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언제나 방해받고 실패한다. 그것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에서조차 그것은 우리에게서 항상∙이미 빗나간다. – 그것은 나에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주체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 나와 너에 대한,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에 대해서, 그러나 말하기를 포기하지는 말자.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이 듣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면 전혀 말이 없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4-24 21:22)

지난 열흘 동안의 아르바이트는 TV를 장만하고자 하는 얄팍한 동기에서 시작됐지만 끝내는 그 열흘이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함께 하는 노동 속에서 생기는 연대의식과 사회적 높낮이에 의해 피라미드처럼 구성된 억압의 사슬들이 지니는 의미를 머리에서 몸으로 조금이나마 옮겨 새기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짜릿하기보다는 씁쓸하고 아련하기보다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일은 보람될 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개점 1주년 사은행사랍시고 10만원, 20만원, 30만원, 50만원, 그리고 100만원대로 나뉘어진 사은품들이 구매 고객들의 충동구매를 부추겨 이윤을 좆나게 극대화하려는 백화점 측의 기획을 대신하는 일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그렇게 좆나게 극대화된 이윤이 미천한 알바생들에게까지 돌아갈 리 만무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우리는 그저 일당 23,000원 남짓의 돈을 위해 충동구매의 중추적 기지, 사은행사 현장에서 전판과 귀접시와 여행 가방, 차렵 이불 등을 옮기고 쌓고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있었을지라도 일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배우며 내 생활 리듬이 자연스레 일에 맞추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일찍 사회에 뛰어든 사람,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두고 온 사람, 학교를 잠시 쉬는 사람, 입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두터운 연령층을 이루며 포진하고 있는 현대 백화점 미아점 판매 기획팀 소속 알바생들이었지만, 일을 가운데 놓고서는 연대하였다.
그러나 일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 다른 어떤 일도 그러할 것이다. – 소위 알바생은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장 낮은 직급에 속한다. 백화점 주위의 쓰레기나 빈 박스 수거하는 아저씨나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 쉴 곳이 남자 화장실 밖에 없는 아주머니들 – 처럼 말이다. 게다가 나이도 어린 이들에게 사무실 직원들은 초면에도 경어조차 사용하지 않으니, 간혹 경어를 쓰면 크게 인심 쓰는 일이다. 알바생은 부려먹기 좋은 상대인지라 원래 하기로 한 일과 상관없는 잔업을 시키는 것도 거리낌 없고, 일을 잘 해 문제삼을 것 없으니 행사 현장 내려와 – 일에 손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 손가락으로 틀 닦고 먼지 상태를 확인하거나 – 군대서나 볼 법한 경악할 만한 악취미! – 정식 직원, 그것도 판매직 사원이나 할 것 같은 인사 연습이나 국민 체조를 시키려는가 하면, 일하고 쉬는 사람 갈구기까지 괴롭히는 종목도 다양한 싸이코 직원이 한 마리 기생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겠다. 성서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나는 이 미친 싸이코가 활개치는 것이 가능케 하는, 이 작자 만큼은 아니라도 그와 똑같은 위치에 한 마리씩은 꼭 있도록 해야 하는 구조를 차라리 미워할 것이다. – 솔직히 이 미친 싸이코 한 마리도 기름에 볶아먹고 싶을 정도로 싫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구조의 대리인은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 그 작자는 내가 배운 바 대로 자본의 일을 대신 수행할 뿐이라고 믿자. 아무리 그 작자는 자신을 자본이 지니고 있을 권력 그 자체인 양 비행기 태우고 있을지라도 그는 단지 자본의 개, 자본이 지배해야 할 노예들을 대신 통제할 뿐인 경비견에 불과하다고 콧방귀를 껴 주자. 무시할 만하지 않은가. – 실은 무시할 수 없다. 단지 빙산의 일각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무시하고 간단히 거부함으로써 해결될 일이 아닌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마지막 날, 동료들이 공히 분노할 일이 밝혀져 버렸다. 규정상 알바생들에게 매일 간식을 제공하기 위한 7만원 가량의 자금이 지급되어야 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음료수와 과자 몇 개를 단 한 번 ‘쏴’ 주는 것을 봤을 뿐이었다. 더한 것은 사무실 직원들은 그 돈으로 (썼을 법한) 샤브샤브를 쳐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런 썩을!” 혼잣말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함께 느낀 분노였다. 일은 이제 다 끝나버렸고 떠나는 마당이 되어버린 동료들에게서는 엇갈리는 고민이 생겨 버렸다. 단체로 항의할 것인가, 가는 길 고이 떠나 드릴 것인가.
전자에 대해 진지하게 중지를 모으는 중에,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의 분노는 조직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장기로 일한 몇 명의 개인적인 친분이 결정적이었다. 분노가 뭉칠 수 있었던 순간은 그들의 망설임 속에서 지나가 버렸고 해소되지 못한 더러운 감정만이 씁쓸하게 삭혀지고 있을 때 쯤, 힘없는 자들에게서 믿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수적 우세라지만, 그 힘은 결코 쉽게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억누르는 모순의 구조는 직시하기 어렵고, 그것을 덮고 있는 사적 관계는 이렇게도 잘 보이는구나. 인간은 갈수록 원자화되고 자본은 갈수록 조직화되는구나…
그래서 남게 된 것은 해답 없이 던져진 케케묵은 질문들의 반복이다. 문제는 알바 속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의 크고 작은, 영원한 굴레 같은 반복 속에서 그 반복이 지니는 의미를 점점 더 또렷하게 해야 한다는 것과 그 반복이 종말을 고할 날을, 그야말로 역사의 종말을 언젠가는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약하고 나이 든(?) 형이 일하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웃는 얼굴로 “형, 가서 쉬세요. 제가 할게요.” 하는 동료의 선의 만큼 존중 받을 만한 일을 나는, 그들은 과연 했던가 하는 질문들…

첨가 : 내가 한 일이 개 같은 일이라 하지만 자본, 백화점은 고마워 해야 할 일이다. 이 말단 알바생들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것은 그만큼 일이 보잘것 없거나 직원들이 꺼리기 때문이지만, 언제나 가장 보잘것 없고 꺼리는 바로 그것이 무의식의 비밀을 갖고 있다고 하거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생산의 주체라고 하거나, 진실은 바로 그 곳에 있는 법이다. 생각보다 그 일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사가 애초에 없다면 백화점의 이윤은 좆나게 피 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백화점 측은 각종 행사들을 알바생들에게 위임하면서 그 중요성을 은폐함과 동시에 자본 회수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종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도 노동(특히 육체노동)은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지만 그것이야말로 생산의 동력일 수밖에 없다는 진부한 진실이 드러난다고 하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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