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개 게시판-우스개 (go HUMOR)』 99871번
제  목:♨불기둥♨ 선문답.
올린이:baddnews(안중호  ) 01/03/09 14:18  읽음:1344 추천:100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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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도 대학원에 다녔었고

이 특유의 반사회적 꼴통적 성격으로 인하여

지도교수의 많은 구박-_-을 받았던 바 있다.

단체 생활에서, 자기 위의 직책에 있는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지적하면 안되고

(물론 그들은 ‘난 개방적인 사람이야. 언제든지 지적해줘. 환영이라구!’

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대들이여, 속지 말지니 -_-+

좆 되구 나서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다.

상명 하복 중심의 이 대한민국 특유의 군대식 단체생활에서…

웃 사람이 맘 먹으면 아랫사람 좆 만드는건 일두 아니다.-_-)

회의때에는 항상 말석에 앉아서

의견이 결정날때까지 가만히…얌전히 있다가

“넌 어떻게 생각하니?” 라고 물을때

“..아 좋은데요 뭐 ^^;” 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이럴때 당신이

“아 제 생각으로는 (이 팀의 대장인 당신이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그 후에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신-_-) 그 것 보다는

이렇게 이렇게 하는것이 더 좋을꺼같은데요?”

라고 말하실 생각이라면

그것을 이른바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철없다!’ 라고 표현하며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뜻을 펼쳐 조직을 바꾸고 싶다! 라는 뜻있는 분들께는

1. 모니터를 든다.

2. 그것으로 힘차게 자기의 머리를 내리친-_-다.

3. 1의 과정을 반복한다.

라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돌리는거 밖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

아! 군대 갔다오면 되겠구나? ^o^

한때는 자신도 이 사회의 말단으로, 무력한 자신을 통감하며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입장에서 토론할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씨발거리면서 군대에 갔던 사람이

이병때는 좆뺑이 까면서 그러한 자신의 꿈을 확고히 다지다가

…..일병이 되자마자 후임을 존나 갈구게되는것은;;;

“인간이기에, 너무나 인간이기에!”

        – 최인호 –

우리는 모두 숙연히 이해 해야만 한다.

누가 그 남자를 비난할 것인가! (-_-;)

그 사람은 말년병장-_-이 되어, 모든것이 자기 꼴리는대로-_-돌아가는

그러한 조직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지고-_-

제대 후 자기가 시키는 것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복종하는 사람.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저 봐. 아새끼가 철이 없어. 군대 갔다와야 인간이 되지 쯧..’

하는, 조직의 효율성을 추구할 뿐인 박정희스러운-_- 시선이

그렇게 이 사회에서 찾기가 존나게 힘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_-

 “역사는 그 자체가 반복한다.”

 –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

그리고

 “내 인권은 어디 간거지?”

    – 후미무라 쇼 –

이 ♥사랑과 평화의 출장전문 안마사♥가 이런 말을 할때마다,

역시나 아주 진부하게도

“넌 군대를 가야 인간이 돼!” 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럴때면 본좌는

“저 4급인데요 ^^a” 라는 말을 돌려준다.

그 사람이, 정말 사람은 단체생활에 적응해야 하고

나의 이런 성격은 사회를 사는데 다소간 문제가 있기에

어느정도 조직생활을 해 가면서 그걸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그래? 잘됐네. 다녀와라.” 라고 할 것이지만

그 사람이, “난 애국심을 빙자하여 니가 좆되는걸 보고싶을 뿐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뭐야? 군대는 편한데 가면 안돼. 그거 얼마든지 취소 가능해.

지원해서 현역으로 가. 전방에서 고생하면서 많이 생각을 해보라고.”

…라고 말할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하며

…..별반, 내 예측은 ‘너무나 인간본성적’ 이기에 (난 단순한새끼다;;)

그다지 크게 빗나가지는 않아왔다는 것이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결론이다 -_-;

개인적으로, 나에게 욕 메모를 남기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많다.

왜 나는 남자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잔디세대, 베레베레, 쿠키 등 그동안 유머란에 회자된

수많은 여자들이 들었던

“너 걸레지? 개같은년. 나랑 한번 하자. 죽여줄께.”

