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 추측과 논박(Confectures and Refutations)-논문 번역 및 요약본

칼 포퍼(K. Popper)

I.

포퍼가 생각했던 문제는, 이론이 언제 참이 되는가?' 또는이론은 언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것이 기존의 과학철학의 주된 문제였다.)가 아닌 이론은 언제 과학적인 것으로 평가되는가?' 또는이론의 과학적 특징 혹은 지위에 대한 기준이 있는가?’였다. 포퍼는 과학과 의사과학을 구별하고자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과학은 본질적으로 귀납적인, 그리고 관찰과 실험으로부터 진행하는 경험적 방법에 의해서 의사과학 혹은 형이상학과 구별되어진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포퍼는 경험적 방법과 경험적이 아닌 또는 심지어, 의사-경험적인 방법(방법이 관찰과 실험에 호소한다 할지라도 과학적 기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과 구별함으로써 문제를 정식화하고자 하였다.

포퍼가 관심을 가졌던 이론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역사에 대한 맑스의 이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었다. 포퍼는 아인쉬타인 이론을 제외한 세가지 이론의 과학적 지위를 의심했다. `맑시즘과 정신분석학, 개인 심리학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왜 그것들은 뉴튼 이론, 상대성 이론 같은 물리적 이론과 그렇게도 다른가?’ 그 당시 비록 이 세 이론은 과학으로서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과학보다는 원시적인 신화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포퍼는 느꼈다.(즉 세 이론은 천문학보다는 점성술에 가까왔다.) 세 이론의 추종자들은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설명력에 감동받는다. 이 이론을 연구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까지는 감추어졌던 새로운 진리에 눈을 뜨게되는 일종의 지적인 개종이나 계시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일단 눈이 열리면 어디서나 보는 것바도 그 진리를 확인시켜 주는 것뿐이다. 세계는 그 이론을 실증(verification)하는 것으로 충만해 있다. 그리하여 그 이론이 진리라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이론들이 엄청난 효력을 지니게 되는 비결은 바로 그것이 무엇이든 설명해낸다는 데 있다는 점을 포퍼는 지적한다. 이런 명백한 힘이 사실은 그 이론의 약점인 것이다.

아인쉬타인의 이론에서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그의 이론은 무거운 물체가 빛을 끌어당긴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에딩턴 탐험대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이 경우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예측에 포함된 위험(risk)이다. 만약 관찰을 통해서 예측된 효과가 일어나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그 이론은 간단히 반박될 것이다. 그 이론은 가능한 관찰 결과와 모순된다. 이것은 앞의 세 이론의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 앞의 이론들은 다양한 인간 행동 모두와 모순되지 않고, 따라서 어떤 인간의 행동을 기술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포퍼의 결론>

① 거의 모든 이론에 있어서 만약 우리가 확증을 기대한다면, 확증 또는 실증을 얻기란 쉽다.

② 확증은 그것이 위험한 예측의 결과일 때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③ 모든 `좋은’ 과학적 이론은 금지(prohibition)이다. 즉 그것은 어떤 것이 일어날 것을 금한다. 한 이론이 더 많은 것을 금한다면 그것은 더 좋은 이론이다.

④ 어떤 상상할 수 있는 사건에 의해서도 반박되지 않는 이론은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반박불가능성은 이론의 덕이 아닌 악이다.

⑤ 한 이론에 대한 모든 참된 시험이란 그것을 반증하거나 반박하려는 시도이다. 시험가능성은 반박가능성이다. 그러나 시험가능성의 정도가 있다. 어떤 이론들은 다른 이론보다 더 시험가능하고 반박에 더욱 노출되어 있다.

⑥ 확증사례는 그것이 이론을 정말로 시험한 것의 결과일 때를 제외하고는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확증이란 것은 이론을 반증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시도로서 제시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⑦ 참으로 시험될 수 있는 어떤 이론은, 그 이론이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라도 여전히 지속될 수 있다. 어떤 부수적 가정인 ad hoc을 도입함으로써 또는 그 이론이 반박을 피할 수 있게끔 ad hoc을 재해석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와 같은 과정은 항상 가능한데, 그것은 그 이론의 과학적 지위를 파괴하거나 적어도 낮춰지는 댓가를 통해서만 반박으로부터 이론을 구할 수 있다. (conventionalist twist)

⇒ 이론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기준은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반박가능성(refutability), 또는 시험가능성(testability)이다.

II.

중력에 관한 아인쉬타인의 이론은 반증가능성의 기준을 만족했다. 하지만 점성술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반증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이론의 시험가능성을 파괴했다. 예측이 결코 실패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어떤 것에 대해서 모호하게 예측하는 것은 점쟁이들의 전형적인 속임수이다. 즉 예언은 반박할 수 없게 된다.

