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씨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다. 게다가 나는 이번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제를 우리나라 정치사의 일보전진으로 평가하면서 그 와중에 노풍(盧風)으로 대변되는 국민들이 보여준 변화와 개혁에의 염원의 출현에 가슴 깊이 고무 받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노무현 씨 개인에게서 진실한 인간의 양심과 솔직한 용기를 수차례 목격한 바 있으며 결코 그를 가리켜 ‘좌파’니, ‘위험한 사람’이니하는 류의 수사(rhetoric)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 썼던 글 중 ‘정태춘과의 만남들’이라는 졸문(拙文)에서도 잠깐 묘사한 대로 개인적으로 나는 노무현 씨와 눈물바람으로 껴안은 적도 있었고, 그가 87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정주영 씨를 몰아붙이는 장면을 중학교 2학년의 새가슴으로 쳐다보면서 콩딱댄 적도 있었으며, 3당야합하던 통일민주당사에서 끝끝내 반대를 주장하다가 입이 틀어막혀졌던 그의 모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어느 국정조사장인지 명패를 집어던졌다가 눈물을 뚝뚝 털어트리면서 민정당의 국회의원에게 사과하던 그를 아마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 씨의 등장으로 정치에 환멸과 조소만을 보내던 젊은이들이 다시 일간지에서 정치면을 읽기 시작했고, 어느 지하철 가판대에서는 한겨레가 동이 나자 ‘조중동 같은 쓰레기를 어떻게 사 보겠냐’는 한 30대 직장인의 짜증을 우연히 목격하기도 했다. 비록 민주당이라는 지역정당에서 영남이라는 지방색을 토대로 ‘또 다른 의미의 지역주의’라고 맹공 당하는 그이지만, 나는 그가 지역주의의 균열에 일조할 것이라는 데에 기꺼이 동의하기도 하고, 그가 선택한 유효정치력으로써의 양김 민주화세력의 ‘민주대연합론’에 대해 선거라는 제도정치 내적 변수을 감안할 때, 일정 정도 긍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노무현 씨를 지지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결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노무현 씨를 지지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현 정세의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이 함의하고 있는 ‘노풍’의 긍정적 의미를 존중한다. 그것의 본질은 온갖 매체들이 긍정을 하든, 반박을 펴든 간에 분명히 이 땅의 민중과 시민과 국민들이 한국정치에 보내는 일종의 희망과 변화에의 요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다시 보아 일면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노풍의 긍정적 해석은 유효하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들의 염원이라는 것은 현 집권당인 민주당에게 있어 ‘정권재창출의 발판’으로만 유효할 뿐이다. 다시 말해, 국민들의 변화를 주창하는 집단적 요구가 집권당에게는 절호의 찬스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발전노조가 민영화되는 걸 반대한다고 거리로 몰려나오니 명동성당 근처나 종묘공원 근처에는 김밥이며 생수를 파는 아줌마들이 저마다 다라이며 아이스박스를 이고지고 모여드는 격이다.

이것은 단지 이용과 변용, 활용에 불과하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적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외세의 침략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염원을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지배구조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활용한 것이라든가, 대통령 간선제로 대변되는 독재와 반민주의 지배구조를 거부하고 변화하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표면적인 직선제로 수용하고 일정한 타협으로 마무리했던 신군부 출신 지배블럭의 경우는, 늘 역사 속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민중의 요구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영악함과 간교한 혜안을 두루 섬렵하고 있다.

노무현 씨를 지지하는 일은 결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일이다. 나는 전라남도 영광 태생의 호남본적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첫째는 지역주의라는 통치수단을 온몸으로 거부하고자, 둘째로는 지배질서가 구축하고 있는 기존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는 명백히 민주당에 반대한다. 내가 갖고 있는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감과 민주당이라는 집권세력의 일각에의 반대는 모순된다. 만일 노무현 개인에 대한 인기투표라면 나는 응당 노무현을 좋아한다는 쪽에 내 한 표를 행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민주당이 의도하고 있는 ‘집권의 연장’의 한 도구로 등장하는 투표라면 나는 노무현이라는 빈칸에 머무를 수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이회창을 지지하느냐고. 물론 천부당만부당한 질문이다. 노무현이 은근한, 혹은 불가피한 지배세력의 도구라면, 이회창은 노골적인, 그리고 뻔뻔해 마지않는 지배세력, 그 자체다. 당연히 나는 이회창의 당선을 꿈에도 그리지 않으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는 아직도 만연되어 있는 ‘인물 중심의 선택양상’이다. 이승만이가 박사니, 신익회가 양반출신이니, 박정희는 빈농의 아들이니, 김대중은 호남의 자존심이니, 김영삼은 인격자니, 이회창은 대쪽이고, 노무현은 상식과 원칙이라는 등의 인물론은 저잣거리마다 모여서 곰방대나 놋쇠재떨이에 툭툭 털던 갓쓰고 도포차림의 할아버지들의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는 전쟁이다. 지배세력과 지배블럭 내에서 소외된, 또 다른 지배세력의 일각이 명시적인 헤게모니를 쟁탈하고자 벌이는 무혈의 전투다. 거기서 아이콘과 기호화되어 등장하는 일개 후보 자체는 제 나름대로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흡사 밤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타이타닉 호는 이 작고 허연 빙산 조각만을 봤다가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노무현이나 이회창이나 모두 어떤 group의 아이콘에 불과하다. 노무현이 당선되면 노무현만 당선되는 게 아니라 민주당 전체가 당선되는 것이고, 이회창이 당선되면 한나라당 자체가 집권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학교 3학년만 되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한 번 선거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하고 인물 개개인에 대한 온갖 평가와 반론, 역공이 난무해지고 나면 전국민은 이를 망각하고 만다.

