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 오믈레트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이 지구상의 모든 권력과 금은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랑해지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점점더 침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기의 궁정요리사를 오게 해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오랫동안 충직하게 짐을 섬겨왔고 짐의 식탁을 가장 훌륭한 요리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제 짐은 그대의 요리솜씨를 마지막으로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 그대는 짐에게, 짐이 50여년 전 내 나이 한창일 젊은 시절에 시식해 보았던 산딸기 오믈레트 요리를 만들어야 하네. 50여년 전 그때 짐의 선왕은 동쪽에 있는 나쁜 이웃 왕과 전쟁을 했었지. 그때 그 왕이 싸움에 이겨 우리들은 도망을 쳐야만 했어. 그래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을 쳐 드디어 어느날 어느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허기와 피로에 지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느 조그만 오두막을 발견하게 되었지. 그 오두막 집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 노파는 뛰어나와 우리를 반기면서 손수 부엌에 나가서 곧 무엇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산딸기 오믈레트였어. 내가 이 오믈레트를 한입 입에 넣자마자 나에겐 기적처럼 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어.

그때만 해도 짐은 미성년의 소년이었고 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이 맛있는 요리가 얼마나 좋은 것이었던가를 오랫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러나 짐이 훗날 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짐의 전 제국을 뒤져 그 노파를 찾아 보게 했지만 그 노파는 물론이고 그 노파의 산딸기 오믈레트를 요리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대가 만약 짐의 이 마지막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면 짐은 그대를 짐의 사위로 삼아 이 제국의 후계자로 만들걸세. 그러나 만약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대는 죽어야만 하네.

이 말을 듣자 궁정요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교수형리를 곧장 불러주십시오. 물론 저는 산딸기 오믈레트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레트를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레트는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 드셨던 모든 식료를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궁정요리사가 이렇게 말끝을 맺자 왕은 한참동안 묵묵부답이다가 곧 그에게 선물을 가득 챙겨 주고는 그를 그의 직책으로부터 파면시켰다고 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 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 – 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실업자 없는 유토피아/ 김수행

어제까지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이 느끼는 황당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오래간다. 또한 갓 사회에 나오는 청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실업자가 없는 세상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실업자가 생기지 않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아침에 일어나니, 모든 기업과 은행에서 사장이나 대주주가 없어지고, 종업원들이 기업과 은행의 주인이 되어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종업원들이 주인이기 때문에 해고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일거리가 줄어들면, 그 작은 일거리를 나누어 하기 위해 모든 종업원들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즐길 것이다. 또 이 사회에서는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을 할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생산물은 거대한 규모에 달할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사회의 공동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일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루에 3시간만 노동해도 그 사회는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가시간을 많이 가지게 된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하루를 보낼 것인데,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사회로 만들 것인가를 생각하고 토론하는 데에도 긴 시간을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사회처럼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가도 없고, 주가 조작으로 떼돈을 벌 수 있는 주식시장도 없으며, 사회의 재산이 모두 `나의 재산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재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을 속이거나 착취할 이유가 없어져 순진하기 짝이 없고 항상 환하게 웃을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 꿈 같은 사회인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이 어려운, 살기 힘든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편안한 사회가 있다는 것.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물론 유토피아는 `아편’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몽롱하게 만들어 순간 순간을 허송하게 해서는 안 된다. 유토피아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그리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도록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이야기한 유토피아는 헛된 공상만은 아니다. 나는 영국에서 10년을 살았는데, 학교와 병원이 모두 무료였고 저소득층은 소득에 따라 집세를 내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픈 사람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언제나 병원에 가서 무료로 치료받지만, 나는 `필요가 없어서’ 10년 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간 적이 없다. 스웨덴에서는 공장이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서 종업원들을 해고하자, 정부가 앞장서서 동네마다 탁아소, 도서관, 학교, 유치원을 지어 실업자를 고용했고, 공원을 가꾸며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고용을 증가시켰다. 또한 지금 프랑스에서는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 하루의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유토피아에 점점 더 살을 붙여야 한다. 지금 왜 실업자가 많은가? 기업가들이 지금의 상황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또는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이전과 같은 큰 규모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왜 `다수’의 시민이 `소수’의 부유층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가? 이 희생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정부가 과연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구조조정의 진정한 의미는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 경제 전체를 어떻게 재편해야 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자가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자기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득권자의 권세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김수행/서울대 교수·경제학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