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 현상을 부추기지 말라

월드컵 열기에 나라가 온통 미쳐 돌아가고 있다.

size=2>*자본과 권력은 붉은악마를 부추기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이미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상업화된 ‘섹스’와 함께 제국주의의 식민지에
대한, 혹은 독재정권의 대중에 대한 우민정책의 일환으로 이용되면서 대중의 탈 정치화를 대규모로 진행시켜왔다. 지금 우리는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수만 명 단위로 전국 주요 거리를 메우며 열광하는 빨간 티셔츠의 물결은
우리 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도 노동자·노점상의 생존권도 집회·시위의 자유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우리는 ‘붉은 악마’ 현상이 바야흐로 우리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붉은 악마’ 현상을 두고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망발이 그칠 줄을 모른다.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느니, ‘6월항쟁에
나타난 민중 에너지의 재현’이라느니, 심지어는 ‘우리 민족의 단결력과 애국심’을 과시했다는 따위 발언은 지식인의 진정한 소명을 벗어 던진 추악한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붉은 악마’ 현상에는 넘실거리는 국가주의와 맹목적 애국심이 있을 뿐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닌 승리에
대한 열광이 있을 뿐이며, 체제에 대한 순응과 정치적 무관심과 인간의 주체성을 죽이는 군중심리가 있을 뿐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파시즘을
가능케 하는 병적인 현상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지배세력이든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대중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대중동원은 필수적이다. 군사독재 시절에 그 동원은 민주인사, 언론, 국민에 대한 강제와 공포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통치가 비판세력의 대규모 체제내화를 통해 진행되는 지금, 대중동원은 탄탄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한 거대 매스컴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대 매체가 국민에게 국가주의를 부추기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하겠는가?

16강 진출로 인한 경제적 부수효과가
16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코리아 에너지에 의한 ‘국민통합’의 효과까지 해서 선진국 진입이 눈앞에 있다고 법석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 속에 국가주의의 유령과 힘겹게 싸우면서 이 사회에 인권을 실현해 나가야 할 우리는 월드컵과 ‘붉은 악마’가 이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10년 이상 정체시켰다고 주장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더 이상 부추기지 말라.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필승’이
아닌 ‘인권’이다.

 

<논평 :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에 부쳐

지난 22일자 논평에 대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논평>의 본래 취지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질타와 비판, 또는 우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공격적 비난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평> 발표를 계기로 ‘붉은 악마’
현상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소중한 장이 마련된 점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애초 논평에서 표명된 저희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지면상의
한계로 논평에서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논거들을 보강하여 제시함과 아울러, 이번 논평의 내용에 대해 여러 분들이 제기하신 비판과 질의에
답함으로써 좀더 생산적인 토론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1. 우리의 비판 대상은 거리응원을 즐기는 시민들이
아닙니다

축구 사랑이라는 개인적 취향으로 모인 동호인 조직으로서의 ‘붉은 악마’, 그리고 그저 한판 걸판지게 놀아보기 위해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논평>이 비판하고자 한 대상은 아닙니다. 고단한 삶, 지루한 일상, 더러운 정치판이 쏟아내는 각종
비리소식에 지친 시민들이 월드컵과 거리응원을 축제로서 즐기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금의 붉은
악마 현상이 진정으로 ‘순수한’ 자발성에만 기초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국민 모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논평>은 온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될 것을 종용하고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자들, 그러한 ‘붉은 악마 현상’을 부추기고 거리에서 생산되는 자생적 문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해나가고자 하는
‘의도된 손’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 기획자들은 다름 아닌 자본과 권력과 언론이며, 그에 동조하여 추악한 아부를 서슴지 않는 지식인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장하시는 그 ‘순수한’ 열기가 자본과 권력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오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분들이 칭송하시는 그
‘해방의 에너지’가 오히려 ‘위로부터의 동원 메커니즘’인 파시즘의 제물로 바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이 현상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힘과 이 현상을 통해 생산되는 반인권적 담론들에 일침을 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2. 춤추는 국가주의의 망령에
주목해야 합니다

