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치학과 김세균 교수 홈페이지에서 퍼옴

HISTORY AND INTERACTION: ON THE STRUCTURALIST INTERPRETATION OF HISTORICAL MATERIALISM

– by Axel Honneth –

정치학과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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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로 루이스 알튀세 주변에 모여들었던 맑스주의 이론가 집단은 이론적,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맑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 방식에 열중해 왔다. 그들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전략적 문제들을 맑스 이론의 중심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에 의지하면서 명확하게 하려 했다. 고로 알튀세는 맑스 이론의 재해석을 통하여 실제의 정치적 문제들을 처리하려는데 충실했으며 이러한 알튀세의 비판적 독해 방식은 광범위하고 위력적인 것이었다. 알튀세 학파에 의해서 주어진 맑시즘은 그러므로 전통적인 맑스 이론에 대항하는 획기적 독해방식이었다. (알튀세의) 구조주의적 맑시즘은 경제주의적 맑시즘과 실천 철학적 비판이라는 상식적인 가정들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알튀세적 프로그램의 정치적 구성요소는 맑시즘 이론의 이론적, 전략적 실패를 지시하는 것이었으며, 그럼으로써 간접적으로는 그들을 현대의 전략적 토론에 적절하게 만든는 것이었다. 알튀세는 맑시즘의 역사적 실패의 핵심이 되는 이론적 실수가 항상 노동운동의 전략적 조직적 실수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결과적으로 알튀세주의자들은 정통 레닌주의적 정치와 연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노동운동의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다시말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관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사이에 놓였있는 어떤 것이었다.

알튀세주의자들의 정치관은 맑시즘에 대한 그들 해석의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이하의 논의를 그들의 자기관(self-conception)에 대한 이론적 측면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주로 {자본론 독해(Reading Capital)}에 있어서 역사이론(the theroy of history)의 체계적 발달에 있는데, 그속에서 알튀세 학파는 사적 유물론에 대한 구조주의적 재해석에 기초한 구조주의적 맑시즘의 프로그램을 인식하고 실행하려 한다.

I

알튀세의 서구 유럽 맑시즘 논의에 대한 구조주의적 재해석의 중요성은 그것의 주된 목적, 즉 구조주의적 사고 모델의 도움을 받아서 맑스주의자들의 핵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던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알튀세 학파에 의해서 주어진 맑시즘의 재해석은 두가지의 길을 형성하면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구조주의적 이론 영역의 확장과 전통적 맑스에 있어서 일부분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구조주의적 맑시즘(structural Marxism)을 사회과학적 구조주의(social-scientific structuralism)과 떼어놓으려는 잦은 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둘은 기본적인 방법론적 자세를 공유하는데, 이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델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분석이 그것의 방법론적 참고점들을 실제적 언어 발화(parole)와 언어학적 규칙 체계(langue)를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듯이 사회과학적 구조주의 역시 사건들의 경험적 맥락과 그 맥락을 결정하는 심층구조의 구별에 기반하고 있다. 알튀세에 의해서 기초된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이런식으로 확립된 기존의 방법론적 개념에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알튀세는 구조주의의 대상영역(object-domain)을 문화 상징적 매개의 영역을 넘어서서, 즉 언어학적으로 구조화된 표현들을 넘어서서 그것을 확장시킨다. 이제 그는 사회 체계내 여러 형태의 조직들 그 자체또한 심층구조들로부터 연유된다고 본다.

사회과학적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적 맑시즘이 공유하는 두 번째 특징은 ‘주체의 탈중심성(the decentering of the subject)’이다. 대상 영역은 이제 우선 특정 형태의 주관성(subjectivity)을 구성하는 규칙-체계(rule-system)가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론적 입장들은 본래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인식론적 주체의 오만에 대항해서 형성되었다. 즉 본래의 의도는 전체 사회의 연결관계를 객관화(objectivation)된 것, 즉 그안에서 초월적 의식이 그 자신을 외부화시킨 것으로 보는 현상학적 시도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식 비판의 철저함은 그 자신의 자신감과는 반비례하는 것이었다. 구조주의적 맑시즘에 있어서 주체의 탈중심성은 현상학적 초월주의를 채용하려는 맑스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제시되었을 뿐만아니라 싫든 좋든 실존주의적, 인류학적 그리고 실천-철학적(parxis-philosophical) 맑시즘 형태에 대항해서도 제시되었다.

