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라깡, 응시’로 웹 검색 중 찾아낸 글입니다. 출처는 http://myhome.naver.com/ifnotso/Oasis.htm이며 <리버스>라는 웹진에 게재된 서환희 님의 글을 발췌/보관하고 있는 것이라고 운영자가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글은 서환희님의 글입니다. 원래 웹진 <리버스>에 실렸던 글인데, 웹진이 폐간되어서 임시로 서환희님의 동의없이 제 홈페이지에 보관합니다.

오아시스

당신은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다.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불이 꺼진다. 오프닝 씬이 시작됨과 동시에 당신은 영화에 빠져든다. <유로파>[1]Lars von Trier, Europa , 1991, 113min.의 첫 나레이션은 바로 이 부분을 폭로한다. “당신은 열을 셈과 동시에 이 영화에 들어간다. 열, 아홉, 여덟, . . .” <유로파>를 보는 당신은 첫 대사가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당신임을 어느새 까맣게 잊고 만다. 극장 안에서 당신은 스크린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걱정할 것이 없다. 마치 자신이 엄마의 자궁에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듯. 그렇다. 극장은 자궁과 유사하다. 컴컴한 내부, 오로지 빛은 스크린이 위치한 바로 그 쪽 방향에서만 들어온다. 태아가 장차 자기가 세계로 나갈 구멍으로부터 빛이 들어옴을 경험하듯이. 어쩌면 바로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정신분석학을 영화이론에 도입하려했던 많은 이론가들이 종종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관객과 영화의 행복한 만남이 원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안락한 상상계로 이끌어준다고 파악하였다. 하지만 영화관을 자궁이라 느끼기에는 관객들의 머리가 너무 굵어져버렸다.

1. 영화는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신체는 통일적으로 상상된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스크린-카메라 기구(apparatus)[2]이는 초기 기구이론가들이 사용했던 용어인데, 그들은 라캉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영화의 특징들이 기구의 효과라고 이해한다. J. L. Baudry에서부터 C. … Continue reading에 부착된다. 관객은 스크린에 투영된 형상들의 조합들을 자신이 본다고 믿는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세계가 곧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세계란 쇼트shot들의 다발로써, 즉 분절된 시·공간의 연속성, 통일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써 구축되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는 관객은 분절된 쇼트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의 감독은 관객이 쇼트(shot)들의 분절을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영화를 찍어야 한다.

여기서 영화의 한가지 전략이 발생한다. 관객 모르게 하기. 장르란 이러한 전략들의 전술로서 발생한 고전영화 문법과 관습(convention)이 시스템과 상호 작용의 결과로서 굳혀진 체계이다. 관객 모르게 하기의 결정적인 증거로서 쇼트/대응쇼트(shot/counter shot)체계[3]쇼트/역쇼트(shot/reverse shot) 체계에 대한 연구로는 J. P. Oudart의 Cinema and Suture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쇼트/역쇼트의 체계를 이미지와 관객의 최초 관계 … Continue reading를 들 수 있다. <국가의 탄생>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사실 <국가의 탄생>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한 남자가 목화밭에 서 있다. 그를 카메라는 꽤 멀찌감치 잡는다. (2) 그가 땅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어 그것을 본다. 이 쇼트의 대응쇼트는 (3) 어떤 손에 쥐어진 목화를 클로즈업한 쇼트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앵글은 그 손의 임자가 바라보고 있음직한 눈높이에서 맞추어져 있다. (1)→(2)→(3) 쇼트의 연속은 다음 문장의 영화적 표현이다.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관객은 이 장면을 보자마자 (1)→(2)→(3)의 연속은 망각한 채, 위의 문장만을 기억한다. 바꿔 말하자면 관객이 모르게 문장은 발화되었다.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또 다른 보편적인 예를 생각해보자. 바로 대화 장면이다. 두 등장인물 A, B가 있다. 프레임에서 A만 보이는 쇼트, 그 역쇼트(reverse shot)로 다음 프레임에 B만 나온다. 이 때 A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면, 다음 쇼트에서 B는 왼쪽으로 시선을 두어야 한다. 프레임에 A나 B만 홀로 나오는 것마저 부담스럽다면 오버 더 숄더 샷(over the shoulder shot)으로 처리해도 좋다. 이 쇼트/역쇼트 체계는 그에 대한 응용과 더불어 하나의 관습이 되었고, 영화 감독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공식, 기법으로 이해된다. 배우들이 교차되는 클로즈 업으로 보일 때 쇼트/역쇼트 패턴은 가장 유용한 해결책 중 하나이다. 이것보다 헐리우드 스타일을 더 잘 대표하는 편집전략은 없다.[4]스티븐 디 캐츠, <영화 연출론Shot By Shot>, 시공사, 1998, p. 187. 이 책은 영화를 연출하는데 있어서 공식적인 문법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 Continue reading 쇼트/역쇼트 체계에 뒤따라오는 몇가지 제작 기법들이 있는데, 이들은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을 위해 필수적이다. 180도 규칙, 가상선 규칙 등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관객과 카메라 간에 시선의 동일화를 꾀함으로써 관객을 모르게 한다. 무엇을 모르는가? 관객은 A를 바라보면서 B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한 역쇼트에서 B를 바라보게 되는데 방금 자신이 B의 시점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A의 시점으로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모르는가? 사실 관객은 안다. <국가의 탄생>에서 쇼트 (3)에 보여진 목화를 쥔 손의 임자가 쇼트 (2)의 그 남자라는 사실을 관객은 안다. 그 손의 임자가 쇼트 (2)의 그 남자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지만, 관객은 너무나도 당연히 안다. 왜냐하면 관객은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문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쇼트 (3)이 보여지고 난 후에야 문장이 완성된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은 쇼트 (2)에서 이미 문장 구조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문장의 빈 틈, 구멍을 채워 줄 요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또한 이미 한계지어져 있다. 왜냐하면 관객은 쇼트 (2)에서 이미 쇼트 (3)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쇼트에서 관객은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그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쇼트 (3)에서 성취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쇼트 (3)을 욕망한다. 쇼트 (2)에서 문장의 주-술-목 구조의 랑그는 이미 구축되어 있으며, 쇼트 (3)에서 기대되는 것은 발화된 파롤이다. 영화는 쇼트 (3)을 욕망한다. 따라서 영화는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고 말할 수 있게된다. 이 말은 관객이 영화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는 말과 매우 동일하다.

영화는(관객은) 관객이(영화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는 진술은 라캉에게 있어서 mOther-child unity의 구조와 유사한 영화와 관객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나는 라캉의 용어를 연상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채로 screen-spectator unity, 줄여서 “ssun”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ssun은 sun이라는 단어와의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그 보다 강렬한 발음으로 인해 뜨거운 태양을 연상시킬 것이다. 이는 곧이어 등장할 oasis라는 개념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이 용어 자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영화를 보는 관객을 의미하기 위해서는 주로 audience를 사용한다. 하지만 시각적 동일화를 강조하려는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면 ‘보다’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spectator가 더 적절할 것이다. 아울러 spectator가 다소 ‘멍하니 보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직 주체화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은 child에 조응될 수 있다(물론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은 mOther-child unity를 통해 아이가 어떻게 대타자(the Other)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5]대부분의 라캉 해석자(특히 국내의)들은 mOther-child unity에 거의 주목하지 않고 거울단계-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을 통해 주체화 방식을 설명하곤 … Continue reading mOther-child unity는 논리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전 시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다른 맥락으로 설명된다. 아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엄마를 욕망하게 된다. 아이는 엄마가 자신만을 욕망하기 원하는 까닭에 기꺼이 자신이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이로써 아이는 엄마와 자신의 연합체(unity)를 구성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감각-운동 조정작용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에 대한 일체의 감각이 결여된, 아직은 일종의 분화되지 않은 감각 덩어리로서의 아이는 아직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구분할 수 없는 바, 어머니의 신체를 자신의 몸의 단순한 확장으로서 여기며 그것과의 일종의 “직접적, 무매개적 접촉” 속에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관심의 사실상 전부를 아이에게 바치려 할 수도 있으며, 아이의 모든 욕구를 예상하고 자신이 아이에게 100퍼센트 접근가능하고 소용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6]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p. 55.

