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과서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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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욱이는 우리나라 역사가 깊고,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단군 왕검이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2) “그러나 순결은 성숙한 성 의식을 가지고
남녀 모두가 지켜야 하며, 결혼 전에는 물론 결혼 후에도 지켜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지킨다는 뜻에서 순결서약서를
쓰고, 서명해놓자.” (3)“서구의 개인주의 사상이 잘못 받아들여져 몰공동체적, 몰사회적 이기심이 팽배하고 있다. 노사 모두 기업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여 노사분규가 심화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개인 및 집단이기주의가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 (4)“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서구 제국과 우리나라의 사회 구성의 차이이다.… 학급도 역시 당연히 마찬가지 형태를 지녀야 하다.… 따라서 그 단체를
규율하는 규범은 교사의 인격에서 배어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망각하고 서구류의 개인주의적 자율자치로 빠져서는 안 된다.”


내가 시험보면 빵점 맞을 교과서


위의 글은 4번을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사회, 중학교 기술/가정, 그리고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에서 뽑은 것이다. 내 관점에서는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편파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고대 신화를 역사적 사실처럼 설명해도 되는가? 형식적인 남녀평등론 뒤에 숨어 성적 억압과 수치심을
야기하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리고 노동자 개개인의 이익이 기업의 이익보다 중요한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정치학자로서
내가 보기에, 집단이기주의의 표출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내가 시험본다면 빵점 맞을 게 뻔하다.

몇년간 주의깊게 읽어본 초·중·고의 교과서 내용은 한마디로 문제투성이다. 사회, 역사, 도덕, 윤리 등 공공성에 관련된 교과서는 지루하고
근엄한 문장, 단순한 사고, 나열식 구성, 브리핑식 요약,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욕심(능력은 그에 턱없다), 선언식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수없는 무의미한 추상적 개념과 용어가 짧은 책에 범벅이 돼 있는데도 학생들은 교과서를 다시 한번 ‘요약’한 자습서로 공부하고
시험친다. 가령 “청소년기에는 신장과 체중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는데, 이를 청소년기의 ‘성장급등’이라고 한다”는 식의 동어반복 설명이 태반이다.
학생들은 네 글자에 밑줄 치고 그것을 무조건 외운다.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성,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배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스며드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탐구하려는 의욕을 꺾고 독립적 사고를 말살하는 특정 이데올로기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답은 절대적이고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학생들은 물론 그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공론의 장에서 통용되는 이데올로기 코드와 실제 언행과의 심각한
괴리문제가 발생한다).

필자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따라서 현행 교과서가 ‘거짓’이고 출판 금지되어야 한다고 우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아니 국가만이 발생할 수 있는 교과서에서 매우 주관적이고 당파적인 주장이 절대적인 선 혹은
진리로 전제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진리’조차도 차후에 하나의 해석이나 편견의 결과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특정 설을 반영하는 특정한
주장이 보편타당한 논리인 것처럼 쓰여져 있다. 더구나 현행 교과서는 대체로 지배엘리트에게 유리한 편파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어떤 교과서도
‘편파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국가가 교과서를 독점하여 그러한 특정한 의견을 보편적 진리로 설파하는 것은 정당한가?


‘황국신민교육’의 왜곡을 실천하는가


최근 논란이 된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의 ‘왜곡’은 한심한 수준이다. 그것을 견제하지 못하는 한 일본사회가 선진국이 되기는 어렵다.
자업자득이 될 게 뻔하다. 그렇지만 한국의 ‘국정 교과서’의 왜곡은 일본 ‘검인정’의 왜곡과 비교하여,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 해도, 오십보
백보 아닌가? (4)의 글은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에서 만든 ‘황국신민교육의 원리와 실천’(1939)의 일부다(오성철 교수의 한 저서에서 허락없이
재인용했음을 밝힌다). 21세기 한국의 교육이야말로 여전히 ‘황국신민교육’의 ’왜곡’을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럴 때 예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욕한다던가? 들보 제 머리 안에
주입하는 ‘극기훈련’을 위해 스스로를 24시간 스파르타식 감옥에 가둬놓았던 예지학원의 어린 영혼들. 그저 아프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당대비평 편집위원 href=”http://dragon.taejon.ac.kr/~kwonhb”>http://dragon.taejon.ac.kr/~kwonhb

아무것도 모른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알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그럴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이해에서 오는 것이고
이해는 지식에서 오는 것이며 지식은 관심에서 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관심으로부터 그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가려 해야 하고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마음으로, 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나는 이 신비주의의 색을 띈 한 학자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유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인데 그 일체감이란 소유를 통해서는 획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 관념이 개입되는 사랑이란 사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 대상을 나와 일치시키는
데에 있다는 결론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기실 우리들의 사랑은, 적어도 이성간의
애정으로 국한시키자면 그 소유 관념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랑에서
오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상처는 이 소유 관념에서 나온다.
어떠한 양태의 소유이든
그것은 일정 정도 그 대상을 사물로서 파악하는 것이 수반된다.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나 그 대상이 인간일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우리가 고민하는
현실의 병폐들은 대개가 인간을 사물로 파악해 버리는 데에서 연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돈이나 유용한 자원으로 파악할 때, 나와 대상으로서의 인간 사이에
지옥의 불구덩이가 치솟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라는 관념으로부터 완벽히
초월해서 살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는 매순간마다 긴장과 고민의 끈을 느슨히 해서는
안된다.