마지막으로 구조주의적 맑시즘은 사회과학적 구조주의로부터 역사(history)의 개념을 채용하는데, 그 개념은 필연적으로 ‘주체의 탈중심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상징적 형태라는 역사적 연속성, 혹은 헤게모니적 구조를 불변하는 규칙체계의 연속으로 환원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맥락은 더 이상 주체의 단일적인 업적으로서 보증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 그 자체의 범주는 이제 불연속적으로, 그렇지만 통합적으로 구조화되고, 단지 서로서로를 뒤따르는 규칙체계들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구조주의적 맑시즘이 맑스의 고전적인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구조주의적 역사 개념을 가지고서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적 개념들의 약점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역사주의(historicism)’ 비판에서 그들은 ‘역사’의 잘못된 개념에 기초한 맑스 해석들을 예증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구조주의적 해석에서 상당히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주의’라는 범주는 역사 개념에 대한 결과물들과 더불어 구조주의적 ‘주체의 탈중심화’를 사고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역사주의에서는 ‘사회 구조의 총체성에 있어서의 각기 다른 수준들, 그들간의 관계와 사회라는 창조적 주체, 역사의 일직선적인 원칙들에 의한 그들의 생물학적인 구성에 의해서 설명되어진다. (발제자주: 역사주의 -사회를 단순히 순환적인 ‘표현적 총체성’으로 간주하게 하고, 역사를 동질적인 일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생각하게 하며, 철학을 역사과정에 대한 하나의 자의식으로 여기게 하고, 계급투쟁을 집단적 ‘주체’의 싸움으로, 또한 자본주의를 본질적으로 소외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로 만들고, 그리고 공산주의를 소외를 극복한 진정한 휴머니즘의 상태로 쉽사리 생각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루이 알튀세, Reading Capital, p.119-43: 여기서는 페리 앤더슨,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인용을 재인용함)

알튀세는 두가지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의 전통적 맑시주의를 이런식으로 재구성하는데, 그것은 ‘인간주의’와 ‘경제주의’다. 경제주의와 인간주의, 또는 알튀세의 정치적 공식화를 빌어서 말하자면 스탈린주의와 그에대한 비판자들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실체(reality)에 대한 다른 영역들을 중심의 ‘표현들’로 해석하기 위해서 그들은 역사적 과정을 도구적 혹은 인류학적 중심으로 환원시키려는 이론적 야망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이제 알튀세가 말하는 역사주의의 암묵적인 전제들에 대해서 간단히 재구성해 보도록 하겠다.

II

알튀세는 그의 연구에서 ‘역사주의’라는 개념을 매우 광범위하게 확장시킴으로써 그것은 결국 모든 역사 철학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맑시주의적 역사주의라는 표제는 역사의 자기 발전적 중심의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종류의 맑시즘에 전치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어느정도 역사 철학의 기초에 대한 서독인들의 논의와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가지의 이론적으로 구분되는 도전들이 현대의 역사 개념이 가지고 있는 범주적 함의에 대해 제기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함의들은 알튀세에 의해 도전받았던 맑스주의자들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첫 번째의 도전은 Reinhart Koselleck의 개념적 역사를 뒤따라서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단일한 역사 범주(the category of ‘history’ in the singular)의 사회-역사적 전제조건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도전은 분석적 역사철학(Danto)으로부터 온 것으로 그것은 연속성이 역사의 현대적 이해로 돌려지는 방식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로 구성된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은 역시 알튀세에게서도 발견된다.

