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갔다와서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항상 남에게 내 몸을 맡겼다가는 차분히 가라앉아있던 것이 흩어져 버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책도 읽고 토익 준비도 좀 해 봐야 하는데 매일 무슨 짓으로 보내는 건지…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4-24 21:22)

‘행동하는 지성’ 부르디외를 추모하며

`행동하는 지성’의 상징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23일 밤 7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구별짓기>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등에서 이룬 비판사회이론가로서의 업적과 함께 무엇보다 그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의 저자 홍세화씨가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에밀 졸라에서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프랑스 지식인의 사회참여 전통을 이어받은 큰 별, 피에르 부르디외가 세상을 떠났다.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의 말처럼, 그는 이론적 담론과 사회운동을 분리시키지 않는 의지를 한 순간도 놓지 않은 `삶 자체가 참여’였던 지성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실에서 먼발치로 본 적밖에 없지만 나에게도 그는 큰 스승의 한 분이었다. “사회학적 성과를 이루면서 사상과 행동의 변증법을 살았다”거나 “사회 참여와 분리될 수 없는 과학으로 사회학을 살았다”는 평가들 너머 내가 그에게서 받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지식인의 자기성찰에 관한 것이었다. 사계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교수가 되었을 때 그 학교와 교수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으로 첫 강의를 시작했던 그는 20년 뒤 마지막 강좌의 주제를 `피에르 부르디외’로 정해 자기 자신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서 사회와 만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인의 자기성찰은 사회 참여의 기본 조건이며 출발점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가령 한국의 대학강사들에 대한 착취구조에 맞서 싸우지 않는 대학교수들은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들 중엔 피에르 부르디외를 자주 인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식민지땅 알제리에 대한 증언을 통해 연구 작업을 시작했던 그는 최근 몇년 동안 `행동하는 이성'(raison d’agir) 그룹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에 온 힘을 경주했다. 그에게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 혁명으로, 과거를 복고시키면서 진보인 양 드러내는, 퇴보를 진보로 둔갑시킨 기이한 혁명”이다. 그리고 “쉬뢰더, 블레어, 조스팽은 `신자유주의를 적용시키기 위해 사회주의를 끌어들인’ 가짜 좌파들”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불러온 `비참한 세계’에 맞서, 그것이 빚어내는 사회적, 문화적 폐해에 맞서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고 끊임없이 물으며 `좌파의 좌파’를 제기한다. 3년 전에 그는 귄터 그라스와 가졌던 회견에서 사회적 발언을 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발언해 마땅한 공인들이 공인으로 남기 위해 입을 봉하고 있다면서 `아가리를 열라’고 아가리를 열었다. 또 <세계의 진짜 지배자들에 관한 물음>을 통해 오늘날 정치경제적 권력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상징 권력, 즉 커뮤니케이션을 장악하고 문화상품을 생산, 유통시키는 권력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견제 구실을 강조하였다.

피에르 부르디외,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교훈은 우리들의 현실 속에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홍세화/<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르네 지라르

‘이지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범인은 고교생들이었다. 다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때는 중학생이었다. 얼마 전 그 말을 또 들었다. 이번엔 초등학생이란다. 기자들이여. 유치원에 눈을 돌리라. ‘이지메를 당한 김개똥 원아(무직 5살),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 최연소 자살. 세계적 특종 아닌가.

“어린이는 천진난만하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건 ‘천진난만’한 ‘어른이’들이나 믿는 동화다. 애들이 노는 걸 보라. 얼마나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한지. 우리 때도 따돌림은 있었다. 나도 당했다. 가령 “잠수함의 프로펠러…”라는 남의 말을 “잠수함의 스크루”로 교정해준 대가로 난 가끔 공동체의 제재를 당했다. 물론 그건 지독하지 않았다. 길어야 며칠이면 제재는 해제되고, 내가 다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레베스트’가 아니라 ‘에베레스트’”라고 진리를 말할 때까지, 난 아무 문제 없이 놀이집단에 섞일 수 있었다.

근데 ‘이지메’는 차원이 다르다. 그건 개인에게 가하는 집단적 폭력, 제도적 따돌림이다. 왜 그러는 걸까? 일본문화? 남 탓 할 것 없다. 결정적 원인은 ‘괴상한 집단주의’에 ‘천박한 이기주의’가 결합된 아수라, 즉 한국사회 자체에 있으니까. 내 가설. “이지메란, 정치적으론 파쇼독재에 천박한 자유주의가 결합한 결과, 역사적으론 일제 식민지배에 미국문화가 천박하게 중첩된 결과가 이제 우리 2세들 사이에서 문화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이다.” 이제 내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보겠다.

학교는 신화적 폭력의 세계다. 이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여기서 유일한 정의는 폭력이다. 타자를 배제하는 최초의 원(原)폭력을 통해 비로소 다수자의 정체성과 ‘선악’의 기준이 마련된다. 선악을 비로소 있게 하는 원폭력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선악의 구별에 선행하므로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 없다. 그것은 부조리하다.

선악에 선행하는 원(原)폭력은 작의적이다. 그 폭력이 누구에게 떨어질지, 왜 하필 그에게 행사되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근원적 부조리. 이 앞에서 개체들은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이 공포는 잔인한 공격본능으로 전화한다. 공격을 피하려면 공격자, 즉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희생양을 공격할 때 불안한 개체들은 무한한 잔인성으로 집단을 향한 충성심을 경쟁적으로 입증한다.

집단과 하나가 되는 만큼 개체는 안전하다. 부조리한 실존들은 이렇게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 희생자가 사라지면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내고, 이렇게 또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되면,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개별자들은 안심하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전체 빼기 하나’의 화해와 평화.

보편적 카오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이너스 1’의 제의(祭儀). 르네 지라르는 평화와 질서를 수립하는 이 지혜(?)를 ‘문명’ 자체의 본질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과도하게 근본적인 비판은 결국 현상(status quo)의 정당화로 귀결된다는 역설에 대해 그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