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켄 로치의 DVD를 이것 저것 사 모았다. 못 본 영화들을 숙제처럼 안고 지내다 밀린 숙제를 조금이라도 풀어볼 작은 동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만만한 것이 봤던 영화 또 보는 거라, 지난 번에는 레이닝 스톤을, 이번에는 티켓을 다시 보는 것으로 워밍업을 하는 중이다.

이 영화는 에르만노 올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켄 로치가 각 부분을 맡아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다. 로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세 이야기를 이어 주는 알바니아 가족이 있어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을 준다. 알바니아 가족은 세 이야기에 상이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훌륭한 소개는 씨네21에 실린 유운성의 글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링크의 글을 읽고 나면 아래 글은 사실 읽을 필요가 없을지도.)

올미와 키아로스타미의 이야기에서와 달리, 켄 로치가 맡은 마지막 이야기에서 이 알바니아 가족은 이야기에 깊숙이 들어온다. 로마에서 벌어지는 셀틱과 AS 로마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보기 위해 기차에 오른 젊은 스코틀랜드 일당 세 명은 알바니아 가족 중 베컴 티셔츠를 입은 소년과 우연히 만나 축구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이 소년에게 샌드위치를 하나 준다. 이 스코티시 일당은 마트에서 일하는 덕분에 음료와 샌드위치 등 먹을 것을 잔뜩 싸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표 검사를 하는 중 한 녀석의 기차표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알바니아 소년에게 축구 경기 표를 자랑하러 지갑을 꺼내 든 그 녀석의 표다. 다른 친구 한 녀석이 알바니아 소년을 의심하고, 다른 두 명이 다그치지만 이내 표를 잃어 버린 녀석이 알바니아 소년을 의심하고 그 가족을 추궁한다.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한 우화일까 생각하던 차에 실제로 알바니아 소년이 표를 훔친 게 사실임이 드러난다.

그 소년의 누나가 이제 스코틀랜드 일당에게 사정을 말하며 용서해 달라고 달려든다. 로마에서 힘들게 일하며 돈을 부쳐 주는 아버지를 2년 만에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이며 오는 길에 사기를 당해 표를 한 장 모자라게 사게 됐고 등등. 스코틀랜드 세 친구는 고발할 것인가 이들에게 자기 표를 그대로 주고 말 것인가, 또는 저 말이 거짓말일 거라는 의심과 저 안타까운 가족을 도와 줘야 한다는 이타심 사이에서 요란스러운 고민에 빠진다. 그러다 끝내는 제일 먼저 알바니아 소년을 의심했던 녀석이 자기 표를 이들에게 주고 만다.

결국 기차 차장에게 무임 승차로 붙잡혀 경찰에 인계되기를 기다리던 이 세 친구는 차장이 방심하던 차에 도망쳐 나온다. 기차역을 빠져 나올 때 도움을 준 것은 AS 로마를 응원하는 팬 일행이다. 그리고 알바니아 가족은 기차역에서 아버지를 드디어 만나게 된다.

이 스코틀랜드 친구들은 인종주의적 적대감과 박애주의적 선행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고 가다 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그 대가로 셀틱 팬의 명예(?)를 지키면서 경기도 참관할 수 있게 된다. 켄 로치가 계몽주의자라면 아마 이 이야기는 알바니아 소년이 실제로 표를 훔치지 않았다며 훈계하는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또 켄 로치가 낭만적 낙관주의자라면 이 이야기에서 스코틀랜드 세 친구는 그렇게 시끄럽게 의심과 동정심 사이에서 오가며 티격태격 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 작은 에피소드에서 켄 로치는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하는 가난과 차별)이 사회 규범적 범행에 우선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편견에 입각한 의심 – 범행에 대한 분노 – 동정과 희생이라는 세 국면이 자연스럽게 충돌하다가 그 중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을 주목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적이면서 낙관적인 것은 우리에게 인간은 나쁜 선택 만큼이나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이 같은 맥락 안에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알바니아 가족이라는 영화 속 타자를 이야기에 가장 깊숙이 개입시키고 그들을 고민하게 만든 켄 로치의 이야기가 이 옴니버스 이야기 중 가장 훌륭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참고로 스코틀랜드 세 친구는 달콤한 열여섯/스위트 식스틴/Sweet Sixteen에 나온 배우들이다.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켄 로치도 이 영화에 애정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제작사 이름이 Sixteen Film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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