Koselleck: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개별 역사들의 집합체로서의 역사적 사건들로 언급되었던 Geschichte(stories/ histories)라는 복수 형태의 단어는 현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Geschichte(story/ history)라는 집합적 단일 명사라는 형태로 대치되었다. 왜냐하면 혁명 시기동안 진보와 역사의 유일성(uniqueness)에 대한 잠재력이 쉽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상의 변이는 행동의 실질적 통일이라는 이론적 허구를 초래하게 되며, 이것은 역사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들간의 관계를 보증하게 된다. 이러한 부르조아적 역사 철학의 기본적 가정은 역사적 거시-주체(macro-subject: 예를들어 민중, 국가. 혹은 종 species)를 차용한 것이다. 역사는 이제 이러한 거시 주체들의 자기 발전 과정으로서 이해될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진보로서 제시될수 있는 배경적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역사 과정의 추상적 경험이라기 보다는 생산성의 영원한 증가를 겨냥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알튀세가 역사주의적 맑스주의는 역사철학과 반드시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때 나타난다. 존 루이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그는 역사를 통제하는 거시 주체를 상정하는데 있어서 혁명적 부르조아지들은 행동의 이성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재주조한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는 부르조아 혁명의 정치적 군집이 해산됨에 따라 그것의 역사 개념의 이론적 토대(즉, 행동의 보편적 중심)또한 사라진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급의식으로서 혹은 실질적으로 생산력으로서 거시 주체를 전제로한 현대의 역사 개념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유물론들은 전통적 맑시즘에서 부르조아 취향을 가진것으로서만 간주될 수 있을뿐이다. 알튀세는 ‘경제주의’와 ‘인간주의’가 정치적으로 권위적인 행동의 통일을 각각의 역사가 할당되는 중심에서 찾으려하는 이데올로기적 야심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H.M. Baumgartner’s work of A.C. Danto: 바움가트너는 단토의 연구에 비추어, 역사 철학에 있어서 연속성의 개념에대한 철학적 재구성을 산출했다. 그는 인식 주체의 통일적 성취로서 역사의 연속성을 사고하려는 후기 헤겔주의자들의 시도가 역사는 의미의 객관적 맥락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전제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한다. 바움가트너는 그의 분석으로부터 약간 급진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만약 역사의 연속성이란 것이 계속적(continual)인 변화의 차분한 확실성도 아니고 사건들의 연결을 만드는 작업도 아니라면 역사 일반은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의식들의 현상으로서만 이해되어져야 한다.’ 바움가트너는 더이상 연속성을 역사적 대상 영역의 특징으로 평가하지 않고, 모든 역사적 명제들의 단순한 형식적 원칙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바움가트너의 주장과 알튀세의 역사주의 비판의 직접적인 연결(path)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역사적 연속성의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면, 또한 그것이 바움가트너의 초월적인 철학적 해결을 피하려 하고 있다면, 그(바움가트너)의 존재론적 연속성 비판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이론적 통로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 의해 취해질수 있는가를 보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움가트너와 같이 알튀세는 존재론적 전제로서 역사적 연속성 개념을 가지고 있는 역사 개념들을 비판하고 있다. 알튀세는 적절하게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전통적 맑시즘의 특징적인 약점들을 이해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적 취향은 헤겔적 맑스주의 전통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개념의 몰역사화(dehistoricization)의 형태를 가정하고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전통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적 취향은 역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이데올로기 형태를 가정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는 자율적인 진보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것의 추동력은 생산기술의 발전인 것이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이러한 이론적 전제들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바움가트너가 역사의 연속성을 방법론적 경향으로서 독해하고 있는 반면, 알튀세는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불연선속성의 개념으로 대치시킨다. 이때 역사는 복수가 되며, 복잡한 일련의 완전한, 그러나 내부적으로 구별되는 동시성인들인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의 두 개념들(불연속성과 복수성)은 모두 명백히 단일한 전제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즉, 그들은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개념이 역사 과정에 대해 내부적으로 옹호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연속성은 항상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존재론적 연결관계로서 전제될 필요는 없으며, 역사적 연속선상에서 배태된(embedded) 역사적 사건들의 사회적 실천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토대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과정이란 사건들의 혼란의 장이나 규칙체계들의 불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그보다는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노출되는 구속력있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서 성취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의 한계들은 또한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한계들인 것이다.

III

맑스는 다른 많은 역사들의 단일한 세계사(world-history)로의 통합을 그 자체로서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세계사는 지방의 생산적 공동체들이 서로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과정의 결과로서 주장되며, 그들의 증가하는 시장 의존에 의하여, 그리고 마침내는 실제적인 관계의 복합체로서 세계 시장안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역사의 세계사로의 이러한 변형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다. 역사의 통일성은 역사적 거시주체가 되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별 역사들의 역사적 관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는 이러한 계통의 맑스적 사고를 추구할 수조차 없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역사주의의 비판에 대한 이론적 전제조건들(세계사의 연속성 개념은 오직 형이상학적 역사의 허구로서만 이해될수 있으므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알튀세는 맑스의 작업을 전과학적인 단계와 과학적으로 성숙한 단계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알튀세는 맑스 이론의 후기-역사주의 단계로부터 역사주의를 구별해 내야만 했다. 알튀세에게 있어서 맑스 주장의 역사주의적 요소들은 정치적 영역들과 사회-경제적 현상들을 인간 본질의 소외로서 취급하기 위해 다시 인류학적 특징으로 언급하게 되는 것들이다.