이 때 엄마는 대타자의 은유이다. mother의 o가 대문자로 표시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 역시 언어에 의해 결핍되고 소외된 채로 욕망하는 주체이다. 부모는 분열되어 있는 빗금쳐진 주체이다. 그들의 욕망은 모호하고 모순적이며 끊임없이 흐른다. 아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부모의 욕망을 해독하고자 노력한다. “엄마는 내게 무얼 원하는거지?”[7]같은 책, p. 54. 아이는 엄마의 욕망을 정확히 해독할 수 없는 까닭에 엄마의 욕망이 될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엄마가 욕망하는 바를 따라다녀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인 엄마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하는 쪽을 택한다.

이로 인해 아이는 분리(seperation)의 과정을 겪게 된다. 아이는 엄마의 결핍된 욕망을 찾아 헤맨다. “엄마는 내게 무얼 원하는거지?”라고 끝없이 질문하는 과정은 아이가 엄마의 결핍을 자신이 채우고자하는 관심, 즉 욕망의 과정이다. 이로써 라캉의 유명한 정식이 성립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또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Ecrit, p312)[8]같은 책, p. 54에서 재인용 이 분리의 과정은 욕망의 본성(the nature of desire)에 기인한다. 아이는 엄마의 애정을 받는 독점적인 대상이 되고자하지만, 그녀의 욕망은 항상 아이를 초과한다. 즉 아이로부터 도망치고, 아이의 통제를 넘어서는 그녀의 욕망이 존재한다.[9]같은 책, p. 59. 이로써 그들간의 unity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균열을 초래한다.

균열 자체만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에게 있어 대단히 위험한 체험이다. 균열은 대타자로부터 자신이 배제되었음을 의미하며 아이 자신이 분열된 주체임을 폭로한다. 하지만 균열은 즉시 object a 를 출현시킴으로써 분열된 주체가 자신의 분열을 무시한 채 통일감의 환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object a 는 욕망의 원인이자, 욕망의 대상이고 상징계의 도입으로 실재계의 이면에 남겨진 잔여물이다.[10]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역, 인간사랑, 1998, pp. 400∼402. object a 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대상을 지시하며, 실제로 욕망이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욕망의 원인이다. 즉 욕망을 작동시키는 어떤 대상으로서 욕망이 그것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주위를 맴돈다. 아이는 결코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으로 인해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이로써 아이의 욕망은 완벽히 만족될 수 없으며(왜냐하면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은 상징계의 기표들을 따라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단지 object a 의 주위를 맴돌면서 지연될 뿐이다. 한편 아버지의 이름이 기능하게 됨에 따라 아이-욕망(아이가 욕망하는 동시에 아이가 욕망되는)의 대상은 모두 기표들을 얻게 되어 상징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때 object a 는 기표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object a 의 지위는 아버지의 이름이 대체하게 되지만 object a 는 잔여로서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잉여이다. 하나의 기표는 모든 다른 기표들을 위한 주체를 표상하나 불가피하게 항상 잉여가 생산된다. 이 때 잉여는 라캉이 고백한 대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동일한 구조로 인해 ssun은 불가피하게 object a 를 출현시킨다. 나는 그것을 object a seen in screen, 줄여서 oasis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우선 ssun과 mOther-child unity의 동형성을 살펴보자. ssun은 영화가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는 핵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흔히들 영화를 꿈 혹은 환상에 비유해오곤 했는데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영화에 은밀히 내재하는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 때문이다.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은 관객과 카메라의 동일시라는 일차적 전술을 감행하는데 이는 ssun의 분리(seperation)에 근거한 것이다. spectator를 어두컴컴한 극장 좌석에 고정시켜 놓는다면 screen은 대타자-mOther로서 기능한다. spectator는 screen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를 기대한다. 앞서 [국가의 탄생]의 그 문장을 상기해보자.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 문장을 좀더 욕망의 차원에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혹은 안다),” 이 때 남자가 목화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쇼트 (3)에 의해 관객이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 있다. “나는 내가 (..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 이 문장은 라캉이 시선에 대해 언급했던 문장과 매우 동일하다. 그는 <젊은 파르크(La Jeune Parque)>의 대사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를 인용하면서 이 구조가 의식의 환상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그것이 응시의 구조에 기초해있음을 보여준다.[11]자크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4, 권택영 외 역, p. 207.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단지 분열된 나를 통일적으로 상상하는 그 환상의 구조에 주목해보도록 하자. “나는 내가 screen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는 문장은 자기 의식의 통일성을 ego 차원에서 상상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으며, 동시에 screen과 spectator의 분리를 암시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를 역으로 말한다면 ‘ssun에서의 분리가 곧 관객과 카메라의 동일시를 요구한다.’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문장 구조가 이루어진 후, 이 문장을 spectator가 “나는 내가 screen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라는 문장으로 전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즉 관객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쇼트 (3)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있는 목화의 클로즈업 쇼트가 예정된다. 그것도 마치 관객이 직접 보는 것 마냥. 설령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쇼트 (3)에서 그 남자가 그냥 가버리는 장면일지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문장만 다소 달라질 뿐이다.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무언가를 딴 후 바라보고는 그냥 갔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것을 보겠다.”

한편 screen을 전적으로 대타자의 자리로 위치시키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screen은 좀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screen은 분명 spectator가 주시하고 있는 대상이지만, 그에 앞서 감독, 배우, 카메라, 조명, 마이크 등등이 집중하고 있던 제작 현장의 재현이기도 하다. 감독들은 종종 관객으로부터 자신의 표현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하기도 하는데, 이 때 감독들은 저마다 자신이 상상하는 관객들을 염두에 둔다. 감독은 항상 관객의 기대를 져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인해 갈등하게 되는데, 이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screen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때 (이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감독이 가지고 있을 의도 등의 재현으로서 screen은아직 극장 좌석에 자리잡지도 않은 spectator와 대면하게 된다. screen은 자신이 바라보는 (동시에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대상과 대면한 상태에서도 관객들의 응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도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이처럼 screen은 극장 좌석 앞에 앉아있는 spectator에게 분열된 주체로서의 대타자로 기능하는데 이 때에는 mOther-child unity에서의 mOther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제작되는 시기에는 항상- 이미 존재하는 spectator 앞에 자신을 주체화시키는 child로서 역전되기도 한다.

결국 ssun은 mOther-child unity에서 연원하지만, 도식적으로 대응된 결과물은 아니다. ssun에서의 동일한 철자 ‘ss’는 그 내부에서 수시로 상호 교환되는 screen과 spectator의 관계를 반영한다. 즉, screen과 spectator는 고정된 타자-주체의 관계가 아닌, 국면마다 타자-주체의 기능을 교환하며 서로를 구성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선 극장 좌석에 spectator를 고정시켜 놓았을 때의 ssun에 주목하자.

ssun은 카메라와 눈의 동일시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동일시를 넘어서는 효과를 지닌다. 동일시를 위해, 그리고 그에 근거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ssun은 구성되지만 역설적으로 ssun이 형성되자마자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분리seperation가 일어난다. 그리고 항상 잉여를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oasis이다. object a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인지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상상적 부분대상(part-objet), 즉 몸의 나머지와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상상되는 요소이다.[12]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401. 따라서 영화의 경우 oasis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신체에서 눈(eye)이 분리된다. 이것이 카메라와 눈이 동일해질 수 있는 조건이다. 스크린에 부착되는 신체로부터 분리된 눈. ssun의 역설적인 측면을 잊지 않기 위해 한번 뒤집어서 말한다면, 카메라와 눈 사이에 시각적 동일시가 이루어지려면 눈이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하는데 이는 oasis가 없다면 가능치도 않은 일이다.

