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이론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문화와 그 이데올로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존재피제약성을 파헤치며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처방. 종래의 학문이 존재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지 못했다는 데서 비판이론은 사실의 기술보다는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에 역점.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심리학 등의 여러 분야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여 사회이론을 전개, 일종의 종합과학적 접근을 시도. 인간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보려고 했으며 그의 초시간적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시대의 진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함. (루카치의 영향이 비쳐짐)

파시즘 시대에 즈음하여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파시즘의 유래를 독점자본주의에서 찾았고 인간이 살기 위한 경제적 생산구조가 파시즘을 낳았다고 봄.

–> 근대서구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시민사회와 자유경제체제를 마련했으며,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류의 미래를 한결 밝게 전망시켰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거대한 생산구조가 오히려 인간을 그것에 예속시키는 결과 초래, 개인들은 안일한 생활영위를 위하여 자본주의라는 질서에 적응하고 조화를 다루게 된 것. (과학과 기술은 사람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반면 그들의 생활을 규정하고 지배) 고도의 생산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관료 장치 확대, 국가관리의 사적 영역으로의 확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과학 기술에 대한 비판.

비판이론의 시기적 구분

제1기 : 호르크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이 30년대에 쓴 논문들로 대표.

제2기 : 세계대전 동안 미국으로 망명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과 ‘부정의 변증법’

제3기 :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제4기 :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후신참인 유르겐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을 통한 사회인식론의 정립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

이성에 의한, 계몽,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자연지배가 전체주의로 역전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설명. 17, 18세기에 출현한 계몽적 이성이 존재와 비존재, 진리와 허위를 식별하는 능력이었고 한편으로 인간을 부자유와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오늘에 와서 그것이 역으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들었으며 그를 억압. 한때 주체적이고 자주적이었던 이성이 인간의 자기보존이라는 이기적인 관심의 도구로 전락. 계몽적 이성은 경제적, 사회적 힘에 반사적으로 순응할 따름. 이로 인해 전체주의의 기반 마련. —>계몽의 변증법, 근대의 계몽적 이성이 빠져버린 운명.

합리화 : 이성에 의한 통제와 조정을 일컬음. 합리화가 인간을 자본주의 체제의 관리제도에 예속시킴. —> 합리주의가 나찌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준비했다고 봄.

부정의 변증법’

이성의 부정적 본질을 강조. 도구적 이성이 가져온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를 지양할 길을 찾음 : 이성이 기존의 지배체제를 부정하는 데에서 그 진정한 변증법적 발전에 이른다고 함. 이성이 고도의 생산성이라는 목적을 돕는 도구로 하락하고 계몽사상의 해방적 이성이 자멸의 파국에서 구출되어야 한다고 주장.

계몽주의의 도구적 이성화

이성의 경험적 측면 : 계산하는 능력. 과학적 방법을 절대시하는 실증주의라는 사회적 보수주의로 계몽주의 변화 —> 변증법의 정지상태

계몽적 이성이 자기반성 없이 그 한계를 인정하지 못한 결과가 이성의 도구화.

아도르노는 계몽적 이성의 현상 긍정을 비판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함. 변증법은 부정적 변증법의 형태로서만 가능.(아도르노의 사회철학의 기본명제)

—> 현실 비판은 현실의 부정, 현실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 자유에로 나간다. 부정의 변증법은 현재에 일어난 퇴행의 여건 아래서의 진보이론의 부활을 의미.

역사를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로부터 점진적으로 해방되는 역사로 간주하는 입장이 진보이론의 중핵을 이룸. 이 점에 있어 모든 진보이론은 해방이론.

재래의 진보이론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성취하는 해방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기술의 자연지배로 그 자신을 해방시켰던 주체에서 그가 스스로 구축해 놓은 지배의 객체가 되어버렸다. 자연을 지배했던 인간주체가 자연을 지배해야 할 통제 장치의 객체가 되었다. 지배를 통한 해방은 오늘에 와서는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체의 노예화를 결과. 이제 인류 미래의 희망이었던 계몽이라는 정립(These)은 반정립(Antitheses)으로 이행해야 함.

비판적 이성은 이성의 획일화, 조직화, 절대화를 부정하며 현존하는 것이 최고이며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부정한다.(헤겔 변증법의 좌파적 해석과 일맥상통?)

