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000년 12월호

실천은 언제나 더욱 실천적이어야 한다
: 강준만 선생님의 답변에 대한 나의 해명

홍윤기(동국대 교수·철학)

강준만 선생님에 대한 두 가지 감사

월간 『인물과 사상』 2000년 10월호에 실린 저의 글을 두고 쓴 강준만 선생님의 11월호의 답변 <실천은 늘 옹색하고 누추하고 조잡하다>를 잘 읽었습니다. 저로서는 12월호의 이 지면을 빌어 선생님께 두 가지 일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아무도 모르는 원고의 망명’을 흔쾌히 받아들인 강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결단 덕분에 한 인문학자 또는 철학하는 자로서 저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익명의 독자들에게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진지하게 공론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원고의 죽음’으로 끝나버렸을 저의 힘든 작업이 강 선생님 덕분에 알만한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소문의 탄생’으로 거듭 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3년 동안 만들어오던 『당대비평』을 급작스럽게 떠난 데서 오던 뼈아픈 상실감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시장의 정치’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더욱 감사드릴 일은, 요즘 세상에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기도 바쁜데, 어느 독자 말대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철학적 문장으로 꽉 찬 ‘따분한’ 글을 “아주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어 주셔서, 저의 글이 또 다른 차원에서 공론화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손수 열어준 것입니다.

제가 ‘반입장의 입장’을 쓴 근본 동기 중 하나는 사실 ‘강준만식 글쓰기’에 들어가 있는 비판의 방식과 내용을 철학적으로 보다 명료하게 개념화하고 명제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면에서 참으로 조폭하게 보이는 강준만 현상의 저변에 놓인 우리 시대 영혼의 한 측면을 판독하는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문제의식의 중요한 당사자가 직접 답변하고 그에 대해 다시 필자로서 해명을 하는, 우리 시대의 영혼을 탐색하고 조율하는 그런 경험이 아무 때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마움을 배경으로 강 선생님의 답변을 찬찬하게 훑어본 결과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각종 움직임들에 대해 강 선생님과 저 사이에 본질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적지 않은 이견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견 중 상당 부분은 제가 좀더 사려 깊게 의견을 정리하고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했더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선생님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점 유감을 표함과 동시에 선생님의 깊은 이해를 구합니다. 그런데 저의 해명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곁다리 얘기를 드려야겠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 11월호에 실린 선생님의 답변과 『신동아』 11월호에 실린 강 선생님과 조성식 기자의 인터뷰를 저뿐만 아니라 저의 아내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터뷰에서는 주로 제가 선생님의 비판자로 등장하게끔 글이 짜여져 있는데, 선생님의 반론과 답변을 주의 깊게 읽어본 아내가 드디어 저에게 항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강 선생을 그렇게 몰인정하게 비판해서 상처를 줘요?! 내가 보기에 강 선생 말이 맞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변명과 반박이 몇 번 오가다가 제가 눈치챈 사실은 어! 이거 잘못 얘기했다가는 이제 ‘원고’ 정도가 아니라 ‘내 몸 통째로’ 어디론가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될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입니다. 한 쪽에서는 홍윤기의 강준만 비판이 맵지 않다고 쫓아냈는데, 그 보다 더 가까운 다른 쪽에서는 몰인정하다고 들고일어나 아예 집 밖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참 비판이란 작업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혹시 저의 이 번 비판이 실패하여 선생님한테 가면 이 번에는 지면이 아니라 선생님 자료실 한 구석에 슬리핑백 하나 펼 자리라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시되는 상황입니다.

실명비판은 계속, 더 많이, 더 심층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제가 강준만 비판에 나서게 된 기본적인 배경과 맥락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강준만식 글쓰기가 문제 많다고 하더라도 2000년 상반기처럼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언론계와 지식인계, 기타 시민운동권에서 벌어졌던 것과 같은 비교적 광범한 연대 움직임이 여론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홍윤기의 강준만 비판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의 관찰로는 현재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이 짧은 시간 안에 몇 가지 단계를 경과한 것 같습니다.