2. object a seen in screen = oasis

다시 말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 영화와 관객은 screen과 spectator로서 ssun을 형성시키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그가 카메라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영화와 ssun을 형성하는 동시에 분리(seperation)의 과정을 겪기 때문인데 그것은 아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취하게 되는 생존전략과 같다. “나는 엄마를 욕망하기에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제 나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해야 한다. 이것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영화가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고 할 때 이는 명백한 분리의 과정이다. 아이가 엄마의 욕망대상이 될 수 없듯이 영화는 관객의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없다. 카메라와의 동일시를 통해 관객의 욕망은 성취되는 듯 보이지만 순수한 지각적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고 욕망하는 대상을 봄으로써 만족되는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단지 욕망의 지연만을 획득될 뿐이다.[13]R. 웹슬리, M. 웨스틀레이크, <현대 영화이론의 이해>, 시각과 언어, 1995, p. 132.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해서는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 Continue reading 영화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영화가 결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객은 단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리라는 미래적 약속만을 획득할 뿐이다. 관객은 계속해서 “다음에는 . . ., 다음에는 . . .”하고 중얼거린다. 이 중얼거림은 중의적인데 그것은 두가지 어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에 차 말꼬리를 올리는 어조와 회의적이고 자조적인 어조.

영화가 관객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까닭은 oasis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oasis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그것이 획득 될 수 없기에 다른 대상들을 욕망하게끔 만드는 원인이다. 동시에 획득되지 않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것은 기표화되지 않는 잔여물이다. oasis는 계속 관객의 욕망대상들을 자신의 주위에 맴돌도록 만듬으로써 그것들이 영화를 통해 기표화될 수 있게끔 한다(oasis의 원형적 심상). 또한 oasis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관객이 영화와 환상fantasy을 유지하게끔 관여하는 수학소이다(oasis가 지닌 신기루의 심상).[14]라캉은 object a가 번역되지 않고 “대수학 기호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라캉 정신분석 사전>, p. 400). 한편 환상(fantasy)이란 … Continue reading

영화를 보면서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내러티브에 의해 지연된다. 관객의 중얼거림은 내러티브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쯤에서 <국가의 탄생>에서 분석한 문장을 상기해보자. 그 문장은 (1)­(2)­(3) 쇼트의 연쇄로서 구성된 것인데 자칫 오해하면 (3)쇼트에서 관객의 욕망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영화의 욕망 구조를 예시하기 위해 추출해낸 최소 단위일 뿐이며 실제 영화에서는 이보다 복잡하게 작동한다. (1)­(2)­(3)의 연쇄는 곧 (2)­(3)­(4)로 연쇄될 수도 있고, (3)­(4)­(5)로 또는 (3)­(4)­(5)­(6) . . . 등등으로 연쇄 가능하다. 이러한 연쇄의 구조는 계속해서 지속되며 마침내 영화가 종결되었을 때 (첫쇼트)―(마지막쇼트)의 연쇄 구조로 내러티브는 완성된다. “. . . 그것을 바라본다”는 문장은 마침표가 찍어지지 않은 채 다시 다음 욕망(시선)의 대상을 찾는다.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향한다                                                                                                  그리고는. ..

<시티라이트>[15]Charles Chaplin, City Light, 1931, USA, 87min.에 대한 지젝의 분석은 이토록 지연된 내러티브가 oasis의 작동 효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16]S. Zizek, <당신의 증후를 즐겨라!: 헐리우드의 정신 분석>, 한나래, 1997의 1장 “왜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시티 … Continue reading <시티 라이트>는 지젝의 말마따나 마지막 장면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이다. 이 영화 전체는 궁극적으로 마지막 종결의 순간을 준비하는 데 봉사할 뿐이며, 그 순간이 도래할 때 영화는 즉시 끝날 수 있다.(Zizek, p. 30) <시티 라이트>는 방랑자를 부자로 오해하는, 번화한 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에 대한 방랑자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방랑자는 시력을 잃은 소녀를 수술시키기 위한 돈을 어찌어찌하여 마련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다. 출소한 후 방랑자는 소녀의 주위를 맴도는데, 어느날 소녀는 창 밖으로 방랑자를 보고 장미 한 송이와 동전 한 닢을 건네주게 된다. 이 순간 그동안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멋진 왕자님이라 상상했던 소녀는 손의 감촉을 통해 방랑자를 알아본다. ①”당신이군요?” 방랑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눈을 가리키며 묻는다. ②”이제 볼 수 있나요?” 소녀는 대답한다. ③”네 저는 이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나서 영화는 소녀를 바라보는 방랑자의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컷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Zizek, p. 32)

이 영화는 방랑자의 시선에 대한 소녀의 반응을 보여주는 대응 쇼트(counter shot)를 누락시킨 채 끝을 맺는다. 그리고 “소녀가 그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통상적인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희망과 떨리는 불안으로 소녀를 바라보는 방랑자의 쇼트에 대한 부가적인 대응 쇼트가 필요하다. 방랑자를 받아들이는 소녀의 모습이던지, 두 사람이 다정하게 포옹하던지.(Zizek, p. 40)

소녀가 ①을 말하며 방랑자를 본다

                             방랑자가 ②를 말하며 소녀를 본다

소녀가 ③을 말하며 방랑자를 본다

방랑자가 소녀를 본다

그리고는…어? (끝)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에 구두점을 찍으면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관객은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지연시킴으로써 환상을 유지시켰으나 <시티 라이트>는 그 기대를 과감히 져버린 채 관객의 환상이 oasis의 작동효과였음을 폭로한다(oasis가 폭로되는 것은 아니다). 관객들은 내러티브를 경유하며 마치 자신의 욕망이 충분하게 만족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는데, 그것은 다만 oasis가 은폐됨으로써 절반으로 분열된 주체가 자신의 통일성을 상상한 결과였을 뿐이다. 채플린의 위대함은 관객의 욕망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영화에서 전유했다는 데 있다. 분명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에 소녀의 대응 쇼트를 마지막에 첨가함으로써 관객의 환상에 봉사하는 해피엔딩의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영화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시티 라이트>에서 행복한 해피엔딩을 맞이하더라도 관객의 환상은 여전히 oasis의 작동 효과일 뿐이다. 해피엔딩을 위해 삽입될 소녀의 대응 쇼트는 단지 내러티브를 둥그렇게 말아 영화의 처음과 끝을 꼬아 붙인 띠를 만들어낼 터인데,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이다.[17]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p. 186. 각주 13의 그림에서 환상의 수학소 $◇a는 아래 뫼비우스의 띠에서 a와 b가 만나면서 형성하는 것이다. 대응 쇼트가 있는 <시티 라이트>는 닫힌 체계의 영화이다. 반면 대응 쇼트가 부재한 <시티 라이트>는 열린 체계의 영화인데, 이렇게 말함으로써 채플린이 감독으로서 지녔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해석틀을 통해 분석할 수 있는 작품으로 채플린의 또 다른 수작 <독재자>[18]Charles Chaplin, The Great Dictator, 1940, USA, 126min.를 들 수 있다. <독재자>는 히틀러와 유사한 외모를 지닌 한 유태인 이발사가 겪는 좌충우돌 코미디이다. 영화 말미에 이 이발사는 히틀러로 오해를 받아 연단에 서게된 나머지 연설을 요구받는다. 그는 인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장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씬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동적이지만 그야말로 장황한 이발사의 (채플린의 의도가 집약되어 있는) 연설 장면은 굉장히 긴 시간동안 지속되는데 이를 통해 방금 전까지 관객들을 웃긴 코미디적 요소들은 완전히 무화되고 만다. 연설 장면으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하는데 관객이 연설에 감동 받아 코미디 내러티브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던가, 아니면 긴 연설장면을 참아내지 못하고 지루해 하거나. 두 가지 모두 내러티브 지연을 통해 구축된 관객의 환상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 채플린은 이것도 모자라서 이발사의 장황한 연설장면에 대한 대응 쇼트를 생략시켜 버린다. 우리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발사의 연설로 영화 속에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즉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대오각성을 했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다. 이는 애매함으로 남아있다. <시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가졌던 환상이 oasis를 둘러싸고 맴도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환상을 빚어냈던 내러티브에 의한 지연된 욕망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최근 흥행 영화 <글래디에이터>[19]Ridley Scott, Gladiator , 2000, USA, 154min.를 살펴보자. <글래디에이터>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인 영화이다.[20]흥미로운 사실은 지젝 역시 앞서의 책에서 히치콕의 <로프Rope>를 헤겔적인 영화라고 말한다는 점이다(Zizek, p. 53). 맥락은 다소 다를지라도 … Continue reading 콜로세움에서 최후의 검투를 벌여야 하는 막시무스와 코모두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최초의 두 인물과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의 위대한 장군이었다가 정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코모두스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고 검투사로 전락한 막시무스는 콜로세움에 자리를 잡은 로마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음으로써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한편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로마 황제에 등극한 코모두스는 자신의 결핍된 정통성을 은폐하기 위해 지금으로 보자면 일종의 3S 정책인 검투 시합을 부활시킨다. 그는 금지되었던 검투 시합을 부활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안정적인 통치를 꾀하려 한다. 막시무스와 코모두스의 관계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최초 두 인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변증법>에서의 두 인물은 자기 의식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죽일 수 없기에 주인과 노예로 남는 반면 막시무스와 코모두스는 그들을 인정해줄 로마 시민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기에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숨막히는 검투 장면 사이사이로 흥분한 로마 시민들의 모습들이 교차 편집된다. 하지만 정작 막시무스가 코모두스에게 승리하고 영화를 마쳐야만 할 때 로마 시민의 대응 쇼트는 부재한다. 대신 아주 높은 곳에서 콜로세움의 전경을 찍은 쇼트로 마감하는데, 이 쇼트 내에서 로마 시민들의 표정은 뭉뚱그러져 있어 그들의 반응을 알아볼 수가 없다. “콜로세움에 자리했던 로마 시민들은 검투 시합의 승리자에게 환호를 보낼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황제를 살해한 반역자를 처단할 것인가?”