마르쿠제

초기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경향

후설과 하이데거의 밑에서 철학 연구.

칼 리브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암살, 독일 공산주의혁명 좌절, 젊은 지성인 방황.

신칸트주의와 신헤겔주의가 지배했던 철학계에 하이데거 출현, ‘존재와 시간’ 출판.(구체철학 등장)

시대가 안고 있던 혁명의 문제를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으로 풀려고 함.

—> 논문 ‘역사적 유물론의 현상학에 대하여'(1928) :

마르쿠제에 있어 맑스주의는 역사성을 가리키는 인식의 영역을 의미. 역사성은 현존재(Dasein)의 기본성, 현상학은 이 역사성을 해석하고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행위의 가능성을 모색. 마르쿠제의 행위는 인간존재의 본질적 행동양식. 맑스의 실천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근본적 행위’ : 환경과 더불어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행위. 이것이 맑스의 혁명적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봄. 근본적 행위의 구체적 실현은 역사성으로서 이루어짐(역사성을 인간존재의 기본범주로 삼음).이는 역사적 필연성이며 인간의 자유는 이를 파악하는 데 있음.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견지에서 보면 이는 인간이 본래적 존재로의 결의를 통해 자유롭게 된다는 것. 이것은 기존의 것, 과거에 대한 거부. 즉 자본주의적 현실, 현존재에 위협적인 상황. 맑스의 개념을 빌어 오로지 물상화를 제거해야 진정한 역사성의 인식이 가능. 수동적이고 무비판적 관계에서 인간의 자아의식을 해방하는 수단이 사적 유물론. 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인간이 계승된 과거의 노예라는 것을 멈춘다는 조건 아래서만이 가능. 진정한 실존은 구체적인 변혁행동으로서만 실현.

맑스의 ‘경제학 철학 초고'(1884) 발견

인간학적 맑시즘의 재발견. 맑스로의 회귀.(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에 전념하는 동안 역사를 쫓아버린 것이라고 실토) ‘사적 유물론의 정초를 위한 신자료’라는 논문으로 청년 맑스에 관한 논쟁의 기초 제공.

—>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맑스의 ‘자본론’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소외론을 찾아냄으로써 초기 맑스 사상의 인간주의적 성격을 이미 밝혀놓았지만 마르쿠제는 ‘경·철 초고’의 주제인 노동의 소외를 인간학적 이론으로 발전.

∙마르쿠제가 보는 ‘경·철 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상품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생산하고 또한 상품으로서의 노동자를 생산. 노동자를 기계에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얽매어 놓는다. 노동자들은 육체적인 존재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의 자신과 그의 인간됨을 팔아넘겨야 하고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은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실현 대신에 ‘외화’로 전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노동에 의해 개조된 자연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이에 따라 부정되어야 할 힘이 되어버림. 진정한 혁명은 인간본질의 회복, 본질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

—> ‘경·철 초고’가 이 근본적 혁명의 기반을 구축하는 추진력이라 봄.

·이후 후설의 소개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본산지인 사회연구소의 연구원이 됨

첫 논문 ‘전체주의적 국가관에 있어서 자유주의와의 투쟁’ : 독일 파시즘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와의 유사성 지적. 파시즘은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나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잉태. 과거 자유주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였지만 맑스주의와의 대결에서 배타적이고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요청에 따라 보수화를 겪게 되어 파시즘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친화력 갖게 됨.

부르주아 자유주의도 전체성의 합리적 형성을 요구한다고 주장. 생산과 재생산이 보편적인 것으로 개개인에게 미리 주어지는 한, 그리고 이 생산형태의 조직이 개인의 행복에 선행조건이 되는 한, 개인에 대한 전체의 우위성은 정당화된다고 함.

따라서 30년대말에 마르쿠제가 쓴 일련의 논문들은 반파시즘적 사회비판의 방향.

37년 ‘철학과 비판이론’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적 사회이론의 성격이 그의 나름대로 정리됨.

