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법에 노예는 전쟁포로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노예제 사회였던 로마에 노예는 특정 인종에 국한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 제국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쟁 포로는 아마도 백인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노예는 흑인의 대명사이다. 왜 그럴까? 피부색이 다르고 다른 지역에서 사는 흑인들이 왜 그처럼 저열한 수식어를 부여받아야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측면은 부가 소수에게만 집중된다는 점이다. 자본이 자본일 수 있는 것은 부가 소수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그것을 다른 곳에 재투자할 수 있을 때이다. 보통 사람들(중산층)이 1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돈을 모은다고 해도 많아봤자 1-2억 이상 되기는 힘들다. 이 돈으로는 그럭저럭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들을 아쉬움 없이 누릴 수는 있지만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턱없는 짓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주변부에 속한다. 이들이 다수를 점하고 사회의 그늘에 구겨 박힌 주변부 인간들이 또 나머지를 점하고 남는 부분은 소위 중심부 자본가들이 자리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부가 집중되고 그들로 인해 한 사회의 부가 운영된다. 이처럼 위계적인 분배 구조의 형성이 자본주의가 태동기에 있던 16세기 유럽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월러스틴은 말한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를 ‘세계체제’라는 특정 경제체제의 형태로서 규정한다. 경제체제로서의 세계체제는 핵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구성된 차별적인 분배 구조를 다층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자본주의적 시장)이다. 서구 유럽이 하나의 세계체제를 형성하고 있을 때쯤 노예를 동원한 단순노동 분야의 사업은 반주변부 국가의 효과적인 소득원이었다고 한다. 주로 사탕수수 수확이나 금광 채굴에 동원됐던 노예 노동은 핵심부의 공업 도시 형성을 위해 필요한 다량의 식량 및 귀금속, 화폐 공급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또한 주변부, 반주변부 국가의 지배 계급이었던 지주나 귀족, 부르주아 등은 이 거대한 블랙홀의 일부분에서 충분히 이윤을 챙길 수 있으니 아주 그럴싸한 거래였다. 아무튼 그들은 노예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체제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로마 시대 노예가 자급자족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 시대 노예는 세계체제 내에서 거래될 상품의 생산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며, 더 궁극적으로는 그 지역의 자연, 사회, 경제, 인구가 어떻게 되든 (유럽) 세계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지역에서 노예를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는 유럽 외부에서 끌어와야 했고 그 주된 대상으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선택됐던 것이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노예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초기 1500만명 가량의 인구였던 멕시코 지역이 훗날 250만명 가량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고 한다. 인간으로 생각지 않고 착취하고서는 죽어나가자 아프리카에서 다시 노예를 – 아메리카인도 아프리카인도 전쟁 포로가 아니라 단지 세계체제 외부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 끌어왔다.
따라서 자본주의 성립기에 노예는, 마지막에는 흑인이었다.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노예는 흑인 – 조금 멀리 인디언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 뿐이었다. 아니, 유럽을 세계로 상정하고 공동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태동기의 노예들이었다. 인종주의는 그렇게 자신의 착취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기만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세계 체제 내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특정 국가, 특정 지역, 특정 계급에 국한된 일인 것은 자명하다. 당시 중심부 국가의 노동자조차도 정당한 임금을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해야 했다. 불평등한 분배구조, 부의 집중은 다층적, 복합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국가간, 미시적으로는 한 사회내 계급간의 불평등을 담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종주의는 세계체제 내의 착취 계급들에게 자신의 착취받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것의 은폐물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내 눈 앞의 착취는 ‘세계 바깥’의 착취를 빌어 가려졌던 것이다. 인종주의는 지배 계급에게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피지배 계급에게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을 망각케 해 주는 아편이었다.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거친 지금, 세계체제는 말 그대로 세계를 아우르게 되었고 세계 안의 나라들은 형식적인 자유, 강요된 세계화 안에 통합되어 있다. 로마가, 중국이, 몽골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세계 자체라는 관념은 말 그대로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지만 그 정확한 중심은 서구이며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제 각 사회가 다양하고 고유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믿었던 모순들이 궁극으로는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 와 있고, 이식된 모순 안에서 전체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순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그 모순을 지워버리는 데 더 익숙하다. 그래서 인종주의와 유사하게, 타인 또는 자신의 차별을 운명으로 여기라는 저열한 아편에 몸을 내맡기려 하는가 보다.

어제 어디선가 영국에 유학가면 어디선가 (아주) 가끔 돌이 날아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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