하지만 이 물음은 <글래디에이터>를 관람한 관객에게는 과도해 보인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막시무스가 승리하는 동시에 이미 환상을 닫힌 체계로 구성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러티브적 논리는 막시무스가 로마 시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기 위한 아슬아슬한 게임을 펼치지만, 사실상 막시무스의 자기 의식을 인정해주고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줄 수 있는 (이미 빗금쳐져 있는) 주체는 로마 시민이 아니라 관객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마치 <국가의 탄생>의 문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콜로세움에 자리 잡은 로마 시민들은 바로 관객 자신이다. 이는 결코 비유가 아니다. 뭉뚱그려진 로마 시민들의 표정은 관객의 시선에 앞서 존재하는 응시(gaze)가 돌려보내는 한 점이다. 그것은 얼룩stain이다. 감독은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숨김으로써 응시를 은폐한다. object a 는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통해 발생되는데 이를 영화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oasis는 screen을 바라보는 spectator의 시선과 screen에 의해 돌려받은 spectator의 응시간의 분열을 통해 발생하다. oasis는 이 응시를 숨기면서 관객에게 자신을 통일된 주체(실상은 ego차원에서의 통일감일 뿐이다)로 상상하는 환상을 제공한다.

방금 전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물었던 질문은 이 얼룩을 물었던 것으로서 곧 관객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던진 문제제기이다. 이는 마치 비례항 공식과 같다. a : b = x : c일 때, b = c라면 a = x이다. a는 screen, b가 screen 속의 로마 시민, c가 spectator라고 할 때 x 는 결국 다시 screen이 된다. 따라서 로마 시민의 반응을 물었던 질문은 곧 screen과 spectator간의 관계 자체에 대한 재설정을 요구한다. 이 질문은 실재계와의 만남(encounter with the real)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능한 것이며, 자신의 환상이 oasis의 효과였다는 사실을, 자신의 응시를 돌려받고 있음을, 즉 자신이 분열된 주체임을 인지하는 순간 가능한 것이다.

oasis를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이해해야 한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한 언급들을 발췌 요약해 본다.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응시이다.[21]자크 라캉, <욕망 이론>, p. 195.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한 설명은 위 책의 3부 “시각예술이론”을 주되게 참조할 것이다. 이 책의 3부는 Four … Continue reading 응시는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보여진다.(Lacan, p. 194) 시선과 응시는 이율배반적인 관계이다. 바라보는 시선은 주체의 것인 반면 응시는 대상쪽에 있어서 그 둘 사이에는 일치나 공존이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결코 나를 볼 수 없기”때문이다.[22]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214. 시각의 영역에 욕동(drive)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시선과 응시의 분열이다.(Lacan, p. 195) 시각의 영역에서는 응시가 외부에 존재하고, 나는 보여진다. 즉, 나는 그림이다.(Lacan, p. 237) 세계 속에서 우리는 보여지는 존재들이다. 세계는 모든 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에게서 응시를 촉발하지 않는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strangeness) 역시 시작된다.(Lacan, p. 198) 내가 보는 것 속에는, 나의 시선에게 열려 있는 것 속에는,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지점, ‘아무 의미가 없는’ 점, 즉 그림의 얼룩stain으로서 기능하는 점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그 그림이 응시를 돌려 보내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지점이다.(Zizek, p. 57) 의식의 자기충족성이란 의식이 스스로를 발레리의 젊은 파르크(Young Parque)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식의 자기충족성에는 응시의 기능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Lacan, p. 197)

의식의 자기충족성은 응시가 은폐되면서 형성된 나르시즘이다. “나는 나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말은 응시가 은폐된 의식의 환상인데, 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겨냥한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주체는 응시를 은폐시킨 채 ‘나는 사유하기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절반짜리의 분열된 주체이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통해 욕망이 발생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욕동(drive)이 발견된다. 욕동은 욕망의 부분적인 발현으로서 결코 만족될 수 없고, 한 대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주위를 계속해서 맴도는 것이다.[23]같은 책, p. 275. 이로부터 object a의 특권적 지위는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욕동을 돌게 하는 것으로서의 object a.

3. 소결

이제 <글래디에이터>에서 관객의 반응을 묻는 질문이 곧 관객 자신을 향하는 질문이었다는 말은 물론, [국가의 탄생]에서의 전화된 문장 또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제시되었던 그 문장은 비록 투박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제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졌을 것이다. “나는 내가 (. . .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는 문장에서 구멍난 목적어의 자리를 채우는 쇼트의 연쇄는 곧 주체의 시선을 담보해줌으로써 응시를 은폐하고자 한다. 그렇게 환상은 구축되어지고 유지되며, 동시에 이미 유지되어진 채 구축된다.

‘관객 모르게 하기’의 전략은 사실상 영화가 ‘관객이 아는 바를 안다’는 사실을 관객이 모르게끔 하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자신의 응시를 영화로부터 돌려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의식 속에 빠뜨려도 무관하다. 아니, 빠뜨려야 한다. 이것이 감독이 그토록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지 않도록 지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사실이 발각되는 순간, 영화는 자신이 떠맡을 수 없는 짐, 관객이 진작에 떠맡았어야 하는 짐을 지게 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몇몇 영화들은 그 짐을 기꺼이 떠맡고, 더 나아가 해체해버리려고도 하지만 그 영화들 역시 관객들이 지니는 의식의 환상을 전적으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환희

