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이라는 정체성

몸이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2년이 좀 넘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정신까지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그보다 오랜 세월이 걸린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개인이 쉽게 집단에 함몰되는 분위기에서 개인은 주체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그 강요된 정체성 중의 하나가 바로 군대생활을 했다는 `예비역’이라는 것이다. 2년이 넘는 기간을 엄마 품을 떠나 살아보았다는 자부심, 고달팠던 생활에 대한 아프면서도 달콤한 향수, 군대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모종의 우월감이 함께 어우러져,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오랫동안 자신을 군인으로, 즉 `예비역’ 군인으로 동일시하게 만든다.

군가산점 위헌 판결이 내려졌을 때, 내가 의아했던 것은 왜 그 고귀한 분노가 정작 그 판결을 내린 남자들, 즉 대법관들로 향하지 않고, 엉뚱하게 그 소송을 낸 여성들의 출신학교 사이트로 몰렸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자기 삶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법령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국회에서 통과되는 판에, 하필 군필자 중의 극히 일부와 관계 있는 군가산점 문제에 왜들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인지, 이 뜨거운 연대의식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이런 것이다. 즉 군가산점을 둘러싼 논쟁이 그토록 뜨거웠던 것은 그것이 `예비역’으로서 남성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별 거 아닌 문제를 놓고 남성들이 그렇게 신속하게 통일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살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령 나는 텔레비전의 `시청자’, 라디오의 `청취자’, 신문의 `독자’다. 대통령은 나를 `국민’이라 부르고, 시장님은 나를 `시민’이라 부르고, 동장님은 나를 `동민’이라 부른다. 정치가는 나를 `유권자’라 부르고, 국세청은 나를 `납세자’라 부르고, 백화점은 나를 `고객’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동대장님이 등장하시어 나를 `예비역’이라 불러주신다. 그런데 이 수많은 정체성 중에서 왜 하필 동대장님의 부르심만이 신성한 걸까? `예비역’이라는 정체성은 기껏해야 일생에 한, 두 달 정도만 자기를 규정할 뿐이다. 그런데 왜들 자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예비역’과 동일시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이제 몸뚱이만이 아니라 정신도 제대를 해야하지 않을까? 군사문화가 사회 속에서 유지되는 것은 군을 떠나서도 정신은 여전히 군이라는 특수사회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대학의 여성주의 웹진에서 대학 내 예비역들의 행태를 비꼬는 도발적인 글을 실었다가 또 다시 난리가 난 모양이다. 이 발칙한(?) 글을 여기 저기 퍼 나르며 신성한 남성들의 동맹을 촉구하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다. 읽어보니 별 것도 아닌 글이다.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예비역’과 동일시하여 지레 그 글에서 자기가 모욕감을 느끼는 것도 영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돌아다니며 바지런히 사이버 동원 예비군 소집을 하는 것도 그다지 성숙한 태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디 이번 사건이 이번에도 문제제기를 한 여학생들을 집단으로 성토하는 우스꽝스런 남성축제로 끝나지 않고, 부디 `예비역’들의 몸과 정신에 기입된 군사문화의 잔재를 드러내어 한번쯤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진중권/<아웃사이더> 편집주간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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