{자본론 독해}에서 알튀세는 헤겔적 전통의 맑시즘에서 사용하는 총체성의 개념(표현적 총체성)에 반대한다. 이러한 지적 전통에서는 모든 사회적 외양들이 집중적으로 역사적인 기질로 보여질수 있는 반면,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서는 탈중심화된 통일로서의 사회적 총체성(구조적 총체성)을 생각한다. 즉, 알튀세는 이러한 구조적 총체성 이론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구조적 총체성의 기본적 형태를 맑스의 생산양식 범주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개념은 알튀세의 자본론 독해와 역사 이론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알튀세의 역사 유물론은 사회학적으로는 개념을 풍부하게,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맑스가 이미 정치경제 비판에서 발전시켰던 개념을 일반화기키고자 하는 것이다. 알튀세 학파의 작업은 대체로 {자본}의 개념적 틀과 방법론적 정교함으로부터 일반적 역사 이론을 추정하려는 시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알튀세의 ‘실천(practice)’ 범주에 대한 평가는 생산 양식 개념과 함께 중요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각 사회의 하위 체계들은 사회적으로 안정화된 형태의 실천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으며, 사회적 실천이라는 일반적 규정하에 알튀세는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이론적 유형의 실천들을 구별한다. 사회체계에서 최종분석에 있어서는 주도권적 역할을 하는것은 언제나 경제적 instance이다.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은 역사주의의 형태로 상부구조에 대한 경제적 토대의 영향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형식으로서 경제적 토대는 단지 상부구조 기능을 제한할 뿐이라는 방법론적 목적을 유지하게 된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서 사회체계들은 경제적 하위 체계들에 기초한 위계적 관계들의 매트릭스로 간주되는데, 그안에서 비경제적 하위 구획들은 그들의 영향력의 범위라는 조건에서만 결정되어질 뿐이다.

알튀세는 역사주의자들의 역사 개념에 대항하기 위한 또다른 예방조처로서 실천의 개념을 복수화 시키고 있다. 즉, 그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독립적인 실천을 구분하는데, 이는 역사를 노동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알튀세는 사회적 실천 그 자체를 도구적 행위, 즉 대상에 대한 체계적 노동행위로서 포착한다. 그러나 알튀세는 이점에서 더욱 심한 환원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역사주의를 회피하고 있을뿐이다. 즉, 역사주의에서 사회 발전이 오직 노동을 통한 자기 객관화로서만 이해될수있다면, 알튀세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회적 차원의 행위들은 도구적-객관적(instrumental-objective) 행위에 비추어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발리바르 역시 실천 범주에 대한 도구주의적 독해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중심적 증거를 확립하려할 때 잘 나타난다)

즉, 알튀세의 실천 개념은 환원주의를 만들고 있는데 여기서 행동 주체들은, 사회적 통합이 체계적 통합으로 다루어지도록 하기위해서, 비개인화(deindividualized)된 체계적 단위들이 된다. 알튀세가 생각하기에, 행동의 사회적 맥락은 단순히 체계적 노동 과정이 되기 때문에 그는 도구주의적 개념을 가지고서 다만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뿐이다. 다소 조작 이론의 냄새를 풍기면서, 알튀세는 그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개인들이 정치적으로 순응주의자가 되고 기능적으로 체계의 유능한 성원으로 주조되는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을 확립하고자 한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그것이 {자본}의 범주적 문제틀을 만들고자 하면서, 동시에 {자본}을 역사 일반 이론이라는 원형(prototype)으로 정교화시키고자 하기때문에 이러한 개념적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형적 역사 이론은 모든 개별적 맥락의 행동으로부터 이론적 추상화를 요구하게 된다. 맑스가 분석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실체를 통하여 경제 체계의 내부구조까지 연구했던것과같이 역사 이론또한 ‘역사적 존재의 기본적 형태’, 즉 특정한 생산양식에 대한 구조적 총체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알튀세의 역사 이론은 맑스가 사회에 근본적인 자본의 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구체적 총체성’을 유추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고찰의 형태를 그것의 방법론적 원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적 기간들은 생산양식의 구조적 총체성에 대한 언급에 의하여 완전히 포착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통일된 역사이론이라는 분석적 문제틀로 인하여 이러한 역사이론은 소통적 과정을 주제화시킬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단점으로 말미암아 알튀세의 역사이론이 포착하려하는 역사적 실체는 빈궁한 실체로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이론에서 역사적 실체는 집합적으로 경험되는 행위의 역사일뿐만아니라 오직 기능적으로 위계화된 체계의 역사로서만 존재한다.