우선 강준만식 글쓰기로 출판을 통해 독자층의 주목이 모아진 가운데 사이버 세계에서 잠재적으로 결집되었던 안티조선 움직임이 『조선일보』 창간 기념일 시위로 일차 표출되고 ‘나를 고발하라’는 일반시민의 공격적 광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여기까지는 명백히 3년 동안 지속되어 거둔 ‘강준만식 글쓰기’의 성과라고 봅니다. 이 단계는 어떤 운동에서든 필요한 “여론 저변층의 신뢰성 축적 단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7월 초 황석영 선생님의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가 기폭제가 되어 결국 『조선일보』 기고 및 인터뷰 거부로 나타나는 식자층의 집단적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는 단지 강준만식 글쓰기가 아니라 『조선일보』 문제를 겨냥하여 사회적으로 산재했던 여러 복합적인 움직임이 급격하게 응집되는 과정입니다. 실제로 지식인들이나 시민운동권의 이런 움직임은 『조선일보』 자신에게도 좀 위협적으로 비쳐졌는지, 지난 9월부터 서울 시내 주요 간선도로를 운행하는 시내버스에 일제히 『조선일보』 선전광고가 부착되기에 이릅니다.

제가 선생님의 글쓰기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조선일보』를 둘러싸고 어쨌든 사회적 차원에서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반입장의 입장’에서 손석춘 선생의 말을 빌려 썼듯이, “특히 가장 가열차게 『조선일보』를 비판해 온 강준만 선생의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을 중심으로 한 안티조선의 활동방식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될지도 모를 운동의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약간의 심도 있는 고찰과 비판이 필요하다고 믿어진다. 지금까지는 ‘언론권력의 힘이 막강한 상황에서 더불어 싸워야 할’ 강 선생과 ‘비생산적 논란을 벌인다면 말 그대로 적전 분열이기 십상’이라 말을 아껴왔던 상태에서 벗어나 필자 나름대로 그 성과를 측정하고 과오를 비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분명한 것은 저도 미력하나마 비판이라고 할 때는―우리 강 선생님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반드시 실명비판을 해오던 터라 그 어떤 경우에도 선생님의 ‘실명비판’을 반대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저에 대한 답변에서 “홍 선생님은 진실로 제가 ‘조직자의 연대 마인드와 기획력을 갖고 비판에 임했더라면’, 즉 실명비판에 임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적어 마치 제가 선생님의 실명비판 작업을 전적으로 부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강 선생님이 『신동아』 인터뷰에서 저의 글을 원용한 조성식 기자 물음에 답변하면서 “홍윤기 교수께 한국 지식계에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냐, 그게 바람직하다고 보시냐, 묻고 싶어요”라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당연히 한국 지식계에는 ‘침묵의 카르텔’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침묵의 카르텔은 본래 식민지 시대 이래 근 90년에 걸친 제국주의 지배, 냉전, 그리고 독재 밑에서 비판의 권리를 강제로 혹은 반(半)자발적으로 포기당한 가운데 지식인의 생존 논리로 체질화되어 왔습니다. 침묵의 카르텔은―강 선생님이 더 잘 알다시피―지식인의 사회적 입장 표명은 물론 학문의 자생적 발전도 억압하는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경우에 따라 침묵의 카르텔은 그것을 훼손하는 시끄러운 사람들을 침묵 속에서 매장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실명비판은 각 지식인에 대해 그 학문적 성과의 질적 검증은 물론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자행할 수도 있는 비지성적, 비학문적 작태 또는 퇴행적 의식이 무책임하게 논문이나 작문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행태들을 추적하는 데 꼭 있어야 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견지에서 저는 실명비판은 계속, 더 많이, 더 심층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권력을 포함한 시민사회 권력”이 “매명주의나 ‘조직 이기주의’에만 탐닉하고 있다”는 증거만 있다면, 실명비판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아주 유효한 방도라는 데는 이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명비판, 그 이상의 실명비판으로서 강준만식 글쓰기