각주

각주
1 Lars von Trier, Europa , 1991, 113min.
2 이는 초기 기구이론가들이 사용했던 용어인데, 그들은 라캉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영화의 특징들이 기구의 효과라고 이해한다. J. L. Baudry에서부터 C. Metz까지. 후에 Metz는 이를 넘어선 데까지 나아간다. (R. 웹슬리, M. 웨스틀레이크, <현대 영화이론의 이해>, 이영재·김소연 역, 시각과 언어, 1995, pp. 112∼117.)
3 쇼트/역쇼트(shot/reverse shot) 체계에 대한 연구로는 J. P. Oudart의 Cinema and Suture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쇼트/역쇼트의 체계를 이미지와 관객의 최초 관계 속에서 균열을 봉합하고 영화적 담론을 상상계 내로 제한하는 역할로서 이해하는 데, 곧 심각한 반론에 부딪힌다. 하지만 나는 쇼트/역쇼트 체계를 포함하는 쇼트/대응쇼트(shot/counter shot)로서 영화와 관객의 욕망을 밝히고자 한다.
4 스티븐 디 캐츠, <영화 연출론Shot By Shot>, 시공사, 1998, p. 187. 이 책은 영화를 연출하는데 있어서 공식적인 문법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대부분의 내용들을 영화의 시각화 전략들에 있어서 각종 전술들을 기술한 일종의 병법서이다. 나는 이 책이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에 대한 병법서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책은 이 책 외에도 물론 많다.
5 대부분의 라캉 해석자(특히 국내의)들은 mOther-child unity에 거의 주목하지 않고 거울단계-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을 통해 주체화 방식을 설명하곤 하였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도식적 이해, 실재계의 무시 등으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김형효,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1989의 4장 “라캉과 무의식의 언어학”을 보라.)
6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p. 55.
7 같은 책, p. 54.
8 같은 책, p. 54에서 재인용
9 같은 책, p. 59.
10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역, 인간사랑, 1998, pp. 400∼402.
11 자크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4, 권택영 외 역, p. 207.
1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401.
13 R. 웹슬리, M. 웨스틀레이크, <현대 영화이론의 이해>, 시각과 언어, 1995, p. 132.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해서는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Ⅲ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나는 이를 잠시 후에 살펴볼 것이다.
14 라캉은 object a가 번역되지 않고 “대수학 기호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라캉 정신분석 사전>, p. 400). 한편 환상(fantasy)이란 object a 와 분열된 주체와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지는 것인데 이로써 그/녀는 환영적인 전체감(phantasmatic sense of wholeness), 완전함, 충족감 등을 얻을 수 있다(Fink, Lacanian Subject, p. 60). 아래 [그림1]은 분리(seperation)를 함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a는 환상의 수학소이다.

[그림1]

Subject       Other

   ↙   ↘      ↙   ↘

ego     ◇    a       $

15 Charles Chaplin, City Light, 1931, USA, 87min.
16 S. Zizek, <당신의 증후를 즐겨라!: 헐리우드의 정신 분석>, 한나래, 1997의 1장 “왜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시티 라이트>에 대한 분석에서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을텐데 이 책을 인용할 시(Zizek, page)방식으로 표시하겠다.
17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p. 186. 각주 13의 그림에서 환상의 수학소 $◇a는 아래 뫼비우스의 띠에서 a와 b가 만나면서 형성하는 것이다.
18 Charles Chaplin, The Great Dictator, 1940, USA, 126min.
19 Ridley Scott, Gladiator , 2000, USA, 154min.
20 흥미로운 사실은 지젝 역시 앞서의 책에서 히치콕의 <로프Rope>를 헤겔적인 영화라고 말한다는 점이다(Zizek, p. 53). 맥락은 다소 다를지라도 <글래디에이터>에 대한 나의 분석과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는데, 한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지젝의 글을 읽기 전에 이 영화를 보았으며 보자마자 헤겔적인 영화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나는 지젝을 무단 도용했다는 혐의를 입고 싶지 않다.
21 자크 라캉, <욕망 이론>, p. 195.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한 설명은 위 책의 3부 “시각예술이론”을 주되게 참조할 것이다. 이 책의 3부는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 Alan Sheridan, New York & London : W. W. London & Company, 1981 중 pp. 67∼119의 네 편의 논문을 국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시선은 eye의 번역어로, 응시는 gaze의 번역어로 선택되었는데, 지젝은 앞서의 책에서 eye 대신 view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역자는 이를 조망이라고 번역한다. 한편 ‘라캉 정신분석 사전’에서는 gaze를 시선이라 국역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욕망 이론>의 국역에 따를 것이다.
2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214.
23 같은 책, p. 275.

위선을 혐오하는 지식인 김규항

‘그 페미니즘’ ‘그놈들과 그년들’이라는 칼럼으로 페미니즘 진영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김규항씨를 만나 그에 대한 입장과 월드컵에 관한 생각, 최근의 정치흐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고종석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장함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 비장함이 글의 주제와 어울려서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때 비장함은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비장함은 그른 것이다. 김규항 글의 비장함은 대체로 옳고 좋은 것 같다. 그가 칼럼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개 진지한 것들이고, 그 비장함이 실릴 때 김규항의 메세지는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번의 그 칼럼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이번엔 그 비장함이 그르거나, 나빴던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지식인들이 숭배하는 그 어떤 서구의 석학들로부터도 건질 수 없었던 그 어떤 소중한 깨달음을 김규항에게서 자주 얻는다. 김규항의 글을 꿰뚫는 한 가지 중요한 정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위선에 대한 강한 혐오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김규항은 위선을 아주 혐오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보충설명했고, 그 글이 애정에서 비롯된 비판이었다는 것과 ‘그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어떤 페미니즘과는 더 확실히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김규항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지승호(이하 지) – 예전에 쓰신 글 중에 “(98년 프랑스 월드컵때) 월드컵은 이 나라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불편했다. 하지만 4년에 한번씩 온 나라가 ‘짜고 미치는’ 축제에 파시즘의 혐의를 둘 수는 없었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월드컵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규항(이하 김) – 비슷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월드컵에 흥분하고 열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지만, 그런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국가주의로 몰고가거나 장사에 이용해먹으려는 데는 비판적입니다.

–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보셨습니까? 거기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이 상당히 과격한 반발을 했는데요.

– 꽤 광범위해 보였지만 그런 반발이 보편적인 건 아닙니다.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이 민주적인 분위기를 만든다고들 하는데,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게 되는 측면이 좀더 강합니다. 저는 사랑방의 논평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랑방의 첫번째 논평이 대중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세심하게 드러내야 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진지하게 읽었다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논평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 민족이 어떻고 국운이 어떻고 미쳐돌아가는 일방적인 상황에서 나왔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논평이 편향되었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편향된 얘깁니다.

– 저한테는 그것이 소수의견을 무시하거나, 탄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 같아 씁쓸하던데요. 그런식으로 다수의 힘으로 말을 막거나 말하기 무섭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집단주의적인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집단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익명성에 숨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우 특정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오늘의 월드컵은 일종의 ‘주술’입니다. 우리보다 근대적이라는 나라 사람들도 별다른 게 없구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따져가며 행동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 더 심한 나라들이 많죠. 영국도 그렇고.

– 대중들이 월드컵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건 그들이 그만큼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람 누구도, 자랑스러운 나라의 기준이 축구 순위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고단한 삶 속에서 참으로 오랜 만에, 다시 오지 않을 환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 환희와 열광이 본격적인 국가주의로 가는 데는 의식성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라는 이들이 대거 그 짓을 했습니다.

– 사실 축구가 영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시작됐고, 요즘의 월드컵은 국가주의보다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축구가 원래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자본이 그렇게 사용해왔습니다. 물론 그건 축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월드컵과 축구를 분리해서 보고 싶습니다. 오늘의 월드컵은 단지 자본의 잔치이지만, 그럼에도 월드컵 속의 축구는 여전히 아름답고 정직한 육체의 향연입니다. 누구든 국가니 민족이니 하지 않고도 월드컵 속의 축구를 즐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경우가 다릅니다. 그들은 월드컵의 본질이 뭔지 잘 알고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버린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그걸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소위 강-진논쟁(강준만, 진중권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논란이 많은데요. 강준만을 지지하는 측은 ‘진중권의 예의없음이 지나쳤다’고 하고 진중권을 지지하는 측은 ‘할 수 있는 문제제기에 대한 과도한 대응이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 제대로 읽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노무현이 김영삼 만나고 할 때, 강준만선생이 노무현이 YS를 만난 것이 YS의 반성을 유도한다면 좋은 것일 수 있다 뭐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강선생의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존중하지만 그 말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중권씨는 나름대로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좇는 건 좋은데, 자신보다 왼쪽의 입장은 모조리 닭짓이라 한다거나 자신만이 옳다는 식의 태도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여튼 두분의 갈등은 선거와 관련해서 일어났는데, 두분이 선거에 열중하는 건 좋은데 자신들이 단순한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보편성을 좇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선거운동원이라면 해당 선거의 결과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만 지식인은 좀더 장기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테니까요.