IV

역사주의적 개념들이 역사-구성적 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반면에, 알튀세는, 역사 철학을 통해서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총체성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의 구조주의적 전제들은 근본적 가정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생산양식’이 구조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모든 역사적 발전 과정들은 내부적으로 통제된 재생산 과정들의 연속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알튀세는 전체 역사를 역사적 거시주체와 연속성을 상정할 필요없는 이론의 대상으로 전환시킬수 있다. 이러한 역사이론에서는 다양한 역사들이 접근가능할 뿐이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생산양식들은 구조적으로 그들 자신을 재생산하게 된다.

알튀세는 오직 통일된 역사만을 말하는 맑스주의와 이미 이러한 통일을 전제로한 맑스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양쪽의 경우에 있어서 알튀세는 모든 역사적 과정들이 거시주체의 주변에 집중된다는 개념을 비판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타당한 맑스주의는 후자의 것에 해당한다. 전자의 경우 역사의 개념은 그것을 간주관성의 위계적 관계에서 정향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해진다.

알튀세는 구조적 가능성에의한 역사의 실제 경로를 인실할수 있을뿐 역사적 실체로서 사건들의 구체적인 물질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알튀세의 역사 이론은 구조적으로 해석된 사회적 구조들의 기능적 경향들이 오직 알튀세가 배제하고 있는 상호작용적 역사적 주체들의 실천들을 통하여 실제적 역사적 발생으로 전활될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상호적(interactive) 관계로부터 사회적 기능을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에 구조주의적 역사이론은 구어의 실천적 맥락으로부터 언어학적 규칙체계를 구분했던 구조주의적 언어학이 직면했던것과 같이 분석적 제한들을 직면하게 된다.

구조주의적 역사이론의 체계적 개념들이 역사주의의 비판으로부터만 파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튀세는 자본에 대한 맑스의 과학적 분석 모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의 구조주의적 독해는 알튀세로 하여금 구조주의의 기본적 교의들을 맑스의 역사이론 속으로 바꾸어 넣게된다. 이것은 자본 분석의 분석적 틀이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 과정에 있어서의 초개인적이고 기능적인 매커니즘과 전체적으로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역사이론이 그 자신을 범주적으로 생산양식의 구조적 요소에 국한시킬수 있도록 제한한 것은 맑스의 자본 분석의 범주적 문제틀이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서면서, {자본}의 분석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는 여러 다른 시도들이 맑스적 이론의 역사적 내용(content)에 주목해오고 있다. 알튀세의 독해방식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이러한 작업들은 그들의 관심을 맑스가 자본주의에대한 체계적 비판을 위해서 헤겔의 {논리학}을 이용했다는 이론적 전제조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튀세와 그의 동료들은 전체적인 역사적 실체를 상호작용의 관계와는 독립적인 재생산의 과정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을뿐이다. 맑스는 같은 용어로 역사적 실체를 묘사하고 있긴하지만, 그에 있어서 이것은 오직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있는 사호적 관계들의 묘사일뿐이다. 이러한 알튀세 학파의 암묵적인 이론의 변형은 그들로 하여금 구조주의 이론에 기초하여 역사적 유물론을 재구성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실체로서 관계들의 사회적 틀을 구성하는 행위의 소통적 차원을 차단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맑스의 추상화와 역사적으로 중립적인 이론적 전략으로서의 역사형성 맥락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순천대 서양사학과 강성호 교수님 홈페이지 에서 퍼옴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연구경향을 중심으로

 

목 차

1.머리말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1)독일사회민주주의 역사적 발전과정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

4.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한국의 연구경향

5. 맺음말

* 영문초록(Abstract)

* 참고문헌.