월드컵은 기본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대항전이기 때문에 국가주의를 고취시키는 요소를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강렬하게 부추기는 것은 바로 언론입니다. 일본 대표팀의 나카타 선수가 ‘기미가요'(일본의 국가)를 제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우익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아야 했으며, 바로 이러한 순치 과정을 거쳐 기미가요를 따라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 언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론은 각종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적 수사를 남발하면서, 스포츠와 열띤 응원이 이루어내는 집단적
일체감을 국가주의로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축구는 "총성없는 전쟁"이 되고,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어느새 축구선수가 아니라 "태극전사"가
되며, 독일과 한국의 준결승전은 "독일 폭격기와 국산 요격기의 대격돌"이 되고, 한국-스페인전은 "막강 무적함대 스페인호를 격침시킨
광주대첩"으로 명명되며, 한국의 4강진출은 "남부유럽을 점령"한 것이 됩니다. 또한 언론은 한국팀의 선전이 "12번째 선수가 함께 뛰기
때문"이라고 거듭 칭송하면서, 5천만 국민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될 것을, ‘태극전사’들과 함께 뛸 것을종용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위한
‘하나됨’인지, 가슴뭉클한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과연 어떤 공동체의 모습을 열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반면 "붉은 용광로" 속에 녹아들기를 거부하는 자들, 즉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기간에 한사코 ‘노사평화’를
깨뜨리는 한심한 노동자나 즐기라는 축구는 즐기지 않고 생존권 보장하라며 떼쓰는 노점상들, 혹시 오심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말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국가통합을 해치는, ‘한국을 떠나야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의 존엄과 권리,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배려, 현실
구조에 대한 비판과 토론의 마당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언론이 호명하고 있는 국가주의라는 망령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광기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복’과 ‘승리’가 가져다주는 환희에 도취되고, ‘필승’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지금의 흐름은 지나친
국가주의와 파시즘적 정서와 몰이성에 가속 페달을 달아줍니다. 오판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나라들은 어느새 ‘우리의 승’를 도둑질하려는 상종 못할
‘적국’으로 매도되고, 한국의 편을 든 나라들은 자연스레 ‘우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장 비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와 불투명한 재정운영으로
지탄받아온 국제축구연맹(FIFA)은 한국팀의 ‘4강진출 음모설’을 일축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새 가장 공신력있는 기구로서 추앙됩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처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 혹 중국이나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 아니냐"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되는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우려했던, 인권과 화합할 수 없는 맹목적 애국심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자본-권력-언론의 삼위일체,
그들은 왜 붉은 악마 현상을 ‘기획’하는가?

언론이 이처럼 ‘붉은 악마 현상’을 조장하고 국가주의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상업적인 이해 때문입니다. 각 방송사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수백억대의 중계료를 지불하는 대신, 막대한
광고수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각 방송사는 개막 이전부터 월드컵 총력체제에 돌입하여 16강 진출을 온 국민의 숙원으로
만들어내고,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붉은 악마 현상’을 자극하고, 지금도 각종 묘기대행진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SK 텔레콤을 비롯한
자본 역시 ‘4천만이 붉은 악마가 되라’는 캠페인을 주도하고, 거리응원 마당을 제공함으로써 간접광고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이것이야말로 자본과
언론이 국가주의와 기꺼이 영합하여 월드컵 과잉 열기를 주조해내는 근본 동력입니다.

