing)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이덱거가 형이상학의 시대의 병적 징후로 읽으며 문제삼으려 했던 것이다. 즉 주체성 속에서 확실성의 토대를 보장하려 했던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적 형이상학을 무너뜨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이덱거가 새로운 진리개념으로써 하려고 했던 작업이며, 그 기획의 하나가 바로 <예술작품의 근원>이었다. 이렇게 볼 때 샤피로는 외려 하이덱거보다 문제의식의 수준이 뒤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이덱거의 논리가 ‘예술의 형이상학적 힘’이라는 의심쩍은 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하나, 데리다가 보기에 형이상학적 전제를 더 분명하고 더 결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샤피로 쪽이다.

“불필요한 해석주의”?

샤피로의 해석은 철저하게 근대적 형이상학의 틀 내에 머물고 있다. 작품을 현실의 대상의 ‘모방’으로 바라보고, 그 대상을 주체로 귀속시키고, 나아가 작가의 자의식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철저하게 근대적 주체철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에피스테메 위에 서 있는 근대미학의 특징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이덱거가 어떻게 이 근대미학의 개념틀을 해체하는지 보았다. 샤피로가 구두의 주인을 찾아 그것을 특정한 주체성에게 귀속시키는 것을 작품해석으로 본다면, 하이덱거는 구두의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호의 작품 속에서 현존재(=세계 속의 인간)의 상관자로서의 도구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 아니 그 진리를 작동시키는 것(Ins-Werk-Setzen-der-Wahrheit)이었다. 마이어 샤피로와 하이덱거의 해석의 싸움은 결국 근대의 형이상학과 그것을 해체하려는 시도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덱거와 샤피로 사이에 이러한 대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그 둘 사이에 동시에 묘한 공통성이 존재한다고 암시한다. 가령 두 사람 모두 그림 속의 구두를 ‘쌍’으로 규정한다. 일단 그 두 짝의 구두를 ‘쌍’으로 규정함으로써 해석은 그 밖의 다양한 가능성의 놀이에서 빠져 나와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컨대 하이덱거의 해석은 한 쌍의 구두에서 아래로, 즉 구두 아래로 존재하는 농민의 대지로 나아가고, 샤피로의 그것은 한 쌍의 구두에서 위로, 말하자면 도시에 살면서도 자신을 농부와 동일시하며 농부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했던 어느 화가의 얼굴로 나아간다. 샤피로는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작품의 진리를 얻기 위해 구두의 위로 거슬러 올라가 주체에 도달한다. 반면 하이덱거는 현전(=presentation)으로서의 작품의 진리를 위해 구두의 아래로 내려가 그것을 대지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방향은 달라도 결국 작품이 가진 단 하나의 궁극적인 의미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해석은 일치한다.

여기서 이제까지 샤피로에 맞서 하이덱거를 옹호했던 데리다는 이 노철학자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다. 샤피로와 하이덱거는 서로에게 진리를 빚지고 있다. 샤피로는 하이덱거에게 ‘현전의 진리’를 빚지고 있다. 하이덱거는 샤피로에게 ‘동일시의 진리’를 빚지고 있다. 샤피로와 하이덱거의 공통성의 오류는 예술작품의 진리를 단 한 번에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의미결정론에 있다. 두 사람 벗겨놓은 구두를 누군가에게 신기기 위해 풀어진 구두끈을 다시 묶는다. 구두를 주인 없이 그냥 저렇게 놔두면 안 되는가?