철학은 경제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 그러나 유물론의 경제적 개념을 가지고 현실구조를 설명하는 비판이론은 전문과학으로서의 경제학개념 이상의 것을 의미. 인간의 삶과 그의 자아실현을 허용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이론은 정치 경제의 비판이어야 하고, 사회적 존재 전반을 비판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이상을 투쟁하는 인간의 실천적 목표 안으로 융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 비판이론의 목표는 경제의 제관계가 통제하는 사회의 이성적 조직이며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조직 이상의 것.(경제를 개인의 요구에 굴복시키는 것)

부정의 철학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의 제이념 ‘이성과 혁명 – 헤겔과 사회이론의 생성’에서 이론적 완성. 헤겔 철학의 현대적 의의를 다시 강조함.

헤겔의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기준과 특히 그의 변증법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갈등에 놓여 있기 때문에 부정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함. 실증주의는 사실과 현상에만 머물고, 그 배후에 있는 본질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철학. 이에 부정적 철학으로서의 헤겔 변증법 대치.

헤겔은 서구철학의 전통과 18세기 계몽철학에 따라 사유의 객관적 개념과 원칙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것들을 총괄해서 이성이라 부름.

이성과 현실이 통합되는 최종의 목표를 위해 장구한 과정이 있어야 하며, 현실이 이성에 의하여 형성되지 않는 한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국가가 현실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성의 개념과 원칙에 따라 인간의 잠재능력을 충분히 계발하고 실현시킬 때. 그 이전의 국가형태는 아직 이성이 아니며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참고 칸트의 오성과 이성 개념과 관련한 헤겔의 이성과 변증법

오성 :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범주. 그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며 그 범주 안으로 대상을 위치시킴으로써, 즉 대상을 분리(구분)하고 대립함으로써 인식을 획득하는 데 역할. 이는 상식이나 실증주의적 사유와 연결됨. 이성은 이 범주의 위치지움을 담당하는 능동적인 인식 영역. 헤겔에게 있어 오성과 이성의 구분은 상식과 사변적 사유, 또는 비변증법적 내성과 변증법적 인식간의 구분과 같다. 오성 또는 상식의 입장에서는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안정된 것을 용납하는 태도 보임. 지각의 대상처럼 정확하게 주어지지 않는 잠재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안전감 추구. 변증법적 사유는 이러한 태도 격하, 상식이 확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만듬. 상식에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것이 변증법적 과정이며 사변적 사유. 사변적 사유는 상식에 대한 투쟁의 시작이며 상식의 일상적 무관심과 안전감의 폐기가 철학의 시초.』

·60년도판 ‘이성과 혁명’의 새 서문 : 부정적 사유의 부활을 주장.

정신분석과 사회이론

나치의 전체주의를 벗어나 미국에 정착해서 미국 관찰하면서 신대륙의 사회현실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는 맑스의 사적 유물론이 접근도구로서 불충분하다는 한계성 깨달음.

—> 정신분석학에 관심.(내적 억압의 문제에 대하여)

에로스와 문명’

자본주의는 대중의 심리조작으로 그 정당성을 더욱 강화해 감. 이 결과는 결코 이성이 승리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렸으며, 헤겔적 이성의 이념이나 맑스적 이념도 그 실현에 있어서는 요원하다는 것을 절감. 사회주의 제국에 있어서도 전면적 공업화의 노선을 택함으로써 이데올로기 및 물질적 영역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접근. 맑스주의는 진정한 혁명적 성격을 잃게 된 것. 따라서 이 책에서는 맑스주의가 겪은 변화는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자기 위치의 안전을 도모하고 이 체제에 대한 부정의 가능성을 제거할 수 있었던 장치는 무엇인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함.

현대에 처해 있는 인간조건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심리적 과정이 국가 속의 개인의 기능 – 개인의 공적인 존재 – 에 의해 흡수되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 문제는 정치적 문제로 전환됨. 이에 따라 심리학적 개념의 정치학적·사회학적 내용을 발전시킬 과제가 생김. 마르쿠제는 개인을 위축하고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인격을 파괴하는 현존질서에 대한 심리학적 검토의 중요성을 강조함.