1. 머리말

최근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중엽 이후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인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흐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는 최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자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관심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91년 이후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게 소개되어왔다. 이에 비해 회민주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과 한국에서의 연구 경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개념

1)독일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사회민주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크게 3 단계의 시기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890년대 중반에 베른쉬타인이 제기하여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 시기이다. 베른쉬타인은 1896년의 독일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에 제출했던 의견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제기탖다. 베른슈타인은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궁핍화 법칙,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들 둘러싸고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경제민주주의의 구상을 둘러싼 시기이다. F. Naphtali가 경제민주주의 구상을 창안하였는 데, 이것은 공적 개입에 의한 경제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전제하는 자주관리형태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5년 독일노동자 총연맹 브레슬라우대회에서 제창되어, 1928년의 함부르크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세번째 단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전환을 둘러싼 논쟁 시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보호하고 장려하려 한다. 사회화론을 부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1951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강령] 등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2) 사회민주주의 개념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상황이 변화되어옴에 따라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아왔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곧 맑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전통 위에서 현대적 상황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을 토마스 마이어(T. Meyer)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이어는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사회주의는 윤리적 필연성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그 실천 형태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건설적 사회개혁과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노동자의 경험 및 지식의 증가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설된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로의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이다. 세째,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반드시 국유화나 전면적인 몰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 소유권을 다양한 사회적 이해의 담지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화란 반드시 시장의 철폐를 의미하지 도 않는다. 네째,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주의의 일부이다. 다섯째, 사회주의적 원리의 의미에서, 사회구조는 폭력적, 혁명적 반란에 의해서 건설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사회 관계의 창조적 건설은, 민주주의 속에서만 점진적으로,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다.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 동향