문제는 어떤 집단을 집권하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게 관건이다. 정확히 말해 ‘노무현 집단’을 밀어줄 것인가, 아니면 ‘이회창 집단’을 밀어줄 것인가로 고쳐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핵심이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몰정치적인 인물 개인에 대한 호불호에 갇혀 횡행하고 있다. 그게 아직까지의 한국 정치의 수준인 것이다.

물론 홍세화 씨의 말씀 맞다나 노무현 씨가 당선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와 진보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노무현 씨가 신자유주의가 강제되고 아직도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남북의 소통을 추진해야 하며, 노동자와 자본가 중 어느 편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말하자면 지극히 제한된 객관식 앞에 서 있기에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퇴보와 반동을 최대한 막는 일이며 그가 소속된 집단의 속성상 근본적인 변혁은 꿈도 꿀 수 없다는 말에 일정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물론 노무현과 이회창은 다르다. 그것은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다른 만큼 다른 것 같다.

이런 말도 있다.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행된 과정도 결국에는 진전이 있었고,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간 것도 나름대로의 변화가 있었으며,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서 바뀐 것도 있었으니,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가는 것이 거시적으로 볼 때 단계적, 점진적으로 진보가 아니겠느냐고. 일리는 있다. 다만 십리나 백리, 천리, 만리는 없지만.

이쯤에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사항으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대체 현재의 남한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정말이지 무엇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분단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신자유주의의 맹공이라고 읽고 있다. 꼬뮌의 땅, 프랑스조차 극우 국민전선의 당수인 장마리르뺑이 결선투표에 진출할 정도로 유럽이 우경화되고 있고,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반쯤 미쳐돌아가고 있으며, 결국에는 중국공산당마저 자본주의의 경쟁과 효율을 도입하고 있는 이 마당에, 삼성과 현대, SK를 비롯한 사기업들의 대주주가 모두 외국자본으로 넘어가버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공기업뿐인 이 땅에서 철도와 발전소까지 다 팔리는 이 마당에, BMW는 예약이 하도 밀려 있어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하고, 무지랭이 민초들이야 카드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은행강도니 부녀자연쇄살인이니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어야만 하는 이 나라에서 50년만에 만나 억장이 무너지는 이산가족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나는 노무현을 지지할 수 없다. 물론 나는 당원으로 소속되어 있는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집권할 가망은 없겠지. 그리고 집권할 능력도 아직은 없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한 표를 민주당의 후보에게 행사할 수는 없다. 내가 이번 대선에서도, 다음 총선에서도, 계속해서 민노당을 지지할 때, 민주노동당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생존해 나갈 때, 나는 내 희망의 근거를 일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그를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내 가장 절친한 친구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다 하여 내가 그 친구를 정말 우애한다고 나의 정치적 신념에 역행되는 선택을 할리 만무한 것처럼.

나는 우리 모두가 어서 빨리 과거의 인물론 만담에서 벗어날 것을 원한다. 핵심은 이렇다. 보이지 않는 배후를 꿰뚫어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노무현은 빙산이 수면 위로 돌출시킨 일각에 불과하다. 설사 내 한 표가 노무현을 패배시키고 이회창을 당선시키는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할 지라도 나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다. 내가 현재의 지배세력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위트 식스틴>의 켄 로치가 이야기하는 ‘좌파영화만들기’
– 희망은 없다, 하지만 끝없이 투쟁한다

켄 로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은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 이제는 칸영화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레드카펫 세리머니에서는 주인공은 물론 민간인도 턱시도나 이브닝 드레스 차림이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길, 언젠가 딱 한 사람, 바로 켄 로치가 청바지 차림으로 레드카펫에 오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딱 그다운 행동이다 싶어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중매체에서 사라져간 좌파의 자리를 40년 가까이 씩씩하게 지켜온 고집스런 감독. 혹 꼬장꼬장한 성미라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쫓아내는 건 아닐까.
그러나 모든 게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적한 호텔 정원에서 다른 기자와 인터뷰중인 켄 로치를 발견했는데, 그는 온화하고 겸손한 얼굴로 경청하거나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 맑은 미소를 띠며 이쪽으로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칸영화제의 단골 손님으로 느끼는 남다른 소회를 털어놓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정확히 이번이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온 것 같긴 하다. 초대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칸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돼 있는, 재미난 곳이다. 쇼 비즈니스, 진지한 영화,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저널리스트.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괜찮은 자리인 것 같다.”