– 강준만 교수를 ‘근대화의 기수’라고 평가하신 적이 있으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에 대해 도덕적 순결주의를 벗어나 시장과 언론 같은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라는 의견은 이치에 맞지 않는 무리한 훈수이며,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그것 역시 민주당 편향의 정치성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 ‘강준만’이라는 글은 강준만 선생을 비판한 게 아니라 강준만과 나는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걸 다르다고 했을 뿐이지요. 그런 얘길 굳이 하게 된 건 강준만의 활동을 존중하는 일과 강준만의 이념을 존중하는 일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의 언론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일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일은 다르다는 겁니다. 언론개혁 운동이란 현실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현실을 좀더 합리적으로 만드는 운동입니다. 강선생은 제 이런 말에 마땅치 않아하시는 것 같은데 이건 서로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언론개혁운동을 무시해온 것도 아니었구요.

– 강진논쟁에 관련해서 강준만 교수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에 3개월째 진중권에 관한 글이 나가고 있고, 무크지에서도 절반 가까운 분량으로 진중권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간 그렇게까지 공격받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공격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 비판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내용이 문제겠지요.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강선생은 오래 전부터 그런 얘기를 신물나게 들어왔습니다. 말은 맞는데 말하는 방식이 거칠다느니(웃음) 그런 비판은 언뜻 공감을 주지만 실은 가장 너절한 것입니다.

진보적인 남성으로 여성운동에 대한 공격이 쉽지는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인데요.

– 편하게 얘기하세요(웃음)

– 주위에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더 짜증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그런 글을 쓰게 된것은, 최보은씨와 같이 ‘쾌도난담’을 진행하면서 느낀 불편함 때문은 아니었습니까?

–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그 글은 최보은씨를 대상으로 쓴 게 아닙니다. <씨네21>에 실린 최보은씨의 ‘그 페미니스트 입 열다’라는 기사도 그런 컨셉이던데, 제 글을 제대로 안 읽어서 그렇겠지요. 최보은씨와 안지 오래지만 저는 그가 어떤 일관된 논리를 가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장점이 참 많은 사람인데 유독 여성문제에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고 개인적으로 그건 그가 자신의 체험에 매몰되어 있어서라 생각해왔습니다. ‘박근혜 지지’ 발언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최보은답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글을 쓴 이유는 최보은의 발언이 아니라 최보은의 발언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반응 때문입니다. 최보은의 발언은 페미니즘의 대의를 망칠 만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뜨겁게 얼싸안았다 그 심정을 잘 안다는 식의 정서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었지요. 저는 그런 반응이 한국 페미니즘의 오늘 상태를 전적으로 대변하진 않더라도 매우 강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염려하는 분들은 그러게 뭐하러 페미니즘을 건드렸느냐고도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 지경에서도 아무도 그런 얘길 안 했다는 게 희한할 뿐입니다.

– 김어준은 "규항이형의 말이 옳지만, 아직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배려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했는데요.

–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듣기 좋은 말이 페미니스트들의 기분을 낫게 만들어주는 것 외에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페미니즘에 실재하는 문제를 비판하는 건 바로 페미니즘을 위한 일입니다.

– IF의 이숙인은 “지적한 부분이 어떤 사회운동에게도 있는 딜레마인데, 왜 유독 여성운동에서만 맵고 독하게 작용하는가?”하고 반문했는데요.

– 저는 한국 사회의 판관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권리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순위를 매길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저는 김지하 선생님이나 이현주 목사님도 비판했는데 그분들은 제 청년기의 소중한 스승들이고 여전히 존경합니다. 저는 페미니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 게 아니라, 단지 페미니즘 문제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운동입니다. 제 생각에, 모든 운동엔 두가지 필수적인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둘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입니다. 자부가 없으면 운동은 비루해지고, 겸손이 없으면 운동은 빗나갑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자부만큼 겸손을 갖는다면 그런 반문은 안 해도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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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체험에는 무지하거나 자신이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은 ‘아픈 체험의 연대’ 이기도 합니다.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온갖 억울한 체험들이 페미니즘의 바탕에 정서적으로 깔려 있지요. 신분이나 처지가 다름에도 남성쪽의 공격에는 자연스럽게 뭉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실재하기에, 그건 당연한 것이고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이 페미니즘을 빗나가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험이란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강한 확신을 갖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을병 걸렸다 살아난 기독교인이나, 가족을 빨갱이에게 잃은 사람은 기독교나 이념에 대해 심각한 아집을 갖게 됩니다. 그런 아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긴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표현될 땐 엄격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얼마 전 최보은과 가깝고 저와도 아는 사람을 얼마 전 만났는데, 자기는 개인적으로는 최보은을 비판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회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공중 앞에 제출하는 의견이기에 엄격해지는 겁니다.

– 그렇다면 박근혜 지지론을 반대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 저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좌제는 누구에게 사용되어도 연좌제입니다. 제가 박근혜를 반대하는 건 그가 박정희의 정치적 딸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부터 대통령 후보로 성장하기 까지 박근혜씨는 철저히 박정희의 아우라를 사용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박근혜 지지를 논리적으로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건 아까 말한대로 ‘아픈 체험의 연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한 심정을 나는 이해한다,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 체험이 다른 체험을 무시할 권리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30여년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수사 받다 죽은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이 타살로 여겨지며,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유족들은 즉시 국가와 당시 중정부장 등을 상대로 10억원의 배상 소송을 했지요. 그런데 그들이 승소해서 10억을 받는다고 한들 30년 동안 지속되는 그 아픈 체험이 배상될 수 있습니까. 최종길씨의 가족들에도 물론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데, 박근혜 지지 발언에 공감한다는 여성들은 과연 그 여성들 앞에서도 ‘여성의 이름으로’ 박근혜 지지를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기 바랍니다. 그들이 그 발언을 분명히 반성하지 않는 한 그들은 여성의 적이고 치마두른 마초들입니다. 이 생각은 전혀 타협할 뜻이 없습니다.

–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각하시면서 고민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 후 주변 여성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 개인적으로는 받은 이메일은 공감한다는 쪽도 많았는데, 다들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어렵다더군요(웃음) 통쾌했다는 남성 편지엔 ‘너 같은 마초 새끼 좋으라고 쓴 게 아니다’라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지요. 한 여자 선배는 대학 선생이고 진보정당 쪽에서 여성위원장 제의도 받고 하는 분인데, 어디서고 제 얘기 나오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설명한다더군요. 아내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민주적인지, 딸을 얼마나 당당하게 키우는지, 아들에게 올바른 성의식을 길러주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등등. 저보다 더 억울해 하면서.(웃음) 서준식 선생은 저를 옹호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면 판이 이상하게 될 것 같다고 웃으시더군요. 제가 부디 품위 유지하시라 했습니다. 하여튼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친 셈입니다. 아내에게도 그렇고.

– 야간비행에서 서준식 선생님의 책을 출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네. 서준식 옥중서한(1971-1988), 850페이지 짜리 양장본입니다. 이 놈들아 이게 바로 책이다 하는 마음으로 냅니다. 때론 객기가 소중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이 될만한 책입니다.

– 권혁범 교수가 ‘노력하는 마초’라는 말에 대해 ‘인종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처럼 모순적이다. 여성주의에 절대적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무지 혹은 근원적 거부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 무슨 말이 그렇게 어렵고 거창한가요 노력하는 마초라는 건….

– 전 일종의 겸손의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 그렇죠. 자괴감의 표현입니다. 아까 여성문제에 대해 듣기 좋은 말 하는 게 오히려 더 무성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자지라는 성기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억압자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저는 여성문제에 협조적이라고 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남성도 보기 민망합니다. 과연 제 세대쯤 되는 남성이 아무리 노력한들 수십년 동안 체화된 마초적 습속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나쁜놈들일 뿐입니다. 제 글에 분노한 여성들이 그 말을 오해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남성인 권혁범씨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가 과연 ‘세상의 온기와 냉기를 직접 느끼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 무지했기 때문에 용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도 여성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발언하지 않는 상태에서 옳든 그르든 간에 비주류에 대한 진지한 반론을 해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화파트너로 인정해줬다는 거죠.