라는 건전한비난-_-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ToT

(그런 메모 온적 없다면 잔디양-_-은 중호오빠 에게 항변의 메모를 남기길♥)

왜 나는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십새끼 너 담배두 피냐? 아예 개 걸레구만.”

이란 비판-_-을 들어본적이 한번도 없단 말인가!! ToT

그 교수는 나를 불러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분은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하셨다.

“아무리 어떤 개인이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살아 남을수가 없어 중호야.

자, 중호야. 생각을 한번 해보라고. 니가 포철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봐.

너랑 같은 입사 동기가 있는데… 걔는 별로 일은 잘 못하고

영어실력도 뛰어난 편이 아니야. 하지만 그녀석은 정말

선배들, 상사들 말을 아주 잘 들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야.

조금 부당한 일이 있더라도,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서 웃으며 참는다고.

하지만 너는 반면에 웃사람들이 뭘 시킬때마다 꼭 이유 달고…

웃사람들이 개인적인 심부름같은거 가끔 바빠서 (-_-;)시킬때가 있는데

그럴때는 꼭 바락바락 나서면서 말 안듣는다구.

…니가 상사라봐. 넌 어떤 녀석을 빨리 승진시키겠니?”

“…말 잘듣는 놈이요-_-;”

교수님은 환히 웃으시며 나한테 물으셨다.

“잘 아네? 그럼 중호야. 니가 그 회사에서 출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니? ^^”

“회장의 딸을 꼬십니다.”

-_-;;;;;;;;;;;;;;;;;;;;;;;;;;;;;;;;;;;;;

그분은

더이상의 대화를 포기 하셨다 -_-;

               남자 인터넷 –  불기둥닷컴 -_-++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

[기획특집] 대학, 새로운 이념형의 모색

 

 [3] 담장 밖에서 본 대학

 

사회적 관점에서 대학이라는 제도의 기능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학을 바라보는 내 관점은 아직까지도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다. 즉 나는 그저 공부가 재미있었고, 공부로 밥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대학이기에 가능하면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나름대로 제도권에 편입되기 위해서 무던히 애도 썼다. 하지만 제도권은 이 처절한 노력을 몰라준다. 제도권이 얼마 안 되는 내 자존심마저 포기하기를 요구했을 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후 대학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요즘은 ‘공부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대학’이라는 선입관을 반박해주는 가능성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생활이 불안정하기는 해도 훨씬 더 많은 정신적 자유과 생활의 여유가 있다. 요즘 나는 ‘일체유심조’라는 원효대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몸뚱이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문학은 위기여야 한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라는 아우성이 있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쌤통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대학제도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논리를 도입해서라도 상업적 경쟁이라도 강요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위기이다. 물론 인문학에 경제적의 가치를 생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이 사회적 현실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제 고민을 발전시켜 왔다면, 지금처럼 ‘통폐합을 해도 문제없다’는 식의 모욕은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인문학은 제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경쟁력’ 운운하는 신자유주의적 천박함에는 역겨움이 난다. 하지만 상아탑에도 ‘경쟁’은 필요하다. 공정한 학적 경쟁의 시스템 말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상아탑에는 이 경쟁의 메카니즘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가. 열심히 공부해 봤자, 승부는 엉뚱하게 결정난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은 일찍부터 학적 능력보다는 외교력, 지적 성실보다는 인간관계의 성실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학문이란 이전 세대의 한계를 깨고 나아갈 때 발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아탑에서 그런 것은 어차피 금기다. 그 결과 지식의 시장에서 묘한 독과점의 지배가 형성된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지적 도전을 할 시기에 한국의 대학은 순응의 지혜부터 가르친다.
한국의 대학은 현실과 별 관계가 없다. 그곳의 논의는 현실에서 올라온 고민들이 이론으로 결정화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식은 현실의 문제해결을 위한 노우하우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신분을 사회적으로 구별짓는 기호일 뿐이다. 현실에 조회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지식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왜? 현실에서 검증될 기회가 없는 지식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매치되지 못한 개념은 추상성을 벗을 수가 없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쉽게 표현할 능력이 없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고차원적으로 사고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자기가 말하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증의 위험이 없는 추상의 높은 수준에서 발언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구름위의 대학

