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가의 좋은 점은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이므로 전쟁 취미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p31~33

버트런드 러셀은 현대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오래 된 공허한 신화로 인해 최소한의 노동과 최대한의 여가라는 선물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노동하고 생산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유희하고 소비하는 존재다. 노동이 자연에 대한 투쟁이라면 유희는 그것과의 공존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신경쇠약 직전까지 스스로를 내몰면서 가혹하게 노동하고 있는 것일까. 왜 모두들 근면 성실이라는 강박에 시달릴까. 노동으로 삶을 소진시키지 않고 그것을 게으른 유희에 할애함으로써 산다는 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 싶다. 게으름을 죄악시하고 사회에서 도태시키려는 이상한 사회적 음모는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언제나 삶에 대한 피로에 시달리는 내게 이건 참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