이러한 붉은 악마 현상은 국가권력과 우리 사회의
보수지배세력들의 이해에도 봉사합니다. 물론 지배세력들이 과거 군사독재시절처럼 공포정치와 강제명령에 의해 국민들을 사주하거나 직접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의식이 성장한 만큼 지배세력의 대중통치술도 더더욱 세련되고 교묘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억눌려있는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와 현실 구조에 대한 불만이 해방과 사회 변혁의 에너지로 승화되지 않도록, 스포츠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와 집단적
환희를 체험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유도합니다. ‘스포츠는 깨끗하다’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역전의 드라마와 축구영웅들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반복
재생함으로써, 지루하고 진흙탕같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생산·강화되는 국가주의는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비판세력들을 소수로 몰아부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에 지배세력들에게는 더더욱 좋은 선물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월드컵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또 다른 이유이며, 시청앞 광장을 붉은 악마들에게 선뜻 내주는 이유이며, 그러면서도 질서 캠페인을 끊임없이 벌이는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도 언론사 데스크에는 수십 수백, 아니 수천 건의 주요한 사건들이 보류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희의료원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월드컵 보도에 밀려 참담한 외면을 당해야 했으며, 축구장과 거리와 인터넷에 넘실댔던 국민들의 반미감정에도 불구하고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의 죽음은 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월드컵을 제외한 모든 영역의 사안들이 정지되어 있는 셈입니다.
월드컵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불편한’ 이야기들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관심영역 또한,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움틀거리는
역동적인 힘에 의해 자발적으로 응원에 참여했다고 믿는 시민들도 과연 자신이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물론 ‘승리’가
아니라 경기 자체를, 축구가 아닌 축제의 마당을 즐기기 위해 거리응원을 나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수많은’ 열광들이
‘하나의’의도된 열광으로 발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현실의 대립하고 있는 관계들이 ‘하나라는 신화’ 속에 모두 함몰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4. 지식인들은 낯뜨거운 아부를 멈춰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붉은 악마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진보의 색깔까지 덧씌우려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가히 낯이 뜨거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지식인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일반 대중보다 더 ‘유식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의 공기인 언론의 지면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로서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양식’을 환기시킬 책임을 갖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국가통합 이데올로기를 선동하고, 민족적
우월감을 자극하며, "붉은 악마의 핏속에는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 인자가 자리잡고 있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논평>에
대한 유감(?)을 "빨갱이들보다도 더 못한 놈들"이라는 욕설로 퍼부어 대는 현실에서, 레드 콤플렉스를 빨간’색’에 대한 혐오와 곧바로 등치시키고
붉은 옷의 물결을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 단언하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인식 수준은 가히 천진스러울 정도입니다.

갖은
수사를 동원하여 지금의 ‘붉은 악마 현상’을 칭송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지금거리에서 발현된 에너지가 과연 어떻게 진보와 해방의 에너지로 ‘질적
전환’될 수 있다고 보는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근거없이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식을 스스로 내던지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온 국민에게 붉은 옷을 입을 것을 격려하는 우리 사회가
과연 ‘원색 옷은 학생답지 못하므로 안된다’는 전근대적 교칙을 앞장서 바꿀 것인지, 한국은 살 곳이 못된다며 이 땅을 떠나는 대대적 이민현상은
사라질 것인지, ‘아시아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한국이 우리와 함께 응원했던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과 추방을 멈출 것인지, 시청
앞 광장을 선뜻 내주었던 국가가 1인 시위까지 금지하려는 집시법 개정을 그만둘 것인지, 지금의 반미감정이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의 개정으로 이어질
것인지, 지금의 ‘하나됨’의 환희가 파업 노동자들과 장애인들과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의 고통에 기꺼이 연대하는 진정한 ‘하나됨’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말입니다. 권력과 자본과 언론이 부추기는 ‘국익’이나 ‘민족적 에너지’의 환상은 우리의 이런 고민에 결코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외쳤던 그때, 광주와 6월항쟁의 거리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그 ‘순수한’ 열정들은 그들이 희구하는 그 가치만으로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다른
제3세계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 넘실대는 ‘타는 목마름으로 4강으로 가자’와 같은 ‘필승’의 구호들 속에서는
우리 사회의 억눌린 노동자와 민중은 물론, 다른 나라의 민중들과 기꺼이 연대하려는, 자국의 이해가 아니라 인류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열린 가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붉은 악마 현상’에 모두가 몰입해 있는 지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가통합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들어앉고 있으며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후퇴와 인권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후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에 불고있는 극우파시스트 세력들의 광풍으로부터 한국은 예외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는 주장에 우리가 딴지를 거는 이유이며, ‘축구를 축구로서 즐기고자’ 하는 분들도 작금의 현실에 비판적 개입을 시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 세~계최강’을 연호하는 필승의 열망도, ‘온 국민이 하나’라는 신화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고 파시즘의 발호를 경계하는 인권의 감수성과 실천입니다.