역사에 대한 맑시스트 이론의 정초자들과 추종자들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점쟁이들과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몇몇의 초기 정식들에 있어서 그들의 예측은 시험가능했고 사실상 반증되었다. 그러나 맑스의 추종자들은 반박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론과 증거를 부합시키기 위해 양자를 재해석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반박으로부터 이론을 구해냈다. (이것이 conventionalist twist이다) 두 심리분석 이론(프로이트, 아들러)은 다른 부류이다. 그 이론들은 시험할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다. 그 이론과 위배되는 인간의 행동을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부분의 것이 상당히 중요하며 시험할 수 있는 심리학에 있어서 언젠가 커다란 역할을 할런지도 모른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석가들이 순진하게 믿는 바와 같이 임상적 관찰이라는 것이 그 이론을 실증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점성술사들이 일상적인 사건들이 그들의 이론이 참되다는 것을 항상 실증해준다고 믿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어떤 사실들을 묘사하고는 있으나 그 방식은 신화적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흥미있는 심리적 통찰을 담고 있으나 그 방식은 신화적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신화가 발전되어 시험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역사적으로 말하면 거의 모든 과학적 이론이 신화로부터 나왔기에, 신화도 과학적 이론에 대한 중요한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포퍼는 깨달았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론이 비과학적이라든가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바로 그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든가 무의미하다든가 넌센스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포퍼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학적 의미에서 경험적 증거에 의해 밑받침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비록 그것이 발생적인 면에서 볼 때 관찰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러므로 반증가능성의 기준을 제안함으로써 풀고자 했던 문제는 의미없음 또는 중요함의 문제라든지, 진리 또는 수용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경험과학의 진술들 또는 진술체계들과 또는 다른 진술들 간에 -그것이 종교적이든지 형이상학적 특성을 지녔든지 또는 단순히 의사과학이든지 간에- 경계를 긋는 문제였다.

후에 포퍼는 이 첫 문제를 경계설정의 문제(problem of demarcation)라고 불렀다. 반증가능성의 기준은 경계설정 문제의 해답인데, 왜냐하면 과학적인 것으로 분류되기 위해서 진술 혹은 진술체계들은 가능한 또는 상상할 수 있는 관찰들과 투쟁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III.

경계설정의 문제와 귀납 혹은 과학적 방법 간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포퍼는 말한다. 과학의 방법이 비판 즉 반증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알기란 쉽다. 그럼에도 이 두 문제(demarcation과 귀납)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포퍼에게 몇 년이 걸렸다. 본(Max born)은 「Natural Philosophy of Cause & Chanc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납을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 관찰을 하나의 일반법칙으로 일반화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귀납의 정당성에 대한 어떤 명확한 기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 과학은 귀납의 응용을 위해 규칙과 규약(code)을 산출해 왔다.” 하지만 본은 어느 곳에서도 귀납의 귀납적 규약의 내용(이것은 그의 말에 따르면 귀납의정당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포함한다.)을 밝혀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귀납을 수용함에 있어서 어떤 논리적 논변도 없다'고 강조한다. 즉그것은 신념의 문제다’. 그래서 그는 귀납을 형이상학적 원칙이라고 기꺼이 부른다. 그렇다면 그는 그와 같은 정당한 귀납적 법칙의 규약이 왜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일까? 이것은 그가 과학의 법칙에 무지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믿는 과학법칙의 규약을 정당한 귀납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명확해 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확실히 해 준다. 정당한 귀납법은 과학과 의사과학의 경계설정의 기준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당한 귀납의 법칙이 심지어 형이상학적이지도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자주 반복된다 할지라도 참인 관찰로부터 추론된 일반화가 참이라고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어떤 규칙도 없었다. 그리고 과학에서 성공은, 귀납의 규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행운, 발명의 재주, 비판적 논변에 대한 순전히 연역적 법칙에 의존한다.

<포퍼의 결론>

① 귀납, 즉 여러 가지 관찰에 기초한 추론은 신화이다. 그것은 심리적 사실도 일상생활의 사실도 아니고, 과학적 방법의 하나도 아니다.

② 진정한 과학적 절차는 추측(confecture)으로 작용된다. 흔히 하나의 관찰로부터 결론으로 도약하는.

③ 반복된 관찰과 실험들은 과학에서 우리의 추측과 가설들을 시험하는 것으로서 작동한다. 즉 반박의 시도로서 작동한다.

④ 귀납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다지 귀납적 방법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계설정 기준에 대한 필요에 의해서 강화된다.

⑤ 그와 같은 귀납법의 개념은 실증의 기준처럼 그릇된 경계설정을 포함한다.

⑥ 만약 귀납이 이론을 확실하다기보다는 그럴듯하게 만든다고 우리가 말하면, 이론의 어떤 것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IV.

만약 귀납의 문제가 경계설정 문제의 실 예라면 경계설정 문제의 해답은 우리에게 귀납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야만 한다. 본은 말하기를 … 어떤 관찰이나 실험도, 아무리 그것이 확장된다 할지라도 유한한 반복 이상일 수 없다'. 그러므로법칙에 대한 진술 – B depends on A-은 항상 경험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진술은 충분치 못한 자료로부터 어느 것에서나 항상 또는 때때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면 귀납의 논리적 문제는 다음으로부터 일어난다.

a)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법칙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그것이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Hume의 발견.

b) 과학은 `어느 곳에서나 그리고 항상’ 법칙을 제안하고 사용한다는 사실.

c) 단지 관찰과 실험만이 과학적 진술의 수용과 배척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의 원칙.

이 세 원칙은 언뜻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본은 경험주의원칙 (c)를 포기한다.

그러나 사실 세 원칙은 조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학에 의해서 법칙 또는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단지 시험적(tentative)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법칙과 이론은 추측 또는 시험적인 가설이라는 것과, 우리는 새로운 증거에 기초해서 법칙이나 이론을 배척할 수 있는데, 원래 우리가 받아들이게끔 했더 낡은 증거를 반드시 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경험주의 원칙(c)는 완전히 보존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론의 수용 혹은 배척은 관찰과 시험의 결과인 실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론이 우리가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시험에도 견딘다면 그 이론은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배척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경험적 증거로부터 추론되지 않는다. 심리적인 것도 논리적인 귀납법도 없다. 단지 이론의 반증은 경험적 증거로부터 추론될 수 있고 이 추론은 순전히 연역적인 것이다.

Hume은 관찰진술로부터 이론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였는데 이것은 관찰진술로부터 한 이론을 반박하는 가능성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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