생각이 여기쯤까지 미치니 흔히 발견하는 연애감정에서의
이성에 대한 소유욕이 본질적인 것이면서도 경계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이 나를 위한 도구로서 파악하는 형태 – 나르시즘도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 , 또는 내가 그 대상에 속한다고 파악하는 형태 – 그것은 상대를
소유한다고 파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 나은 것이 아닐까 – 로서 그려진다면 그것은
사랑은 소유라는 관념에 함몰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소유하려 하는 만큼 나는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라는 말도 떠오른다.) 내가 사랑하려 애쓰는 – 분명 사랑은
애쓰고 노력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 대상에게 소유라는 관념은 활력소가
될 수도, 해악이 될 수도 있다. 활력소와 해악은 소유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 양면 사이에서 어느 쪽이 나올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랑하려는 대상에게 쏟는 진실만큼이나
필요한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 나는 그 또는 그녀와 사랑할 것인가 고통의 구덩이로
뛰어들 것인가.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벽을 허물 것인가 침범하거나 반대로 영원히
담을 높이 쌓아버릴 것인가. 이 또한 진실한 노력과 긴장의 고삐에 달렸다.

애석하게도 내가 떠올리는 사랑에 대한 원론은 현실적으로
거의 적용불가능 상태이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합일된다는 것은 관념적 환상일 뿐이고,
이해와 지식, 관심이라는 말도 범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원론일 뿐이며, 소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긴장이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자본주적 구조가
우리의 인식 틀에 깊숙이 박혀 있는 지금에는 더더욱 그렇다. 나의 개똥 원론에 적용한다면
우리네 사랑은 거짓이고 허위일 뿐이다. 그러면 우선은 이같은 지껄임들을 이룰 수
없는 이상이라 하자. 그러나 이상은 현실을 견인하는 동력이다. 언제나 그 이상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추구할 때만이 나는 쉼없는 변화라는 진리 아닌 진리의
과정 속에 동참할 수 있다.

나는 사랑을 다른 존재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그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알고 싶어하며 그렇게 구해낸 존재의 소묘를 빌어 그 존재를 이해함으로써
그 존재와 나 사이의 울타리를 유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구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염치2

김규항 칼럼

영화감독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은 매우 특별한 사회적 환대 속에 그들의 영화를 시작했다. 그 특별한 사회적 환대란 대개 그들의 출신대학과 약간의(아주 약간의) 80년대 이력을 근거로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식있는 엘리트’의 자격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들의 데뷔작 <성공시대> <칠수와 만수> <세상밖으로>는 그들에 대한 사회적 환대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오늘 그들의 필모그래피는 갈수록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를 비껴간다. 장선우의 최근작은 섹스로 정치를 말한다는 <거짓말>이다. 그런 해석에 대해 장선우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곤 했지만, <거짓말>에 대한 그런 해석 역시 장선우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가 관련되어 있다. 장선우가 만든 영화엔 어떤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전문가들(서구 전문가들의 한국어판인)이 협력함으로써 <거짓말>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감각의 제국> 따위 이른바 섹스로 정치를 말했다 공인된 영화들의 계보에 등재된다.

<거짓말>은 그런 영화들과 같은 계보에 등재될 자격이 있어 보인다. 다만 <거짓말>을 비롯, 섹스로 정치를 말했다. 공인된 영화들은 섹스로 정치를 말하는 영화의 계보가 아니라 포르노도 사회물도 아닌 정체불명의 활동사진의 계보에 등재되는 게 좋겠다. 그 영화들은 섹스로 정치를 말하고 있다는 주석이나 해설을 지참하지 않고는 그 영화들 스스로 섹스로 정치를 말하고 있음을 드러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정체불명의 활동사진들은 현실 속의 구체적 변혁 의지를 포기한 일군의 유럽 살롱좌파들이 자신들의 열패감을 마스터베이션하기 위해 마련한 자폐적 이론 집착증(포스트 맑스주의니 문화과학이니 하는)의 영화적 변종이다.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장선우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전문가들은 변화무쌍한 예술적 천착이라고 한다. 상식의 입장에서, 그 필모그래피는 어떤 진지한 예술적 천착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야 말겠다는 변덕무쌍한 욕망에 가깝다. 요컨대 장선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기회를 믿기 어려울 만치 제멋대로 사용하는 참으로 염치 좋은 사람이다. 그런 염치 좋음은 박광수(의 최근작은 역사적 사건의 역동성을 믿기 힘들 만치 정교하게 거세해 보인 <이재수의 난>이다)나 여균동(의 최근작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 이 영화는 왜 만들어졌을까만을 생각게 하는 <미인>이다)에게도 어김없이 해당한다.

내 영화 내 맘대로 만드는 데 무슨 상관이냘 수 있겠지만, 그들이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를 사양하긴커녕 적절히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그런 가치중립적 권리는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이 변했으니 영화도 변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한다면, 나는 세상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삼십오년째 세상과 변함없는 긴장을 이루는 한 좌파감독의 이름을 떠올리고 싶다. 그는 켄 로치다.

한국영화의 비극은 다름 아닌 켄 로치가 없다는 것이다. 유례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수렁에 빠진 한국에, 수많은 80년대의 좌파청년들이 영화에 투신했다는 한국에, 자본주의와 긴장을 이루는 한명의 감독이 없다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의 슬픈 비극이다.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이 받은 특별한 사회적 환대는 한국의 켄 로치에 대한 기대였다. 사회는 그 ‘의식있는 엘리트들’이 영화라는 무기로 세상과 긴장하리라 기대했었다.

어쩌면, 그들에 대한 그런 기대가 애당초 허황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는 분명히 근거가 부족했고 그 특별한 사회적 환대에 신뢰감을 심어준 그들의 데뷔작들은 그 제작 시점에서 어떤 분투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사회가 그들을 포기하든 그들이 사회적 환대를 포기하든 그들과 사회 사이에 지속되어온 이 염치 좋은 코미디는 이만 끝내는 게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켄 로치를 기다리도록 하자.

김규항/ 출판인 drumbeat@hana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