[랍 휴스 칼럼]내가 본 히딩크 <하>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승리, 히딩크 감독이 허리를 숙여 관중에게 인사 하고 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코치들과 경기를 지켜볼 수 있는 통유리 박스에 앉은 지 3주가 아닌 한 세기쯤 지난 것 같다.

붉은 바다에 잠긴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 폴란드와의 첫 경기가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히딩크, 우리의 꿈을 실현해 주오(HIDDINK, MAKE OUR DREAM COME TRUE)”라는 대형 격문(檄文)이 내걸렸다.

그 꿈은 초과 달성됐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대표팀을 지휘하며 환상적인 투쟁심을 이끌어냈다. 그는 영웅이 자신이 아니라 골키퍼 이운재로부터 홍명보 송종국 박지성을 거쳐 마지막에 골을 넣어 모든 영광을 한몸에 받는 공격수들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감독은 그들의 노력을 조직화할 뿐이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폭 넓은 지식을 쏟아부었다. 그는 선수들의 패기를 자신의 경험과 조화시켰다.

그는 이미 너무도 많은 칭찬을 받아 더 이상의 칭찬을 원하지도 않는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그가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갈 것으로 믿는다. PSV 아인트호벤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피와 살이 펄떡펄떡 뛰는 한국 선수 3명을 데리고 갈 것이다.

한국인들이 지금 아무리 많은 영광과 부를 약속할지라도 그는 스포츠에서, 인생에서 이런 칭찬은 덧없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감독은 마지막 승리 때가 가장 좋을 때다. 다음에 찾아올 패배는 그를 또다시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어쨌든 한국인들은 이 남자를 못 잊을 것이다. 그는 한국 역사에서 놀라운 한 달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여름밤의 꿈이다. 상황은 결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며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늙고 지쳐 수백만의 한국인을 거리로 끌어낸 능력을 잃어갈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여러분이 히딩크 감독이라고 상상해 보라. 정부의 훈장이 곁에 있다. 상상도 못했던 돈까지 있다. 원한다면 제주도에 여름 별장도 얻을 수 있다. 평생을 마시고도 남을 공짜 맥주가 있고 언제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항공기 일등석도 있다. 이 남자의 발 아래는 헤아릴 수 없는 물질적 풍요가 널려 있다.

나는 이런 유례없는 현상에 관해 그와 개인적으로 얘기해본 적은 없다. 그를 둘러싼 벽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물론 네덜란드인 보디가드, 조언자, 코치, 친구들, 스폰서들, 팬들 등등…. 그들 모두는 히딩크 감독의 한 부분을 원한다.

그와 언론의 관계는 거의 ‘동물원 수준’이었다. 그는 수백명의 보도진을 상대로 한꺼번에 말한다. 숨기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기대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한가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통로를 통해 선수들을 인도하고 이끈다. 이 내부 집중력은 팀을 위한 것이다.

그의 힘은 그가 축구에 집중하는 데서 나온다. 그는 자중할 줄 알아야 하며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충실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경기마다 양 골대 사이 잔디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나친 칭찬은 등뒤의 비수(匕首)가 되기 쉽다. 하지만 그도 케사르 루이스 메노티의 칭찬엔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1978년 월드컵때 아르헨티나 감독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메노티씨는 현재 현대 축구에 신랄한 독설을 퍼붓고 있다.

