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곽경택

사람에게 맹세는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리라 다짐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만 영원할 따름. 조오련과 바다거북이를 두고 일없는 내기를 걸던 꼬마 사총사 일당의 든든한 한울타리도 영원할 수 없다. 도대체 우정은 무엇이며 친구는 무엇인지, 그 단어에서 떠오르는 알 수 없는 든든함을 허무는 것은 무엇인지 이 영화는 말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다. 준석과 동수를 축으로 그들과 다른 세상에서 관망하는 아니 그보다는 그들의 삶에 조금은 발을 담근 상택의 나레이션으로 풀어내는 친구 단상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찡하지도 않았고 공허감마저 느껴진다. 사시미 담그는 소리에 소름 돋는 움찔함의 감각만이 남는다.

우선 든든한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그들을 제압하는 현실인 것 같다. 아버지를 부정하려 하나 끝까지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꿇은 삶을 사는 준석과 동수는 아버지로부터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결핍과 억압의 굴레를 고스란히 안고 서로 갈등한다. 그들의 우정이 무너지는 것은 이러한 아버지의 윤리가 우스꽝스러운 작태로 나타나는 깡패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며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습득하면서부터이다. 부정의 의지는 있으나 끝내 이겨낼 수 없는 대상, 그것에 굴복한 나약함을 애써 감추려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깡패 친구들의 강인한 외면이다.(상택에게서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나 두려움의 징후를 찾을 수 없다. 차라리 그는 잘 길들여진 순종적인 아들이다. 준석이 상택의 삶을 동경함이 아버지가 가리키는 길로 군말없이 잘 따라가는 천성이나 순종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갖추고 있음에 있다면 상택이 그들의 삶에 대한 화자가 되는 것은 탐탁치 못할 뿐더러 가능치도 않은 얘기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한 남자들의 세계의 이 무뚝뚝하고 짜세잡힌 면면에서 무언가 뜨거운 친근감을 이끌어낼 이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럼 든든한 울타리를 엮어 내는 질료는 무엇인가. 그들 사총사의 우정은 어떤 내용인가. 나는 그것의 정체를 찾을 수 없는 모호함을 느낀다. 어릴 적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던 육질의 정감 말고 그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그것만이 시원이자 기반으로 내세워질 뿐 서로간의 소통에서는 실패한 사이가 아닌가. 어머니의 자궁 같은 저 먼 기억의 푸근함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도 현재의 너와 나 사이에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야’ 따위의 대사는 일상 언어에서 가장 닭살돋는 말 중의 하나이다. 그 말은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영원불멸하게 친구로서 고정시켜 버리는 악수이다. 이 고정된 상태에서 더이상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없다) 상택에 대한 준석의, 준석에 대한 동수의 일방향적인 컴플렉스가 극복될 기회를 놓쳐 버린 이들 사총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애석함 뿐이다. 이 애석함을 곱씹을 겨를 없이 교복과 사투리, 흑백 사진 같은 70년대로 치장해 버리고는 곧바로 사시미질을 해대는 통에 이 영화에서 제목의 의미를 드러내 줄 주제어가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화해는 나 자신의 수줍은 노력에서 시작되듯이 우정은 나 자신의 힘겹지만 진지한 대화의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대화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나와 너 사이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언제나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 중에 있어야 친구이며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나와 충돌하고 있는 사람이다…뭔소리 하는 거여…졸려서 원…흐미…

꼬마는 가끔 느낄 때가 있다
옛적에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정다운 반가움을 나눌라치면
그들이 지나온 삶의 궤적과 꼬마의 그것이 심하게 어긋나 있음을 느낄 때
그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 서글프고도 자연스러운 일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친구의 궤적이 그려내는 조감도가 꼬마의 그것과 너무나도 어긋나
이제는 같은 말을 하여도 서로 다른 언어가 되어 상대의 귓전에서 튕겨나는 것이다
불과 몇 년의 간극만 빼고는 비슷한 궤적을 그려왔던 친구들은 그 몇 년 사이에 꼬마의 행보와 많이 달랐던지 꼬마의 말문을 막히게 하였다
친구들은 어느덧 꼬마가 싫어하는 어른의 독특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생존을 위해 제 모습을 바꾸고 세상의 발밑에서 순한 양이 되기를 요구하는 현실을 괴롭게 의식해 보려는 얼치기에게는 일찍 현실 원칙에 얽메인 친구들에게서 적지않은 불쾌감과 실망을 느끼며 자신의 정당성을 웅변하려 하지만 이내 자신에 대한 조소로 그 비겁함을 억누른다
누구는 꼬마를 아직 순진한 철부지라 하며 누구는 요상한 개똥철학을 지닌 희극인으로 바라본다
꼬마가 그것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짊어온 삶의 무게와 앞으로 짊어질 삶의 무게 앞에서는 겸손하거나 적어도 담담할 줄 알아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육중함 앞에서 힘없이 족쇄를 차라고 함은 아무래도 탐탁치 못하다
그 족쇄는 철들어 어른으로 가는 의례이며 그 앞에서 꼬마는 순종해야 어른이 된다고 한다
꼬마는 그들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직 제대로 된 쓴맛을 보지 못한 꼬마가 현실에 대해 하는 말은 고단함을 체감했거나 예감하는 이들에게는 희극일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삶의 무게는 담담한 것이되 족쇄는 분연해야 할 것임을 말할 방도를 모르는 꼬마는 어른의 문턱 앞에서 얼르거나 반기는 부모와 친구들을 보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꼬마는 꼬마다
친구와의 불편함을 느끼는만큼 꼬마는 어른의 길과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4-24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