문제는 해당되는 ‘인물’에 대한 강 선생님의 ‘실명’비판이 그 ‘실명’이 거론된 인물과 구체적으로 별 연관이 없는 듯한 ‘지나치게 일반화된 명분 또는 근거’에 의거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강 선생님은 한국 지식계와 시민운동 단체들을 보면 “매명주의의 포로가 된 집단과 개인들”이거나 또는 “탐욕스러운 조직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 “훨씬 더 많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자신이 “누구에겐가 ‘매명주의’라는 딱지를 선물할 때엔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다고 주장하십니다. 저도 강 선생님이 구체적 개인이나 단체를 두고 이런 저런 비판을 가할 때 되도록 풍부한 자료작업과 무엇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비판에 임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런 선생님의 비판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조선일보』에 대한 강준만 선생의 비판이 빈곤하다고 했을 때 그것은 『조선일보』에 기고한 진보적 지식인에 대해 강 선생님이 선·악 이분법적 기준을 적용해 나온 ‘결론’에 관한 것이지 그 비판 과정에서 제공된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이 문맥적 차별이 선명하지 못했던 점에 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분명히 “강준만 선생의 글쓰기는 ‘오버’가 아니라 그 자체 큰 실책”이라고 썼는데, 분명히 강 선생님께서 “의도적으로 도발하기 위해 쓴 표현”이라 “어떤 비판도 감수하겠다”고 언명하고 용서를 구하셨습니다만,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를 두고 한 다음의 매도성 언설을 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강 선생님은 월간 『인물과 사상』2000년 6월호에서 특히 참여연대를 지목하여 “한국의 시민운동 지도자들이 명예욕에 사로잡혀 언론에 대해 비굴하게 구는 정도를 넘어 언론과 아주 추악한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쓰셨습니다. 이런 매명주의 비판에 대해 박원순 변호사님이 쓴 답장을 강 선생님은 단행본 『인물과 사상 15』에 공개하면서 자신이 이런 “딱지를 선물한 근거”를 여러 가지 제시하였습니다. 참여연대가 자기 조직을 놓고 신문들이 낸 오보들에 대해 한 번도 항의하지 않았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정당인 한나라당과 연대하여 특검제 도입을 꾀한다, 언론개혁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말로만 급진적인 개혁을 부르짖는다, 내부적인 비판문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등등이 그 근거에 해당됩니다. 제가 보기에 강 선생님의 이런 지적 중 수긍하지 못할 얘기는 하나도 없습니다만, 단 이런 지적들 중 참여연대를 “명예욕에 사로잡힌” 매명주의 단체로 비판할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강 선생님이 하신 비판은 매명주의가 아니라 우리 시대 시민운동의 허약함 또는 부실함의 맥락에서 이해될 성질의 것으로, 그런 시각에서의 비판으로서는 대단히 훌륭하고 적절한 비판입니다. 다만 그 비판이 참여연대를 매명주의로 딱지 찍을 근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겨우 『조선일보』를 상대로 기고와 인터뷰를 한 행위를 걸고넘어지면서 남의 인생과 명예를 집중적으로 매도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극구 단언하셨습니다만, 실제로 박원순 변호사님에 대한 비난의 직접적 동기가 “『조선일보』와 인터뷰하셨더군요. 그 전에 『월간조선』과도 인터뷰를 하셨죠?”라고 추궁성 질문을 하는 데서도 밝혀지듯이 『조선일보』와의 관계에서 촉발되었음은 분명합니다.

한 마디로 참여연대에 대한 매명주의 비판은 강 선생님이 하신 여러 ‘빗나간 비판들’ 가운데 압권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올바른 비판에 부당한 결론이 기묘하게 결합된 이런 강준만식 비판이 결코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판 근거와 비판 결론이 서로 어긋남으로 인해 강 선생님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비판 내용은 시작에서 사라지고 선생님의 글쓰기 방식이 대신 집중적으로 문제되는데, 사실 강 선생님이 공개하신 박원순 변호사님의 편지 내용도 강 선생님이 지적하신 시민운동 단체로서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적 검토보다는 선생님의 비판 방식에 대한 인간적 유감 표명이 압도적이라 적이 서글펐습니다. 결국 두 분 사이에 오간 언설만으로 볼 때 박 변호사님의 반응은 강준만식 비판이 실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박 변호사님은 『조선일보』 반대 2차 지식인 서명에 참여하셨지만, 그 참여가 강 선생님의 도발에 못 이겨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나의 매명주의 비판은 효과를 보았다 라고―그걸 리 없지만―주장하신다면 좀 과장된 언사일 것입니다.