경쟁도 없고, 현실과의 연계도 없기에 한국의 대학에는 프로젝트라는 게 없다. ‘프로젝트’라는 말은 단지 기업과 연결된 몇몇 이공계열에서나 사용되는 단어로 여겨진다. 사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도대체 ‘교수든, 학생이든, 도대체 궁금해하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학이라는 것이 일단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프로젝트의 형태를 띄는 것일텐데, 세상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이 학을 한다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경쟁이 없으니 굳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제시할 의무도 없고, 현실과의 연계도 없으니 그런 프로젝트가 애초에 필요하지 않다. 프로젝트란 작든 크든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 그것을 설명하는 새로운 틀, 그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의 체계를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대학에는 이 프로젝트라는 관점 자체가 없다.

할 일이 없으니 당연히 뭔가를 할 의욕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가끔 부산한 움직임도 있으나, 그건 대개 교수님이 어디서 받아잡수신 연구비의 명분을 제공해주기 위한 쓸 데 없는 작업일 뿐,  그나마도 대부분 대학원생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교수님의 이력서를 화려하게 할 목적으로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그 눈동자에는 총기가 없다. 어차피 자기의 일도 아니고, 그 일의 중요성을 정작 그 일을 맡긴 분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번역해 드린 독일 사전의 서문이 두 페이지 가량 교수님의 새 책에 인용부호도 없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내게는 인용임을 안 밝힌 그 양심보다도 중간에 남의 글을 통채로 끼워놓고도 제 생각을 일관성있게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더 놀라웠다. 내용 이전에 문체론적으로라도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더 큰 문제는 자기들만 공부를 안 하면 되지, 굳이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못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뭐 좀 해보겠다고 하면, “튀지 말라”, “멀리 가지 말라”, “왜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하느냐”는 둥 다양한 제재를 받게 된다. 나는 책을 번역하는 데에도 별도로 교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관행이 있음을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욕을 먹는 가운데 배웠다. 내 문제의식을 적어 학회지에 제출한 글은, 어쩐 이유에선지 그게 편집위에 속하지도 않은 원로교수의 손에 들어가더니 결국 그 팔 힘을 동력으로 하여 훨훨 하늘을 날다 쓰레기통 속에 들어갔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해도 이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한 사람이 공부하는 게 왜 자기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의 대학, 그곳은 나의 지성적 파악을 거부하는 숭고의 영역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 나온 지금 경제적으로는 쪼달려도 여유가 있고, 자유가 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철학적, 미학적 프로젝트가 있다. 정치적 프로젝트는 한국의 사상시장의 극심한 우경도를 바로잡기 위한 정치철학적 기획이다(<엑스 리브리스>). 철학적 프로젝트는 플라톤부터 데리다까지 서구의 철학사를 언어관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는 작업으로, 내 모든 작업의 인식론적 기초를 이루는 작업이다. 이는 박사과정의 논문과 별도의 작업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미학적 프로젝트는 탈근대적 사유들의 미학성을 드러내고, 기존의 미학사를 탈근대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탈근대의 관점에서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을 뛰어넘는 탈근대의 ‘존재미학’을 수립하려는 기획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이 세 가지 기획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한국의 시민사회를 위한 미학적 에토스의 형성에로 모아진다.

 

잡스런 논문 vs. 꿰뚫는 잡글

대학 밖에서 내가 누리는 또 하나의 자유는 문체의 자유다. 처음에 여기저기에 잡글을 쓸 때는 그저 생활의 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다양한 주제로 산발적으로 쏘아댄 그 쪼가리 글들이 외려 높은 추상의 차원에서 노는 고상한 글들보다 어쩌면 더 현실을 더 잘 비추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나의 잡글들은 그 하나 하나를 보면 현실의 파편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논문이라는 형식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현실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큐비즘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벤야민이 말하는 ‘분산된 지각’의 효과…. (요즘은 벤야민을 읽는다. 나는 그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유, 그것을 할 자유, 그리고 최소한의 자존심. 그것을 찾아 나는 대학 밖으로 나와야 했다. 내 잘못일까?

