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감독 아주 재주 있네”, “영화를 아주 자유자재로 만드는구나”, “그 영화의 카메라는 최고였어”와 같이 기술적 범주에서 영화를 평가하는 수많은 표현들이 있다.

“그 영화는 아주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이 감독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는 존경스러워”와 같이 세계관의 범주에서 평가하는 표현들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영화를 평가하는 데는 기술과 세계관이라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고.
성의없이 설정한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두 범주는 동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억지로 밀어붙여, 예술이 고유함을 원천으로 한다고 할 때 이를 재능의 고유함과 태도의 고유함이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영화적으로 잘 직조해 내는 또는 새로운 영화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 재능의 고유함과 인간과 사물, 세상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태도의 고유함.
재능의 고유함이 천재의 영역이라면 태도의 고유함은 현자의 영역일 것이고, 나는 가급적 천재의 결과물을 즐기되 천재를 숭배하거나 자신이 천재적이지 않은 것을 자책하기보다 자신이 충분히 현명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재능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세계 또는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점에서 태도의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니까 섣불리 말한다면 누구나 고유한 세계를 구성하고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성찰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예술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혜택이 아닐까.

요즘 이별하는 일이 참 많다.
한국은 또 한 번 민주화를 견인한, 동시에 결과물인 한 인물과 이별했다.
역으로 반동적이고 폭압적인 정치적 인물들은 질기고도 떳떳하게 살아남았다.
여기서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내 이십대 첫 대통령 선거 표를 던졌던 김대중은 노무현처럼 애증이 섞여 있고, 객관적으로는 달리 평해야겠지만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라는 장에 어쨌든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이제 김대중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21세기와 함께 시작한 한국 민주화 세력의 어떤 행보가 다시 외면받게 된 과정과 떼 놓고 볼 수 없다.
반동의 시대에, 명박이는 또 한 번 추모의 물결을 반정부 불법 세력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35091
캄캄하다.

http://cineart.co.kr/wp/event/view.php?vid=736&jes=on&page=1#c_21350

가장 사랑한 극장이 떠난다.
네오이마주 편집장의 글에서처럼 나 역시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말없이 나와 담배 한 모금을 피고 해머 맨을 지나고 나서야 같이 본 친구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그만큼 씨네큐브는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가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떤 과시할 만한 고상한 문화 따위가 아니라 영화 앞에서 침묵과 비움에 가까운 경험을 이 곳에서 즐겼다.
내 20대의 극장에 대한 기억은 씨네큐브를 통해 형상화됐다.
내게 어떤 극장에서의 영화적 경험을 말하라면 씨네큐브를 떠올릴 것이다.
이화여대 거대한 인공 협곡에 자리한 아트하우스 모모는 내게 씨네큐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안타깝고 미안하다.
안녕, 씨네큐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