<스위트 식스틴>,’가정’을 소망한 소년의 좌절 그려

한국에 그의 영화가 적잖이 소개됐고, 팬도 많다는 이야기를 하자, 켄 로치는 의외라는 듯 수줍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영화가 어떤 이유에서 다른 문화권의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한길을 걸어왔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 모든 사회는 계급간의 갈등 위에 세워졌고, 역사는 특정 계급의 손에 좌우돼왔는데, 그런 문제의식에 많이들 공감하는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 상영중인 <빵과 장미>는 그가 3년 전에 완성해 2년 전 칸영화제에서 선보인 작품. “스토리는 작가 폴 레버티가 90년대 중반 LA에 머물 때 청소부 노동조합에 관여했던 경험에서 나온 거다. 그는 이 이야기가 꼭 영화화돼야 한다고 했다. 이민자가 된다는 것, 시민권 없이 산다는 것, 아메리칸 드림을 창조하는 도시에 산다는 것의 의미를 영화 속에 녹여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건 영화의 모델이 된 LA 히스패닉 노동자들의 영화다. 그들이 그렇게 느끼길 바란다.”

올해 칸영화제에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지방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 드라마 <스위트 식스틴>을 들고 왔다. LA로 날아가 <빵과 장미>를 찍을 때 켄 로치는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내건 미국과의 싸움을 선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는 <스위트 식스틴>으로 다시 글래스고로 돌아왔다. <내 이름은 조>으로 시작된 ‘글래스고 3부작’의 2편이라는 것이 그의 소개. 글래스고라는 공간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나로서는 시추에이션은 어디든 다 비슷하다. 글래스고 3부작을 만들자는 건 작가의 아이디어인데,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그 지역을 잘 안다. 사투리에 익숙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강한 사투리 억양의 대사는 그 지역의 이야기라는 믿음을 주니까. 글래스고는 긴 투쟁의 역사가 있고 문화가 아주 강하다. 영화의 공간으로서 런던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곳이다.”

<스위트 식스틴>은 마약 딜러인 남자친구 때문에 감옥에 가 있는 엄마,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된 누나와 함께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길 소망했던 한 소년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켄 로치 영화로는 드물게 사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돌아가는지에 대한 문제에 늘 관심이 많았다. 마약문제로 인한 가정파탄 등의 문제는 이 사회가 병들어 있고 붕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적인 이슈는 사생활을 갉아먹는다. 세상 어느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고립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켄 로치의 작업 방식에는 일관된 스타일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마추어 배우들에게서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낸다는 것.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이 믿고 싶어하는 재능을 찾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오디션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배우로서의 재능과 상상력,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별 어려움이 없다. 한 가지 상황을 두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즉흥 변주 리허설을 해보고, 배우들을 강하게 푸시한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까.”

이 골수 사회주의자에게 촬영의 원칙을 물어보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내 생각에 촬영은 심플하고 경제적이어야 한다. 경제적인 촬영의 핵심은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이다. 와이드 렌즈나 망원 렌즈도 잘 쓰지 않는데, 그건 렌즈가 사람의 눈과 같아야 한다고 믿어서다. 대상을 조용히 응시하고 연민하는, 사람의 눈 말이다.”

좌파영화를 만드는 외로움

켄 로치는 칸영화제에만 10번 넘게 초대된, 공인된 거장이지만, 아직도 한편한편 만들 때마다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조차도 일상인 듯,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며 득도한 사람처럼 웃어보였다. “펀딩 여건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전작의 흥행 성적에 따라, 영화제 진출 성과에 따라, 다 다르다. 그래도 지난 4년 동안은 형편이 좋았다. 영화 찍는 데 돈을 많이 쓰는 편이 아니라 제작비 마련에 큰 어려움은 없다.” 정작 그를 괴롭히는 건 상업성이 없는 영화를 만드는 고충이 아니라, 우파가 득세하고 있는 이즈음의 유럽에서 좌파영화를 만드는 외로움인 것 같았다. “토니 블레어는 좌파지만 우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이탈리아는 우파가 장악했고,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우파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쎄, 계속 투쟁하는 것밖에 없겠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켄 로치의 얼굴에 수시로 햇살이 내리비쳤다. 불편한 듯 눈을 찡그리는 그에게 자리를 바꿔 앉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괜찮다. 곧 해가 기울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작은 배려지만, 그 따뜻한 맘이 그대로 와 닿았다. 그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진 않는다 했다. 자신은 그저 “미력하게나마 돕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켄 로치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지만,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좋은 세상 만들기’에 얼마간 봉사해왔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