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면과 감기의 금요일을 보내고 난 후 토요일 아침을 힘겹게 시작할 때쯤 사진동호회에 올라온 글을 하나 읽고는 담배를 하나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노무현은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왜 그(또는 그의 가족들)는 그런 도덕적 흠결을 만들어 그토록 상처 받아야 했을까.

나는 이 땅의 노동자를 괴롭히는 그를 싫어했고 권위주의 정치를 깨려는 그의 파격적인 언행을 즐기며 지켜봤다.
그는 다만 덜 나쁜 대통령이었고 그럼에도 속을 알지 못할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그의 파격은 내게 너무나도 흥미진진했다)

나는 지금 그가 저지른 도덕적 흠에 괴로워하고 존재의 무력을 느꼈다는 것에 대한 당연한 존중을 느낀다.
그리고 이명박과 노무현의 흠결의 무게를 짐작할 때 이 슬픔 뒤에 있는 한국인의 자가당착에 빠진 분노와 우리 자신에 대한 또 한번의 모멸감을 느낀다.

그의 죽음은 내게 그의 대통령 당선 때와 비슷한 강도의 서사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하나가 변화 가능성에 대한 어찌됐건 희망의 작은 시작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그 실패에 대한 종지부 같은 것이다.

노무현의 마지막 이야기 때문인지 나는 끝내 주말 동안 오뉴월의 감기를 떨쳐내지 못했다.
목소리가 맛이 갔는데 담배는 왜 계속 펴 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안타까움을 담배가 달랠 수 있을까.

박찬욱의 스타일은 수식이 많은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무뚝뚝하다. 이미 출간된 동명 소설을 읽어보면 현상현 신부와 태주의 관계, 그들이 흡혈귀와 팜므파탈로 만나 치정극의 얼개를 짜는 것이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 스토리가 영화로 옮겨지면 박찬욱은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것보다는 단속적이고 폭발적인 인상들에 훨씬 집중한다.
……
그중에서도 압권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상현의 본격적인 흡혈 행위를 보여줄 때다. 3분 넘게 지속되는 이 장면에서 상현 역의 송강호는 어떤 흡혈귀 영화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격정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물리적인 표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이런 것이 박찬욱 연출의 진심이다. 슬프게 탐닉하는 행위, 짐승처럼 헐떡거리면서 상대의 육체를 남김없이 핥고 빨며 다시 수혈해주는 동류의 행위, 타락하면서 제어할 수 없지만 궁극에 파멸로 귀결될 것임을 아는 행위, 이런 장면의 물리적 직접성이 연출자에게는 캐릭터 묘사를 대치하는 것이다. 나는 불편하면서도 쾌락적인 이런 장면에 어떤 낭만적인, 또는 감상적인 윤기를 입히지 않은 것이 박찬욱 영화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 씨네21 <김영진의 점프컷 – 그게 박찬욱의 예술적 자유다> 중

박찬욱의 영화를 볼 때마다 과시적인 스타일이 이야기와 신화, 흥미로운 영감들을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바로 그 때문에 박찬욱의 영화를 본다. 박쥐는 절제와 이타심이 욕망과 이기심과 충돌하는 이미지를 격렬하게 표현한다. 박찬욱은 어쩌면 화가나 사진가의 욕심을 갖고 있는 감독인지도 모른다. 이미지로 서사를 종결짓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욕심을 나도 조금은 느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