데리다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진리는 작품 속에 현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데리다의 시니피앙은 결코 현전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이루며 다른 시니피앙들로 연기되면서,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흔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예술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예술작품의 의미, 그것의 진리성은 그것의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은폐이자 동시에 탈은폐’라는 하이덱거의 진리개념을 본다. 실제로 데리다는 하이덱거가 말한 ‘존재론적 차이’라는 것이 자기 사유의 출발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데리다는 하이덱거의 사상이 일종의 근원으로의 회귀열망이 아닌지, 그리고 그 열망에서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유희, 진리의 드러남을 단 한 번의 해석으로 현전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해석이냐 해체냐

[글쓰기와 차이]에서 데리다는 이미 씨니피앙의 소급불가능성, 말하자면 그 배후로 파고들어가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시니피앙의 놀이, 즉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뿐이리라. 재현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명제, 주장, 담론은 텍스트 외부의 현실을 지시하는 게 아니다. 텍스트 외부에는 그것이 닮아야 할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속에서 의미를 연기하며, 자신의 의미를 끝없이 다른 시니피앙들에게 연기시키면서 산포되는, 그리하여 결코 현전에 도달하지 않는 텍스트들의 놀이 뿐이다.

미학의 용어로 옮기면, 예술은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이 모방해야 할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계열성을 띤 작품들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이덱거가 소개하는 고호의 구두, 마그리트의 구두, 아다미의 구두는 계열을 이루고 있다. 계열성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또한 푸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들뢰즈(<감각의 논리>)에게서도 나타난다. 시뮬라크르! 예술이 모방해야 할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작품의 진리에 대한 최종적, 결정적 해석도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그때그때 발동시키는 다양한 진리의 놀이이며, 이 해석들 사이에 위계질서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해석학’과 ‘해체론’ 사이에 묘한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가령 하이덱거의 전통을 이어받은 해석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해석들 사이의 인식론적 우열을 가릴 기준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담론의 밖에 그 담론과 일치해야 할 어떤 외적 현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눈앞에 현전을 한다면, 특정한 해석의 참/거짓, 혹은 적절/부적절을 가릴 기준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의 밖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석의 기준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해진다. 이 경우 각 해석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아니라 통약불가능성이라는 이름의 평등성이 존재하게 된다.

하이덱거가 근대의 형이상학을 벗어나고서도 아직 훗설의 영향 하에 예술적 진리의 ‘현전'(=도구존재의 드러남)으로 되돌아간다면, 데리다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는 하이덱거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존재’의 정학을 니이체적 시각에서 ‘생성’으로 역동화한다. 데리다에게 예술작품의 진리는 단 한 번에 종국적으로 현상하지 않는다. 고호의 작품이 하이덱거를 만나 하나의 진리를 열어주듯이,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그와는 또 다른 진리들을 열어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덱거처럼 하나의 근원적 진리로 회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니이체가 말하는 관점주의(Perspktivismus), 즉 하나의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말하자면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이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예술작품의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작품은 ‘해석학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의 보존'(W.Welsch)이다.

subjectile, projetile

독일의 미학자 볼프강 벨쉬는 데리다(나아가 탈근대의 사상가들)의 사유와 엥포르멜 회화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앵포르멜은 5,6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외부세계의 재현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차가운 추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액션페인팅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와 비슷하나, 액션페인팅이 그림을 그리는 것의 행위성에 주목한다면 앵포르멜은 그것이 남긴 ‘물질적 흔적’을 강조한다. 가령 하르퉁, 마티외, 술라주 같은 사람의 작품 속에서 “텍스추어”(=회화적 구조)는 그 어떤 지시물을 갖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지시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데리다의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가리키지 않고 또 다른 시니피앙을 가리킬 뿐이다.

데리다에게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시니피에라는 ‘관념’이 아니라 시니피앙이라는 기호매체의 물질성이다. 앵포르멜의 화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현의 projetile이 아니라 질감의 subjectile이었다. 가령 글자인지 문양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앙리 미쇼의 특이한 칼리그램 속에서 우리는 의미의 projetile이 마티에르의 subjectile로 돌아가려는 엔트로피의 운동을 볼 수가 있다. 앵포르멜의 화가들은 흔적, 자욱, 산포, 의미의 연기 등을 강조한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기호작용에 관한 데리다의 사상의 그림을 본다.

회화 속의 진리 – 진중권”에 대한 한 개의 댓글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짧은 주소

트랙백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