강 선생님께서 선생님에 대한 저의 비판이 “너무나 혹독하여……비교적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저의 해명이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제 비판이 강 선생님이 다른 분들에게 한 비판보다 더 혹독한가는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모욕이냐 아니냐 하는 판정은 인간의 양식에 입각해 공개적으로 논의해 보면 그야말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비판이 그렇듯이 비판 작업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궁극적 판정자는 비판을 주고받는 당사자라기보다 그것을 주시하는 공중(公衆)입니다. 이 제3자에 대한 배려야말로 저는 시민적 양식이 객관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분업과 연대를 위하여

그렇다고 제가 강 선생님을 시민적 양식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절대 절대 아닙니다. 실제로 강 선생님이야말로 실명비판을 통해 한국 지식계의 반(反)시민적 작태를 적절하게 비판해 오셨습니다. 제가 한 세대 지난 뒤에도 살아있어 21세기에 막 들어섰던 오늘 이 시점을 회고해 달라고 하면 저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아 그 때 강준만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와 함께 하며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문제를 문제삼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지!’ 따라서 선생님이 선생님에 대한 저의 가혹한 진단에 “동의하시더라도” “여태까지 해 온 사회참여적 글쓰기를 중단하겠다”고 저에게 엄포를 놓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있고 실책도 있는 법인데, 서로 뻔히 알고 가끔은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의도적으로 실책이나 실수를 새삼 거론하여 중요한 작업을 중단시킬 배짱, 아니 야비함만은 저에게 없습니다.

저는 강준만식 글쓰기를 우리가 겪어야 하는 비판 경험의 중요한 한 국면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꾸로 강 선생님도 다른 이가 다른 스타일로, 다른 문제 맥락에서 진행시키는 비판을 존중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강 선생님은 김우창 선생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중요한 계기’가 그 분께서 “선생님의 ‘공격적 글쓰기’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신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강 선생님이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인용한 김우창 선생님의 문제 발언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전투적 글쓰기 혹은 공격 담론은) 그 자체로 의미 부여가 가능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현실적 효용가치보다 좀더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이 더 유효할 것입니다.”/“현실적 효용가치보다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이 더 유용하지 않겠는가. 충격보다 가치중립적 관점을 지향하는 차원의 비평이 더 긴요하다. 객관성과 보편성은 모든 담론의 핵심이다. 물론 주관적이고 공격적인 글쓰기도 그 나름의 의미부여가 가능한 작업이기는 하다.

김우창 선생님의 이런 언명은 둘 다 “대학 내부에서 충동 회피, 즉 교수간 또는 사제간 비판의 부재가 대학 낙후의 더 심각한 원인이 아닌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저는 강 선생님이 김우창 선생님에 대한 다른 미공개 정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와 같은 문제 맥락에서 나온 김우창 선생님의 위 언명들이 강 선생님의 ‘공격적 글쓰기’를 폄하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역지사지하여, 강 선생님이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비평보다 현실적인 효용가치가 더 유효하다”라고 얘기했다고 하여 누가 그것을 강 선생님이 김 선생님을 폄하했다고 하겠습니까? 선생님은 “∼가 ∼보다 긴요(유효)하다”라는 식의 비교법 표현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셨지만, 중요한 것은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단 하나의 지름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학계와 대학계의 문제를 비판할 때 김우창 선생님 같은 분부터 먼저 과녁으로 부각되면 학내에서 운신폭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 같은 문제성 언론임에도 왜 하필 『조선일보』부터냐 하는 그 진부한 물음들에 대해 선생님이 어떻게 답해 오셨는가를 상기해 보면 충분할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학내에는 진짜 실명비판해야 할 구악(舊惡)의 잔재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강 선생님은 주로 제도권 언론에 부상한 관심사를 추격하여 주목을 받는 혜택을 누려 오셨습니다만, 진짜 중요한 비판을 실명으로 행하는데도 언론에서 단 한 줄조차 보도하지 않는 무시당한 비판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견지에서 저는 사안에 따라 비판의 분업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비판들 사이에 연대가 결성되어야 하며, 가능하면 진짜 비판되어야 할 새로운 문제영역들이 이제는 공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비판 전선이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실천적인 실천을 지향하며: 비판의 사회화와 ‘지식인 제 몫 찾기’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선생님만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선생님이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말을 빌어 “잠시 제가 받은 모욕과 상처를 치료할 동안만이라도” “그럼, 니들이 해봐!”라고 좀 섭섭한 폭언(?)을 하셨지만, 다른 쪽에서 하신 말을 들으면 그 애교 있는 폭언이 강 선생님의 진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조성식 기자와 인터뷰에서 박원순 변호사님이 강 선생님을 두고 “운동의 현장에 나가 다른 사람들 얘기도 들어 보라”고 반박한 것에 대해 “제가 언론비판을 하는 데, 전혀 언론비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너 언론 비판 해 본적 있어, 없어’라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니죠”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마따나 “’현장에 있냐 없냐’는 기준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비판을 경청하지 않겠다는 오만한 자세”입니다. 여러 군데에서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다보면 가끔은 피곤할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홍 교수 당신은 그래도 비판이라도 해봤으니 알만 한 것 다 알텐데 웬 헛소린가’라고 나무라면 별로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강준만 선생님의 3년여 비판작업을 보고 이 시대의 동료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나름대로 자기 앞의 몫을 해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웬만한 지식인은 지금 웬만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면서도 제가 생각하는 식의 ‘연대’는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우리가 처해 있는 적나라한 현실”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 선생님의 지적과 판단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면서도 시력 나쁜 눈이나마 약간은 부릅뜨고 한 가지 사족만 덧붙이고자 합니다.