그럼 독일사회민주의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사회민주주의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베른쉬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의 검토는 베른슈타인 당대의 수정주의논쟁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이 바로 이 시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19세기 후반 수정주의논쟁의 제공자인 베른슈타인의 기본 입장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베른쉬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1896-1898년 사이에 걸쳐 {신시대(Die Neue Zeit)}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문제]라는 연재기사에서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보다 보충되어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판되었다. 베른쉬타인은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독일사회민주당의 실천 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진부하고 공상적으로 된 이론을 검토하여 당의 실천 정책들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으로 지나친 추상성과 이 추상성으로 인한 이론편향적 경향들을 지적하였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분석 중 맞지 않는 것으로 붕괴론을, 즉,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그 속성상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견해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붕괴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본질적인 오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 본질적 오류로 헤겔주의류의 변증법적인 선험적 연역론과 유물론적인 역사관, 운명론 및 결정론 등을 들었다. 베른쉬타인은 또한 사회의 양극화이론, 즉 점증하는 빈곤화와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이론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인 심화와 그에 따르는 혁명적 긴장의 고조에 대한 개념들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테제들이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의 진행이 맑스가 희망하고 예견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의 집중도 없었고, 대규모기업에 의한 소규모기업의 소멸도 없었다. 상업과 산업에서도 집중은 매우 느리게 발생했고,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 역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화 하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자, 일련의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쉬타인 옹호자가 된 폴마르(Georg von Vollmar),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다비드(David),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프랑크(Ludwig Frank), 윤리적 사회주의자인 아이스너(Kurt Eisner),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인 콘라드 슈미트, 그리고 독자적으로 베른쉬타인과 유사한 논점에 도달한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이 그들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를 통해 자신들의 집장을 피력하였다. 비록 다양한 논제에 걸친 논문, 평론, 단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폭력에 대한 반대, 윤리의 강조, 개량적 활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 여성해방, 노조활동의 고무, 교육환경의 증진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던 개혁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을 지지하게 되면서, 수정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적 비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사회민주적 세계관을 구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량주의와 구별된다. 개량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등과 같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정책 수준에 머물렀다. 두 번째 부류는 에버트(Friedrich Ebert)같은 당직자들이다. 그들은노동조직의 성장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정책간의 타협을 중요시하였다. 세 번째 부류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등과 같은 보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적 관세에 대한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대전 중의 가장 극단적인 사회제국주의로 완결된다. 이러한 입장들은 베른쉬타인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른쉬타인은 사회제국주의와 명백히 다른 입장에 서있다.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는 지지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젬부르크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섰다. 이중에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뽑히고 있고, 이후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로자 룩젬부르크의 견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제문제]시리즈에 주목하다가 {전제}가 출판되자 수정주의의 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사회개혁과 혁명을 사회민주주의 사상 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개혁을 수단으로 혁명을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녀는 이에 비해 수정주의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혁명 – 사회민주당의 목적인 – 을 폐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면서 비판하였다. 궁극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심장이므로, 그러한 목표를 폐기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술적 수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 모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으며 관념론으로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체제 분석이 그의 관념론의 지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평가절하하면서 그것을 “적응성”,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의 적응성에 대한 베른쉬타인의 주장은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전례없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했던 신용의 증가와 국제화는 실제로는 전유방법과 생산방법을 더욱 단절시키고,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더욱 괴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와 관련해서도 베른쉬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의 안정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현상 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의 징후로 보았다. 그녀는 더욱이 공황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베른쉬타인의 주장을 유치한 오류로 비판하였다. 1890년대의 상대적 번영이 장차 도래할 자본주의 대격동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번영은 생산과 교환간의 최후의 모순을 위한 전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부분적이고 국지적인 공황이 무제적한적인 세계공황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의 기초를 검토한 룩젬부르크가 제출한 결론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적 이론이 아니라 절충주의 철학을 지닌 부르주아 개량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적 활동, 사회개혁, 그리고 현대국가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세 가지 동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한다. 룩젬부르크는 이러한 세가지 전술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첫째, 노동조합은 맑스의 임금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 세력이 무한히 확대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 노조는 그들이 骕하는 대로 생산계획에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생산의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방법에도 관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수정주의자들이 산정했던 바의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두번째, 사회개량은 장기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한게가 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양립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개량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 이상 개량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룩젬부르크는 사회개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착취에 질서와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보았다. 세번째, 수정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성숙에 의존하고 있는 데, 그러한 민주화과정은 식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지배계급들이 위협당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된다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 다음처럼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에 다름아니며, 그 전술은 사회주의적 승리를 잉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승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권력장악으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베른쉬타인의 전술은 결코 현존 체제 내에서의 사소한 개량이상을 끌어낼 수 없기때문에 수정주의자들의 목표는 급진파의 궁극목표와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수정주의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가 없으면 그 지위가 한층 더 상승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과 베른슈타인의 지지자들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이러한 비판은 형성중에 있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약점을 통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룩젬부르그의 비판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룩젬부르크의 입장은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사회주의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한 분파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릭케(Dieter Fricke), 라쉬짜(Annelies Laschiza), 라드뽅(Günter Radczun), 그리고 테뵉(Manfred Tetzel)등이 이어 받어 발전시겼다.

