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르네 지라르

‘이지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범인은 고교생들이었다. 다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때는 중학생이었다. 얼마 전 그 말을 또 들었다. 이번엔 초등학생이란다. 기자들이여. 유치원에 눈을 돌리라. ‘이지메를 당한 김개똥 원아(무직 5살),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 최연소 자살. 세계적 특종 아닌가.

“어린이는 천진난만하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건 ‘천진난만’한 ‘어른이’들이나 믿는 동화다. 애들이 노는 걸 보라. 얼마나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한지. 우리 때도 따돌림은 있었다. 나도 당했다. 가령 “잠수함의 프로펠러…”라는 남의 말을 “잠수함의 스크루”로 교정해준 대가로 난 가끔 공동체의 제재를 당했다. 물론 그건 지독하지 않았다. 길어야 며칠이면 제재는 해제되고, 내가 다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레베스트’가 아니라 ‘에베레스트’”라고 진리를 말할 때까지, 난 아무 문제 없이 놀이집단에 섞일 수 있었다.

근데 ‘이지메’는 차원이 다르다. 그건 개인에게 가하는 집단적 폭력, 제도적 따돌림이다. 왜 그러는 걸까? 일본문화? 남 탓 할 것 없다. 결정적 원인은 ‘괴상한 집단주의’에 ‘천박한 이기주의’가 결합된 아수라, 즉 한국사회 자체에 있으니까. 내 가설. “이지메란, 정치적으론 파쇼독재에 천박한 자유주의가 결합한 결과, 역사적으론 일제 식민지배에 미국문화가 천박하게 중첩된 결과가 이제 우리 2세들 사이에서 문화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이다.” 이제 내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보겠다.

학교는 신화적 폭력의 세계다. 이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여기서 유일한 정의는 폭력이다. 타자를 배제하는 최초의 원(原)폭력을 통해 비로소 다수자의 정체성과 ‘선악’의 기준이 마련된다. 선악을 비로소 있게 하는 원폭력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선악의 구별에 선행하므로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 없다. 그것은 부조리하다.

선악에 선행하는 원(原)폭력은 작의적이다. 그 폭력이 누구에게 떨어질지, 왜 하필 그에게 행사되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근원적 부조리. 이 앞에서 개체들은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이 공포는 잔인한 공격본능으로 전화한다. 공격을 피하려면 공격자, 즉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희생양을 공격할 때 불안한 개체들은 무한한 잔인성으로 집단을 향한 충성심을 경쟁적으로 입증한다.

집단과 하나가 되는 만큼 개체는 안전하다. 부조리한 실존들은 이렇게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 희생자가 사라지면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내고, 이렇게 또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되면,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개별자들은 안심하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전체 빼기 하나’의 화해와 평화.

보편적 카오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이너스 1’의 제의(祭儀). 르네 지라르는 평화와 질서를 수립하는 이 지혜(?)를 ‘문명’ 자체의 본질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과도하게 근본적인 비판은 결국 현상(status quo)의 정당화로 귀결된다는 역설에 대해 그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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