인류문명이 인간본능의 영구적 굴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마르쿠제는 출발점으로 삼음. 본능의 자유로운 충족은 문명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생본능(Eros)’와 ‘사본능(Thanatos)’의 이론을 중시. 전자는 후자와 대립, 사회적 환경과 자연과의 투쟁에서 인간본능은 ‘현실원칙’ 안에서 발휘. 인간의 욕구충족의 형태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짐.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을 억압하고, 현실원칙에 따라 인간은 삶을 어떻게 사는가를 배움. 인간은 사회생활의 현실적인 조건에 적응하고, 즉각적이고 완전한 욕구 충족을 연기하고, 그것을 한정시키며, 변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명화 이루어짐.

현실원칙의 생성과 더불어 인간은 조직화한 자아(ego)가 된다. 자아는 현실의 객관세계와의 적절한 관계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요구 때문에 존재. 현실원칙 아래에서 인간은 이성의 기능을 개발. 또한 관심, 기억력, 판단력 등과 같은 정신기능도인간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획득된 것들. 현실원칙 아래서 인간의 본능이 억압되고 변형되면서 그의 이성은 인간 자신의 억압수단으로 전락. 이성은 지배의 논리가 되어버림.

현실원칙은 제도의 체계로 구체화됨. 이렇게 쾌락원칙에 대한 현실원칙의 승리가 이루어짐. 쾌락원칙은 무의식 차원에서 간직. 충족되지 않는 쾌락원칙의 힘은 무의식 안에 남을 뿐만 아니라 쾌락원칙을 능가해 버린 현실 자체에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침. 억압된 것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억압은 그치지 않고 되풀이 됨.(억압의 재생산)

현실원칙 아래서 인간의 정력발산을 성적 향락에서 일 또는 작업으로 돌려놓음. (정력의 합리적, 경제적 사용) 그러나 일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며 일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그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며 일을 통해서 인간은 자아실현을 함.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는 현실원칙이 실행원칙으로 보존되면서 일은 더 이상 인간의 창조적 자아실현이 아니라 경제적 생산성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됨. —> 실행원칙

과잉억압 : 사회적 지배가 필요로 하는 제재. 어떠한 형태의 현실원칙도 상당한 정도의 본능억압을 요청, 현실원칙의 특수한 역사적 제도와 지배기구의 사적 이해관계는 인간집단에 대해 부가적인 통제를 가하는데 이 부가적 통제가 과잉억압. 과잉은 인간의 종을 영속화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억압과는 다름.

현대자본주의의 지배 아래서 현실원칙은 문명 자체의 지속에 필요한 만큼보다 더 큰 본능억압을 요구하는 특수형태를 갖추게 됨. 실행원칙의 규정에 따라 사회는 그 성원들의 경쟁적 경제업적에 일치해서 계급으로 분화. 노동은 인간해방이 아니라 노예화의 원천이며 수단.

실행원칙은 자본주의라는 취득적 사회의 원칙이며 생산장치를 이득있게 활용하기 위한 원칙. 사람들의 노동은 이 생산장치를 위한 일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지 않고 이미 정해 놓은 기능을 수행할 따름. 그들이 일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며 소외’ 속에서 노동할 따름. 생산과 노동의 통제는 인간본능을 제도적으로 변형하고 사람들은 상벌이라는 자동식 체제에 의하여 생산기구의 도구로서 자신의 역할을 배움. 기존질서로의 적응은 인간본능의 구조를 개조함. 본능에 부가한 제재는 외적인 객관적 법칙처럼 개인들에게 작용, 사회적 강제력이 양심으로 흡수되고 개인의 무의식 안으로 스며들며 그 자신의 욕망과 도덕관으로 작용.

과잉억압과 실행원칙의 두 용어를 사용한 인간역사의 두 단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첫단계 : 결핍의 제거와 풍요의 기술적 정초를 위해 사회적 통제를 필요로 함

·현대 : 성적 충동을 억압하고 오로지 관리된 노동의 형태 안에서 그리고 일부일처주의적 한정된 가정생활 안에서만 그 충동을 표현케 하며 이는 불필요한 억압. 성욕은 해방되어야 하며 진정한 인간해방은 성적 충동의 해방을 요건으로 함.