저는 솔직히, 강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양심적인 지식인 모두가 연대하여 『조선일보』에 기고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언론매체와 관련된 객관적 상황, 즉 자본, 독자 구성, 구독률, 사회적 영향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는 우리 분단체제 문화의 한 구성요인으로 참으로 굳건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분단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조선일보』의 태도에는 큰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지식인들 사이에 어느 정도 집단적인 호응을 받고 언론 매체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 『조선일보』 견제 움직임으로 인해 『조선일보』의 사회적 위상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비판의 사회화라고 봅니다.

강 선생님이 이 언론매체에 관해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 “꼭 거쳐야 할 일” 또는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을 기초로 닦아놓았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그 기초 위에서 누가 어떤 일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가를 구상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책임 있는 비전과 확신’이라고 다소 허황된 말을 하여 강 선생님으로부터 그건 “종교”나 아니면 사이비 정치인이나 할 일이라고 그야말로 ‘폄하’를 당했습니다만, 제가 뜻했던 바는 그 어떤 완결된 청사진이 아니라 강 선생님 자신이 축적해 온 비판의 자산과 그 내부역량을 마치 주식 상장하듯이 사회적 공중, 특히 지식인 사회와 대중 사회에 다 같이 상장하는 절차를 밟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선생님이 좀 피곤하여 같은 주제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점을 잠시 지적하였습니다만, 현재 안티조선 그룹 안에서 강 선생님의 위상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단독적입니다. 그리고 강 선생님을 통하여 지식인 사회를 보는 법을 배운 저변의 대중들이 이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 지식 자체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경우도 사이버 공간 상에서 간혹 눈에 띠기도 합니다. 지식인 비판이 지식의 거부로 나아가면 실천의 지평이 급격히 왜소해집니다. 대중 안에서 지식인의 정당한 위상을 보여주는 기획이 아쉽습니다. 강단 지식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를 추진한 역량이면 ‘지식인 제 몫 찾아주기’를 할 수 없을까요?

저는 실천이 “옹색하고 초라하고 누추하고 조잡하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늘” 그렇다는 데는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천은 언제나 더욱 실천적이라야 하고, 궁극적으로 실천은 언제나 자기변화를 통해서 타자의 변화를 유발하는 그런 넉넉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강 선생님은 현재 이 순간 제가 말한 식으로 ‘실천에서의 자기변화’를 기도할 그런 도약 단계에 올라와 있다고 감히 진단해 봅니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7)

 [자보칼럼] 가족주의를 넘어서

이장규
(nlflee@chollian.net)

교육이민에 대한 씁쓸함

  요즘 언론 등에서 이른바 ‘교육이민’문제가 심심찮게 논의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비인간적인 입시경쟁과 학벌절대주의 풍토에 대해 절망감을 느낀 사람들이 그 해결방법으로서 아예 우리 사회를 떠나는 이민을 생각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할 말 안 할 말 마구 하는 신문’ 조선일보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조차, 사람들이 이민을 떠나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정체성의 혼란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이민을 가는 것도 ‘불순세력들’ 때문이란 말인가? 혹시 조선일보는 산불 나는 것도 붉은 색 좋아하는 빨갱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척 궁금하다)

  조선일보의 헛소리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교육이민이라는 사안 자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척 씁쓸하다. 과연 그런 식의 해결방법 밖에 없는 것일까? 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이민을 무슨 조국을 등지는 배반행위 쯤으로 생각하고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무한경쟁과 연고주의만이 판치는 이 처참한 사회를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그들의 행위를 ‘그래도 내 조국’이라는 무반성적 애국주의의 틀로써 단죄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놈의 얼어죽을 ‘조국’이 도대체 우리에게 그간 무엇을 가져다주었던가?