– 멋진 분이군요. 그쯤 되어야 마초들이 위협을 느끼지요.(웃음)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약자의 태도를 벗어나길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는가 몰라주는가 만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건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태도이지 싸우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남성들에게 값싸게 이용됩니다. 은근슬쩍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우호적인 남성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죠. ‘그 페미니즘’ 이런 거 쓰면 구제 받기 어려운 마초 취급을 받는 거구요. 알다시피, 제 또래 이상의 한국 남성들은 보수고 진보고 할 것없이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워낙 그렇게 교육되고 관습이 되어서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편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놈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건 여성들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들을 무서워 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여자들에게 욕먹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성가셔서일 뿐이지요. 상대를 업신여길 때는 절대 비판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지하는 정당은 있으십니까?

김- 없습니다. 제 이념은 사회당이나 민노당 좌파에 가깝겠지만, 한 당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현재의 진보정당이 실재하는 진보 이념을 포괄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싸잡아 의회주의라 폄하하는데도 반대합니다. 저는 민주당 후보를 염두에 둔 당선 가능성 운운은 우습게 생각하지만,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 문제엔 관심이 많습니다. 민노당 우파라 해도 보수 후보가 되는 것보다는 백배 낫기 때문입니다.

– 강준만 교수 같은 분은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 강선생은 실용주의자이고 스스로 그렇게 자처하는 분입니다. 실용주의자는 옳은 것보다는 가능한 것을 좇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 분의 역할이고 저는 그걸 존중합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이 실용주의자라면 제도 정치권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강선생은 최악과 차악의 차이에 집중하는 분이라면, 저는 차악과 선한 것의 좀더 근본적인 차이에 집중합니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이 단기적인 문제에 성실하게 집중하니까 저 같은 사람이 좀더 장기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 조중동을 옹호하기 위해 볼테르의 말까지 인용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요즘 언론인들에 대한 고소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홍세화 선생이 사람 하나 버려놓았군요 (웃음)

–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회창이 되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니들 땜에 이회창이 됐다’는 비판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는 니들한테 양보하려 존재하느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기본 입장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태도로 볼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몇 년 후 한국이 남미 꼴이 될 가능성이 좀더 높다는 게 사실 걱정입니다. 정태인씨는 그런 이유에서 노무현을 돕겠다고 하던데, 요즘 노무현씨 하는 것 보면 돕기도 쉽지 않겠더군요. 노무현의 새로운 적은 바로 노무현입니다.

– 폭주족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폭주족에 대한 사회적인 적의는 지나치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어떤 영화를 보니까 폭주족에 짜증을 내던 택시 승객이 그 폭주족이 사고로 죽자 ‘그 놈 참 잘 뒈졌다’고 말하더군요.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이나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 저도 오토바이를 오래 탔습니다만, 폭주족은 두가지죠. 할리데이비슨 타는 귀족 폭주족과 125씨씨 이하 타는 하층 폭주족. 우리가 말하는 폭주족은 대개 후자고 그 비판엔 하찮은 놈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데 대한 계급적 경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계급적 경멸을 기반으로 하는 폭주족에 대한 비판이 전국민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중파 뉴스 같은 데서 폭주족이 어떻고 떠드는 것을 보면 비위가 상합니다. 그들이 뉴스 시간 30분 동안 저지르는 범죄는 어떻습니까.

– 그 아이들이 정말 나쁜 짓을 하려면 강도를 하지 않을까요?(웃음)

–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미래나 꿈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제 아무리 막되어먹고 불량한 사람도 품위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게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는 순간 사람은 파행하게 됩니다. 점잔 빼는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그게 정말 청소년을 위하는 건지, 청소년을 통제하자는 건지, 아니면 범죄자들에 대해 복수하자는 건지 헷갈릴때가 있던데요.(웃음) 성폭행 같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그런 측면이 없지 않나하는 우려도 있구요. 몇몇 사람을 단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요.

–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명단 공개는 반대합니다. 인권 문제이고, 인권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입니다. 사실 원조교제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건 성인 남성과 10대 여성의 사랑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인지 매매춘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연애라 해도 나이 더 먹고 돈버는 사람이 비용 내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따지고 들면 오늘의 결혼제도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 공인된 매매춘입니다.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남성에게 평생 동안 독점적인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약이지요. 10대 소녀들이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줄 생각은 안 하면서 명단공개 같은 선정적 단죄를 사용하는 건 구조적인 문제를 감정적으로 감추려는 위선입니다.

– 과격한 일부 영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지나친 피해의식 탓인지, 빠져나갈 구멍도 주지 않고, 몰아 붙이거나, 인간으로서 당연히 고마워해야할 호의를 베풀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준식 선생님 같은 분도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잖습니까? 조직보위 논리니 뭐니 얘기할 진 몰라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앞으로도 계속 해야할 사람이기도 하구요) 농담 한마디로 매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장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 아까 말했듯 우리를 알아주는가 몰라주는가에만 집착하는 건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얻을 수 있는 건 심리적 위안뿐이지요. 운동이란 그 운동에 이미 동의하는 사람들끼리의 한풀이가 아닙니다. 그 운동에 찬성하지 않거나, 회의하는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끌어들여 세를 늘이는 게 운동이지요. 후배가 월장 회원들이 제 글을 비판하는 토론기사를 보내주어 읽어보았는데, 경박한 마초 흉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그들은 경박한 태도를 당당한 태도로 착각합니다. 운동은 인간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운동 사회의 성폭력 문제 거론 할 때 조직보위논리를 많이 공격합니다. 저는 그런 공격이 정당하다 생각하지만, 페미니스트 자신들도 조직보위논리에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박근혜 지지 발언에 대한 두리뭉실한 반응도 결국 그런 경우지요.

월장논쟁 같은데서의 남성들의 반응에 대해 ‘악성마초’라고 하셨는데요.

– 그랬습니다. 하지만 월장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개입니다. 싸우는 여성들의 목표는 남성들의 권력을 빼앗아 남성이 누리던 것을 누려보는 게 아니라, 남성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좀더 품위있는 여성의 정신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드는 게 아니라면 페미니즘이 존재할 이유도 지지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로 노출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 일반적인 게 꼭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가정 폭력은 알다시피 대부분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정 폭력이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인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저희 아버님 동네 수퍼 아주머니가 남편을 폭행해서 죽였습니다. 이웃 아주머니들 얘기가 뭐냐하면 평소엔 저녁부터 때리더니 그날은 아침부터 때리더라였습니다. 저는 이런 특수한 예로 일반적인 상황을 뒤집겠다는 게 아니라, 가정 폭력의 핵심은 생리적 남성에 의한 생리적 여성의 폭력이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피억압자의 폭력이라는 겁니다. 그걸 잊고 감정적으로 매몰되면 박근혜 지지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 홍세화씨와의 대담에서 ‘신세대가 어찌 보면 늙었다. 제도권 게임의 법칙을 일찍이 파악해 냉소적으로 산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월드컵때 20대가 우리의 패배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였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우려되는 부분이 그런 부분인데요.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전세계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집단주의로 흐를 우려 역시 있고.

– 제가 대중들을 열심히 옹호했으니 이면도 얘기해야겠지요.(웃음) 아까 말했듯 별다른 고민없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게 그 자체로 우려할 만한 국가주의라고 할 순 없지만, 국가주의에 사용되기 충분한 상태인 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이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말아야할 부분, 적대적으로 긴장해야할 부분을 무마해버리는 효과 때문이지요. 사랑방 논평에 대한 집단주의적인 반발도 보편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 몇몇 운동가만을 가지고 여성운동의 전부인 것처럼 오도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 저는 그 글에서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고 했습니다. 90년대 이후라는 말은 90년대 이전과의 변별성의 표현이고, 주류란 양적인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주요한 흐름이란 뜻입니다. 90년대 이후 어떤 불건전한 경향이 페미니즘 전반을 두루뭉실하게 휩쓸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제 생각이 부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두리뭉실한 상태를 먼저 분명히 구분하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박근혜 지지 발언은 페미니즘의 건전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분명히 드러낼 기회였고, 반드시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 발언엔 침묵하다가 그런 침묵에 대해 비판받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건 떳떳치 못합니다. 그 글에서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페미니즘을 못마땅해한다”라는 구절 기억하십니까?