진중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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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의 탈레반
“이분법이 모든 경우에 악랄하고 무용한 것은 아니다. 이분법이 악랄해지는 것은 그것을 가치의 확고한 서열구조로 바꾸어 분할과 배제의 장치로, 불관용의 근거로, 선악과 우열(優劣)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을 때이다.”

“이분법(二分法) 사라지는 곳에 낙원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문명비평가였던 롤랑 바르트의 말이다. 세상 만사를 선명히 두쪽으로 나누고 그 둘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절대의 경계선을 긋는 인간 정신의 관습이 이분법이고 이 이분법을 사유의 방법으로 삼는 것이 이분법적 사고이다. 선/악, 백/흑, 남/여, 이성/감성, 아(我)/타(他)… 이런 개념쌍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수천가지 이분법의 일부이다. 많은 경우 이분법은 배제와 분할, 억압과 소외의 논리가 되어 살인, 인종청소, 전쟁, 파괴를 정당화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발칸반도에서의 인종청소, 중세 교회의 마녀사냥,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분리 등은 이분법이 세상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그 이분법을 무너뜨려야 낙원이 온다는 바르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런데 그 이분법 무너뜨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이 수만년에 걸쳐 적응하며 살아온 자연계의 질서 자체가 이분화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해와 달, 낮과 밤,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 자연환경의 이런 이분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동안 인간의 머리 자체가 이분법을 일종의 사유구조로 고착시킨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지성들은 이분법이 불변 구조가 아니라 정신 관습이 만들어낸 장치이자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분법이 모든 경우에 악랄하고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로서, 어떤 복잡성의 인식에 이르기 위한 발견적 수단으로, 혹은 갈등구조를 만드는 드라마의 방법으로 각각 유용한 때가 있다. 이분법이 악랄해지는 것은 그것을 가치의 확고한 서열구조로 바꾸어 분할과 배제의 장치로, 불관용의 근거로, 선악과 우열(優劣)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을 때이다.
최근 지구촌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리반(Taliban 탈레반??? 확인) 정권에 의한 바미안 석불 파괴 행위에 깜짝 놀라고 있다. 석불들은 무슨 공군 사격훈련용 표적처럼 기총 소사를 받아 벌집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이너마이트에 날아가 먼지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석불의 수난을 보고 있자면 지구촌이란 데가 아직도 얼마나 관용의 능력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탈리반 정권으로서는 서방세계에 대해 분노할 수십가지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석불 파괴로 표현될 때 세계 공동체는 탈리반 정권의 ‘분노할 수 있는 자격’ 자체를 불신한다. 지금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경전(經典)으로 사는 사회’를 지키려는 귀중한 정신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슬람 문명이다. 그 문명은 배제와 불관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탈리반 지도자들이 파괴행위를 정당화할 근거를 쿠란(Quran) 경전의 한 구절(‘우상숭배금지’)에서 찾는다고 굳이 주장한다면, 그들은 이슬람의 훨씬 큰 보편적 정신보다는 광신(狂信)에 더 충실하다. 경전의 문자적 해석 이상의 수준으로는 결코 올라가지 못하는 정신상태, ‘나’ 속에 ‘남’을 포함시키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가 ‘광신’이다.
지금 지구촌은 ‘타자(他者)에 대한 존중’의 윤리적, 정신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고, 성숙한 사회일수록 시민들이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언론매체, 교육, 대중문화 등 거의 모든 가용자원들을 동원하고 있다. 일부 할리우드영화와 오락게임을 제외하고는 선당(善堂- 이런 용어는 없지만 만들어 쓰자)과 악당을 확고한 이분법으로 갈라쳐 “악당에게는 오직 죽음을”이라는 유치한 서사구조를 채택하는 문화생산물은 없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도 이분법보다 타자의 이해와 존중을 가르치는 쪽으로 제작되고 있다.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위상(位相)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은 아직도 멀어보인다. 개인의 불관용보다는 조직, 국가, 체제에 의한 불관용이 더 무섭고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문이다. 지금 우리는 탈리반(원래 페르시아어로 ‘쿠란 경전을 공부하는 학생’의 의미)을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사실 그 손가락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 속의 탈리반은 얼마나 많은가!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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