메노티씨는 이번 월드컵에 대해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선수들은 로봇으로 전락했고 교과서적인 축구를 하며 개인의 창의성을 상실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하지만 메노티씨는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말을 한다. “그들은 비록 플레이에 질서를 갖고 있지만 그 틀 안에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나는 이 팀이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을 지켜봤고 히딩크 감독은 재능 넘치는 선수들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메노티씨의 이 말은 히딩크 감독에게 쏟아지는 한국내 어떤 찬사보다 감동스러운 말이다. 히딩크 감독은 여기서의 임기가 끝나면 과도한 친절과 히스테리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이 위대했던 한 달을 차분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선수들에게 “꿈을 실현시키자”고 격려했던 히딩크 감독은 이제 56세다. 4년 후 그가 다시 한국이 선택한 최선의 감독일지라도 그는 결코 이번과 같은 에너지를 뿜어낼 수 없다. 선수들은 물론 자신의 영혼에서 이번과 같은 불같은 투쟁심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대부(代父)나 고문(顧問)과 같은 존재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고용한 대한축구협회가 “히딩크씨. 여기 보너스가 있으니 작별합시다”며 그를 보내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물론 똑똑한 정몽준씨가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오늘의 열기가 식는 순간 히딩크 감독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고 그가 또다시 한국과 관계를 맺는다면 후임자에게 조언하며 옆에서 돕는 데 그칠 것이다.

그건 아주 다른 임무가 될 것이다. 행복감이 사라질 무렵 누군가가 나서 한국인의 축구에 대한 엄청난 열광을 가라앉히고 다시 새로운 승리의 길을 닦아야 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때와 장소에 딱 들어맞은 천운(天運)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전설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랍 휴스/잉글랜드 축구 칼럼니스트 robhu@compuserve.com

[랍 휴스 칼럼]내가 본 히딩크 <상>

미국전에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히딩크 감독. – 로이터뉴시스 《한국축구를 아시아 사상 첫 월드컵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히딩크 감독의 성공 신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본보는 2년전부터 본보 월드컵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잉글랜드 출신의 명칼럼니스트 랍 휴스에게 ‘제3자의 입장’에서 3회에 걸쳐 히딩크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그는 스포츠, 특히 축구와 관련한 세계적인 대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90년 그에게 최고의 시민 훈장인 ‘오더 오브 더 서던 크로스’를 수여하면서 “스포츠 안에서 개인과 국가의 영혼을 이끌어내는 세계 최고의 칼럼니스트”라고 격찬했다. 그는 세계적 권위지인 영국 ‘더 타임스’ 수석 스포츠 기자로 7년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서 선데이 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굴지의 언론 매체에 깊이 있는 칼럼을 쓰고 있다. 이번 월드컵 기간에도 판정 시비가 불거질 때마다 유럽 언론은 물론 심판들까지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

거스 히딩크가 내 나라,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었다면 지금쯤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는 6개월 전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나는 지난밤 광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동안 토요일 저녁 무렵 시작된 길거리 응원의 격정적인 파티가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유럽인인 히딩크 감독이 한국 문화에 유례 없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나는 한국의 기성세대가 공동체의식을 잃고 있는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제 이 젊은 세대들은 하나의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됐다.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에 오르고도 1승도 못 챙겼던 팀이 이번 대회에서 세계 톱 클래스의 강호를 세 팀이나 격침시켰다. 포르투갈은 낙담 속에 떠났고 이탈리아는 분통을 터뜨리며 집으로 갔고 스페인은 지금 좌절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3자로서 나는 이들 세 팀이 어느 정도 기만당했다고 느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포르투갈은 한국의 용광로 같은 애국심 속에 2명이 퇴장당했다. 이탈리아는 심판이 썩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은 홈 어드밴티지에 밀렸거나 눈이 먼 심판들 때문에 2골이 무효처리됐다고 말한다.

나는 제3자이다. 실수도 보고 외국팀들의 불평도 들었다. 그리고 판단을 내린다. 이들 세 나라의 불평은 붉은 악마가 사기를 불어넣고 네덜란드인이 지도하는 한국팀이 이미 엄청난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는 현실을 굳이 외면하려는 것이다.