1950년대초 이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으로 선호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 베른슈타인이이라는 커다란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른슈타인의 원저작들이 전집형태로 정리되지도 못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초 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과정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의 독창적인 새로운 포괄적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 대표적 학자로 피터 게이를 들 수 있다. 게이는 19세기 후반에 수정주의는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베른슈타인의 공적이라고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만약 베른쉬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개량주의적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진기한 이론이라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의 이론적 인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수정주의가 즉각적인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론이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맑스주의가 그랬던 것 처럼 논리적인 체계로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쟁적인 개념구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터 게이는 베른슈타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던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피터 게이는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폐기’를 너무 멀리까지 끌고가 버렸다. 사실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투쟁 자체를 문제시하는 쉬펠(Schipell)과 베른쉬타인의 이론 비판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이론적 주장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베른쉬타인의 이론구조가 그 취약성으로 곤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파급된 번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세번째, 로자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은 독일은 물론이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경직된 혁명적 사고 패턴은 영국노동계급의 평화적인 권력획득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득권 계급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담보를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베른슈타인이 독일적 상황에 대해 오판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국적 상황을 오판했던 것이다. 네째, 혁명적 전술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옹호는 대책없는 모순들을 잉태한다. 그녀는 특정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블랑키주의적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불행을 안겨주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 시기, 혁명의 형태 등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사상 속에서도 혁명이라는 난제와 개혁이라는 난제 간의 딜레마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한 피터 게이의 이러한 반비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외에 그노이스(Gneuss)도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체계화의 산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유럽사회주의가 대두된 1970년대에 바우어(O. BGauer) 르네상스와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사회민주주의 연구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바우어 르네상스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에 따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재평가와 관련이 있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는 1969년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베른쉬타인 연구는 1970년대 초 이전까지는 매우 적었으나,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활성화되었다. 1977년에 베른쉬타인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이 대회 의장을 맡았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의 하나인 토마스 마이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20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올바른 입장으로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중의의 원리와 실천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속에서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내부로부터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모순을, 이론적 기반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 발전과의 현실적 관련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수정주의는 결코 반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건설적인 개량작업을 방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는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단순히 수동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 시대상황에 적응하기위해 고안된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새로운 평가들을 미 출판된 초고와 편지들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작업들과 정통적 입장에서 계속 비판하는 시각들이 서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4.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 연구 동향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여러가지 요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공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압도되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950 년대에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통해 사민주의적 입장이 잠시 현실화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좌초되었다. 5.16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마저도 부인되는 열악한 현실 상황에서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연구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시기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참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관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사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 이에 따라 한국에서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 그리고 90년대 초 현존사회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현실 영역에서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사회민주주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김윤환, 안병직 등이 열악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이후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전문적으로 이루저어지기 시작했다. 나라 별로는 스웨덴,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중에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엽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연구자들로 박호성, 강신준, 강철구, 최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사민당일반에 대한 개설적 연구이거나 한 특정부분에 관한 부분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사민당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민주의 초기의 핵심적 문제의 하나인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형성과정과 쟁점 들을 둘러싼 논의들은 거의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이상으로 독일과 한국에서의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기회주의, 개량주의, 그리고 독창적인 내용이 없는 절충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견해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동시에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원조가 되는 베른쉬타인을 하나의 독창성있는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니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확인되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20세기 사회사상사를 한국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영문초록 >

Reserch Trends on German Social Democracy and Bernstein’s Revisionism

Sungho Kang

AbSTRACT

In this article, I studied the following subject ” Reserch Trends on German Social Democracy and Bernstein’s Revisionism.

Since revisionism debate 1896-1898, Bernstein’s Revisionism has been criticized as opportunist and nonsocialist theory by many socialist. Especially Rosa Luxemburg became famous throgh her systematic critics about Bernstein’s Revisionism. Hers critics make a great influensce in underestimating the meaning of Revisionism. Also, First and Second World War, the great economic crisis, and Nazism made Revisionism’ influence insignificant.

Since 1950′, Bernstein’s Revisionism has been estimated as positive and systematic theory by several scholars. Gneusis and Peter Gay played important role in

Habermas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는 현대사회에 들어 의사소통 과정에서 생겨난 적신호, 장애물을 논의한다.

  근대철학 이후의 주체와 대상의 분리라는 이원론은 결국 주체의 분열을 가져온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기도하며, 인식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묻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인간의식을 이드(id),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로 나누기도 한다. 최근 뇌연구에 의하면 좌뇌와 우뇌는 분리되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필요에 의해 중간의 연결을 끊어주기도 한다고 한다(수술을 통해). 하버마스는 이러한 분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해 놓자는 가정을 해놓고, 다시 이를 통합하자면 기존의 가정을 깨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완벽한 주관도 없고, 완벽한 객관도 없이 서로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성이라 부른다.

  “인식주체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실체들을 객관화하여 대하는 태도는 더 이상 특권화될 수 없다. 상호이해의 패러다임에서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의 행위이다.이들은 언제나 세계 네에 있는 존재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눔으로써 자신들의 행위계획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자아가 언어행위를 실행하고 타자가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 이 두 사람은 상호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주체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와 주체 간의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그의 관심의 의사소통에 왜곡된 요소나 장애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에 의하면 현대사회는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관료제에서 처럼 진리가 아니더라도 명령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절차와 행동이 규정된다. 이러한 것은 개인 생활에 까지 침투된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 부른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의 맹목적인 힘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하버마스는 이성을 훨씬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성을 인지적(도구적) 영역, 규범적(도덕적)영역, 표현적(미학적)영역 세 가지로 구분하고,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인지적 영역의 이성의 비만상태를 비판적기능(규범적, 표현적) 영역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해방에 있다는 계몽의 틀을 유지하면서, 이성이 스스로 뿌린 씨를 스스로 걷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