탈성화와 재성화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5세까지는 여러 기관에 성감이 확산, 실행원칙에 의하여 성감대가 탈성화(desexualization)되고 성감대는 성기라는 신체의 한 국소에만 집중됨. 나머지는 노동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마련.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지배의 작업윤리 아래서 겪고 있는 인간의 재성화(resexualization)을 주창. 실행원칙 아래서 생본능의 과잉억압이 제거되어야 하며 이는 노동의 폐지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존재를 노동의 도구로 삼는 사회조직의 변화로 가능하다고 봄. 과잉억압과 실행원칙의 제거는 놀이와 노동이 일치하는 경우.

일차원적 사유

마르쿠제는 고도산업사회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위기가 없이 안정되어 있다고 봄(안정성론).

일차원적 인간’에서는 고도산업사회의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검토.

서구사회가 역사상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풍요가 사람들로 하여금 반항으로 돌릴 수 있는 욕구좌절을 없앰으로써 사람들은 기존질서에 자신을 동일화.

실행원칙에 의한 사회적 통제의 전면화가 고도산업사회의 통치형태. 물질적 풍요가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질서의 변화를 바라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그 효력을 잃었다고 봄.

이같은 사회현상은 기술지배의 결과. 과학과 기술은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의 도구라는 단계를 넘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 됨. 오토메이션과 컴퓨터의 발명으로 노동시간 대폭 단축됨으로써 사람들을 억압적 노동에서 자유롭게 만들고 또한 향락을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기존질서에 대한 불만을 갖지 못하도록 만듬.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생산기구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상품과 서비스는 기존질서를 유지해주는 기반. 기존체제의 정당성은 대안의 가능성이 더 이상 없다는 믿음에 근거. 한 체제의 경제적 효율성은 그 정당성의 도를 높여 줌. 계급간의 생활 양태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줄어들게 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고도생산은 그 안에서 안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허용하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의 영구화를 바라게 함. 이렇게 기술지배는 사회적 지배가 됨. 개인은 기술지배에 대한 자발적 신민이 되고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 스스로 동화.

사람들로 하여금 반항을 모르게 한다는 것이 기술지배의 형태이며, 기술발달이 가져온 풍요 속에서 변증법적 과정은 정지하고 기존질서의 부정은 더 이상 없게 되어 남은 것은 일차원적 사유.

변증법적 논리학은 모순을 사유의 본질에 속하는 필연성으로 간주. 마르쿠제는 사유의 이차원성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진전된 미국사회에서 일차원화되어 갔다는 사실을 분석.

마르쿠제는 두 개의 사유방법, 즉 이차원적 사유와 일차원적 사유를 구분하고 ‘안정된’ 사회의 성격 설명. 그의 정의에 따르면 이차원적 사유는 주어진 현실의 틀을 넘어서 보다 나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대립하는 반면에 일차원적 사유는 현실을 이성의 구체화로 보고 이 현실의 보다 합리적인 조직화를 일삼으며 주어진 현실의 틀을 넘어서는 것을 거부함. 고도산업사회는 바로 이 두 번째의 사유, 일차원적 사유의 구체화. 사람들은 기존질서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면역되어 있음. 마르쿠제는 사유와 행위가 주어진 현실에 일치하는 만큼 그것들은 사실의 허위질서를 보존하는 허위의식이라고 함.

혁명의 이론

마르쿠제도 맑스처럼 한때 노동자계급에 혁명의 희망을 걸었음. 그러나 고도산업사회는 노동계급을 체제 안으로 흡수, 부정적 사유를 마비시킴.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고 진정한 행복이 아니면서도 행복의식을 갖고 있는 한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의 여지는 찾기가 불가능. 그럼에도 마르쿠제는 이 질서가 전복되어야 한다고 믿음.

혁명을 위한 가능성을 지닌 이들로서 주변인에 주목.

주변인 : 보수적 사회기반 아래 아주 깊은 사회 밑바닥에 있는 국외자, 즉 인종과 피부색깔로 차별대우를 받고 착취당하고 있는 층. 민주정치의 과정 밖에 있으며 그들의 삶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여건의 종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들이 비록 의식에 있어서는 아닐지라도 행동에 있어서는 혁명적이라고 간주. 그러나 그들로 인해 이루어지는 시대의 종말이 나은 종말이라 생각지는 않음. 왜냐하면 그들도 사회 안에 영접된 후 일차원적으로 변할 가능성은 20세기 노동계층이 겪어온 경험이 비추어 보더라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