나는 ‘믹스드 존’에서 그를 본다. 믹스드 존은 온갖 백그라운드와 피부 색깔, 주장을 가진 언론인들이 감독과 선수 주위에 몰려들어 갖가지 언어로 질문을 퍼붓는 ‘동물원’ 같은 곳이다.

히딩크 감독은 영어든 네덜란드어든 스페인어든 자신이 기적을 실현시킨 나라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로 대답한다. 이제 그는 분명 한국 대통령보다 더 인기가 높다. 우리가 어디를 돌아보든 히딩크씨의 얼굴을 모델로 한 광고를 볼 수 있고 기업들은 인사 담당자들에게 히딩크 감독 같은 경영자를 찾으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마법 같은 일이다. 지난해 11월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히딩크 감독의 인기는 볼품없었다. 당시 그는 비무장지대 근처에 새로 지어진 파주트레이닝센터를 막 얻었고 강하기 이를 데 없는 체력강화 프로그램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보기에 불가능한 것을 하려했다. 한국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럽팀처럼 바꾸려 했던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내게 “당신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일단 시도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 한국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올 1월 강한 체력 프로그램이 시작됐을 때, 그리고 주장 홍명보가 히딩크 감독이 요구하는 수준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하고 있을 때, 정몽준씨와 한국의 축구협회가 감독을 잘못 뽑았다는 비난이 확산됐다. 일부러 고른 강팀과의 평가전 결과도 좋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은 배우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의 신뢰는 점점 더 엷어져 갔다.

이 부분이 중요한 점이다. 나는 잉글랜드 축구협회라면 그 순간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나라의 축구협회는 무능하다는 비난 속에 대중의 불만을 견뎌내기는커녕 스타 선수들이 미국 해병대보다 강한 훈련을 감수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강철 같은 신념과 정몽준씨의 믿음은 강했다. 정몽준씨는 한국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준비와 팀워크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적어도 한 경기를 이긴다는 게 그의 목표였다. 물론 그는 16강 진출을 꿈꿨다. 아울러 그는 한번도 말은 안 했지만 한국을 적어도 필리프 트루시에가 이끄는 일본만큼은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 숨겨진 계약 조건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모든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파이터’다.

히딩크 감독은 처음 정몽준씨로부터 서울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요구조건이 뭐냐고 물었다. 정몽준씨는 “월드컵 우승”이라고 말했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우승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정몽준씨는 멀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안될 이유가 있습니까?”

랍 휴스 잉글랜드 축구 칼럼리스트 robhu@compuserve.com

[랍 휴스 칼럼]내가 본 히딩크 <중>

독일戰 구상하는 히딩크 – 신석교기자  《두 번만 더 큰 성취를 이룬다면 한국축구대표팀은 최후의 목표, 월드컵을 품에 안게 된다. 나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보다 더 찬란한 업적을 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수들과 국민, 정치인은 물론이고 재계(財界)의 회의론자들까지 이 네덜란드인을 스포츠 영웅 이상의 자리로 격상시키고 있다. 그는 가끔 평화와 고요, 프라이버시를 외치지만 본래 수줍어하는 부류가 아니다. 평범한 선수였지만 뛰어난 감독이었던 히딩크가 여러분의 나라를 떠날 때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지속될 한국인의 무한한 존경심을 가슴에 안고 갈 것이다.》

지난 토요일 김대중 대통령이 “단군 이래 가장 행복하다”고 했을 때 우리 외국인들은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단군은 곰의 자식으로 5000년전 한국을 세운 인물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런 면에서 날카로운 사가(史家)다. 호랑이는 싸우고 또 싸우는 여러분의 팀이다. 곰은 여러분의 감독이다. 히딩크 감독은 갖가지 감정을 표출하며 터치라인을 어슬렁거린다. 상황이 나빠지면 윗도리를 벗어제친 후 망나니처럼 바닥에 내팽개치기도 하고 기분이 좋으면 거의 그라운드로 뛰어가 주먹으로 뜨거운 대기를 후려친다.