– 네, 기억합니다.

– 그게 원래 ‘진보주의자 남성’이 아니라 ‘진보주의자’였습니다.

– 불리함을 자초하신 거네요.

– 사실 진보주의자가 맞는데, 왠지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고쳤지요.(웃음)

– 그것이 평소 스타일인 비장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기왕 논쟁하는거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하신 겁니까?(웃음)

– 그런 대단한 의미를 둔 건 아니고, 그녕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데… 하여튼 그렇게 고쳤다고 아내한테도 핀잔께나 들었습니다.(웃음) 그러나 진정성을 가진 여성이라면 그런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조선희씨는 뜬금없이 저를 ‘현실의 경험에서 떠나 관념적’이라고 적었던데, 그걸 읽고 저는 역시 이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온세상의 일에 보편적인 양식을 가진 듯 행동하지만, 실은 무엇 하나도 양식있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기 책을 조선일보 기자에게 갖다주고 홍보를 부탁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선일보 기자와 마주 앉아 문화계의 근황들을 양식있는 어휘로 교환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이 양식있게 산다는 건 양식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있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 지식인들의 사회적 의견에는 좀 더 엄격한 태도가 필요한데, 편향된 페미니즘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구체적인 관습으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성의 도리, 여자다움, 착한 여자 따위들로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관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모든 관습엔 이념이 숨어 있고 그 관습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계급이 존재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게 하는 관습은 지배계급의 가장 효율적인 지배 방식입니다. 세상의 절반만 지배하면서 전체를 지배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 노동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남성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여성입니다. 여성들은 남성을 먹이고 입히고 재웁니다. 게다가 다음 노동력을 생산하고 기르기까지 하지요. 그게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자본은 알다시피 여성에게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노동이 여성의 당연한 도리라는 관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착취는 충분히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런 구조를 꿰뚫어보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해방은 없습니다. 여성들이 생리적 남성을 최종적인 적으로 규정하는 건 실은 자신에 대한 억압 구조를 스스로 은폐하는 일입니다.

–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계급적 억압을 보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일반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를 스스로 은폐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여성들의 싸움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까요?

– 여성들의 싸움은 구조적인 측면과 관습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관습이 사회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이미 체화된 관습은 구조를 해결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의 문제는 대개 관습적인 부분에만, 말하자면 생리적 남성과의 싸움에만 매달리는 데 있습니다. 장상이라는 사람 문제도 그런데, 그는 생리적 여성이지만 한국 보수영역의 가부장적 정신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적응해온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정신에 투항한 여성입니다. 그와 관련한 모든 추문을 보면 가부장적 매뉴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생리적 여성이라고 옹호하는 건 여성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인앤아웃>이라는 영화에 보면 커밍아웃한 게이 선생님을 옹호하는 졸업생이 게이선생이 학생들에게 무슨 게이파라도 쏜다는 말이냐? 말합니다. 장상을 옹호하는 여성들은 생리적 여성이 총리가 되면 온나라에 무슨 여성파라도 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그가 치마 두른 남성으로만 보입니다.

– 인물과 사상에 실렸던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은 어떻게 소비되는가?’라는 글 보셨습니까? 지식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오히려 ‘모두 다 똑같아’라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고 썼는데요. 그 글이 ‘강준만’이라는 글을 쓰신 이후에 나온 것 같은데, 항간에는 ‘간접적인 공격’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 간접적인 공격이라… 설사 강선생이 저 좀 공격하면 어떻습니까.(웃음) 그런 게 다 근래 몇 년 새 대거 등장한 종합 논평가들’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문제에도 실존적인 투신을 하지 않으면서 마치 구름 위에라도 앉은 듯 이놈은 이게 문제고 저놈은 저게 문제고 한가한 훈수만 일삼지요. 묵묵히 진보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낡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비웃어가면서 말입니다.

그 글은 부산대 학생이 쓴 건데 저는 이 친구 똑똑한걸 하면서 읽었습니다. 고맙다는 편지와 제 책도 한권 보내주고 그랬는데, 조금 설명하면 전 한국 지식인 전체를 싸잡아 공격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강준만 선생처럼 최악을 모면하는 일에 집중하는 분과 저처럼 차악조차 거부하는 사람은 공격 대상의 범위가 다른 것이지요. 강선생은 적시할 수 있는 몇 명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만, 제 얘기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80년대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소리치다가 고작 10년 이 지난 오늘 진보적 신념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이를테면 저와 동갑내기인 신현준씨는 저를 비난하며 옛 좌파는 쿨했다고 말합니다. 그게 과연 정치경제학 이론가였다는 사람이 할 말인지, 참 딱한 일입니다. 우리 세대가 대개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비루하게 살더라도 비루한 삶을 자랑할 건 없습니다.

– “글쓰기란 용접공이 용접을 하듯 한사람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가지 노동이다. 용접공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다”고 하셨는데요. 사회구성원과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계몽하려한다고 욕하기도 하구요.

– 다행스럽게도 저는 계몽하려느냐는 비판을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글이 비교적 쉬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욕을 얻어먹은 적은 많지요. 김지하, 이현주 선생님, 의사들, 해병들, 페미니스트들… 제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글쓰기는 ‘안전한 글쓰기’입니다. 항상 점잖은 얼굴로 안전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겨레의 전속필자로서 맨날 조선일보 욕을 하는 건 정말이지 안전한 일입니다.

진보주의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인데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현재 세상의 경계를 건드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확연히 적대적인 대상만을 비판하는 방식은 단지 안락을 좇는 색다른 방식입니다. 확연하고 일반적인 경계에서 드러나 있지 않은 애매한 부분, 세부에 대해서 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진중권은 그런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경계를 많이 건드렸죠. 최근 서해교전이나 여중생 압사사건과 관련한 의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엉뚱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안전한 글쓰기만을 하는 사람보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전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곤란한 문제엔 언제나 두리뭉실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한 일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 반드시 그런 식으로 답변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얻는 것은 존경과 품위의 증가이지만, 경계를 건드리는 사람이 얻는 것은 오해와 욕설과 고단함이죠. 진보주의자가 존경과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변했을 겁니다.

– ‘글을 쓰는건 그로 인해 사회가 모기다리만큼이라도 영향받으라고 쓰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한겨레나 우리 모두의 자리에서 조선일보 욕하는 것은 이젠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스레 진보적이랄 게 없습니다. 진보는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급진적인 주장도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 자체론 대단치 않지만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스템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진보적 가치란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에 조선일보 반대를 말하는 것과 오늘 조선일보 반대를 말하는 건 전혀 다른 가치를 갖습니다.

“글은 구원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구원은 행동에 있다”고 하셨는데, 공격적인 글쓰기를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십니까?

– 제가 무슨 대단한 진보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분도 있는데, 진보운동은 글이나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땀을 흘려 조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글쓰기도 진보 운동의 일부일 수는 있겠지만, 진보 운동 가운데 가장 낮고 주변적인 운동이겠지요. 진보주의자에게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쓰기에 사용된다면 저는 그게 대단하든 대단치 않든 제 역할에 진지하게 임할 뿐입니다. 요즘은 이른바 지식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누가 누구하고 논쟁을 했다느니 누가 이런 걸 썼다느니 하는 것보다는 현장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노동운동이나 인권운동 하는 선배나 친구들과 주로 어울리고, 글쓰기와 별개로 좀더 실천적으로 결합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니리포터 지승호 기자 triana@freechal.com
웹진 시비걸기 편집장www.freechal.com/si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