경기가 끝난 후 이 곰은 여러분의 선수를 차례로 껴안으며 하나가 된다.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히딩크 효과를 분석하는 숱한 전문가들이 바로 이 인간적인 따뜻함, 히딩크가 전파한 감독과 선수간의 열정과 믿음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강한수씨는 히딩크 성공 신화를 또 다른 측면에서 치밀하게 분석했다. 강씨는 명확한 목표 설정, 주위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히딩크 감독의 강인함을 꼽고 있다. 그는 또 나이와 선후배 관계를 존중하는 한국의 전통 관습을 타파해 팀을 결속시킨 혁신을 칭찬한다. 그건 사실이다. 히딩크 감독은 다른 모든 유럽 감독들이 하는 바로 그것을 했을 뿐이다. 그는 대표팀의 모든 선수를 능력에 따라 동등하게 대했다.

덕분에 놀랍도록 도전적인 박지성은 2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홍명보나 황선홍, 설기현과 같은 노장 선수들과 똑같은 책임감과 특권을 가졌다.

한국인들에게는 이것이 혁신적일지 몰라도 나머지 다른 세계 축구계에서는 이미 뚜렷한 현상이다. 펠레는 17세 때 브라질 월드컵대표팀에 뽑혔고 호나우두와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도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언도 18세에 대표팀 주전이었다.

우리가 지켜봤듯 히딩크 축구는 순수한 네덜란드식이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을 제외하고 세계 어느 나라 팀도 양 날개가 90분 내내 달리고 수비수와 미드필더가 매 순간 상대를 압박하는 3-4-3 전형으로 플레이하는 팀은 없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이 자신의 전술을 너무도 빨리 흡수하는 데 놀라움을 넘어서 거의 충격을 받았다. 감독은 스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는 학생이기도 하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단순히 훌륭한 감독을 구하러 나선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최고의 감독을 원했다. PSV 아인트호벤, 레알 마드리드, 98프랑스월드컵 준결승에 오른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히딩크 감독의 경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대한축구협회는 확실한 비전에 차 있었다. 잘못될 경우 체면이 깎이는데도 아시아의 울타리를 넘어 나갔고 히딩크 감독을 절대 지지했다.

여러분이 선수들의 몸에 붙은 습관을 바꾸려 할 때, 선수들의 몸에 상상을 넘어서는 힘과 체력을 불어넣으려 할 때,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김남일은 “감독의 요구대로 힘을 구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며 “내가 강한 플레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했고 이제 나는 유럽 어느 선수를 상대해도 자신이 있다. 나는 상대팀 플레이메이커 사냥꾼이 됐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선수들 입에서 히딩크 감독과 똑같은 말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경험상 이 수준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체력강화가 유일한 길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끊임없이 선수들에게 주입해 왔다. 그는 비록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지만 마침내 선수들의 정신력을 바꿔냈다. 히딩크 감독은 몇 달 전 “한국 선수들은 얌전하다”며 “매력적이고 온순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부분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선수들을 좀 더 거칠게 만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상대가 승리를 강탈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 누구도 한국의 승리를 강탈하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이 사이드라인에 버티고 서서 그토록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한 그 누구도 감히 강탈을 시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게 바로 히딩크 감독이 18개월간 63명의 선수를 무자비하게 자르고 압축하고도 선수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승리를 쟁취했을 때 선수들은 감독에게 달려든다. 감독이 선수들을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다. 감독이 젊은 선수들의 병역의무 면제를 탄원했기 때문도 아니다.

바로 선수들이 가슴속 깊이, 진정으로 그를 좋아하고 믿기 때문이다. 아울러 선수들은 감독 역시 100% 그렇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게 바로 ‘경영’이다.

랍 휴스 잉글랜드 축구 칼럼니스트 robhu@compuserv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