  내가 씁쓸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육이민이라는 해결책 그 자체가 그들을 떠나게 만들었던 한국사회의 비인간적인 입시경쟁이나 학벌 및 지연 위주의 연고주의의 근본적 뿌리라 할 수 있는 가족주의의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조차 가족주의적인 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는 마치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그런 권력을 가지면 된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식의 해결책 속에서는 가족주의나 권력의 행사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논의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식의 해결책이나마 가능한 사람들이 한국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되는가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그대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최근의 교육이민 사태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에 기반한 여러 현상들이 마침내는 그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여온 중산층에서조차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모색 등 이와 관련된 제반 논의는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는 아직까지도 미약한 편이며 이미 언급했듯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조차 대개는 가족주의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90년대 내내 거대담론의 극복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한국인의 일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회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가족주의의 문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는 이런 현실이야말로 우리 지식사회의 제반 담론들이 아직까지도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가족주의 – 한국적 근대의 핵심 기제

  가족주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게다가 보다심각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개별가족의 차원을 넘어서서 혈연이나 지연, 학벌 등에 의한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의 수준으로 확대됨으로써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사회문제들을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가족주의야말로 전근대와 강고하게 결합된 근대라는 한국적 현실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족주의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만 고유한 현상은 결코 아니며, 이른바 ‘가족의 가치’에 대한 옹호는 서구에서도 우익들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치의 하나이다. 또한 가족주의를 매개로 한 한국사회의 전근대성이란 언술 역시 자칫하면,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개인주의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이 진정한 근대라는 식으로 이미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근대의 완성’이라는 문제틀 속에 함몰될 위험성도 있다. 사실 서구에서조차 ‘근대의 완성’이란 하나의 이념형일 뿐, 실제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근대와 결합하지 않은 완전한 근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자본주의’나 ‘공정한 시장원리’가 환상이듯이 ‘근대의 완성’이란 것도 일종의 환상일 뿐이며, 근대를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자본의 논리는 오히려 그 속에 자기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전근대를 중요한 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들을 감안하고 본다 하더라도 현재 한국사회의 가족주의는 그 역기능이 너무나 많이 나타날 정도로 심각하다. 앞에서 이미 언급된 교육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누구나가 문제로 느끼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교육열은 단순히 입시 위주의 교육체계라든지 서울대로 대표되는 학벌 위주의 사회질서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입시 위주의 교육체계는 변화되어야 하며 현재 서울대가 누리고 있는 과도한 특권적 지위는 혁파되어야 한다. (서울대 문제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나는 현재의 서울대는 해체하고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 순수학문과 기초과학만 국립대로 남겨서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법대나 의대 등 소위 ‘잘 나가는’ 학과들은 국가의 지원이 없더라도 알아서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할 것이다. 추후 얼마든지 개인적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실용학문 분야에까지 전국민의 세금이 지원되어야 하는가? 이런 말을 하면 무슨 대학을 다녔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꼭 있는데 나는 서울대 출신이다) 그러나 현재의 과도한 교육열 현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집단적이고 공공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신분상승을 통한 개별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향상만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가족주의가 이러한 교육열의 배후에 기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별적이고 가족주의적인 해결방식 그 자체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다른 어떤 해결책도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문제의 공공적 성격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족주의의 결과이면서 또한 동시에 그 가족주의를 강화하고 합리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는 일전에 어떤 잡지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각 가정이 깨끗한 물을 마시기 위해 생수나 정수기 등에 지출하는 비용을 모두 합치면 우리 국민 전체가 깨끗한 수돗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공투자재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지적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을 더 벌어서 더 좋은 정수기를 살지언정 생수 사먹는 돈으로 세금을 좀 더 낼 테니 국가가 책임지고 이런 일을 해달라는 식의 해결책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탓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선 꼬박꼬박 세금 내봐야 대부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 세금이 국민 개개인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간의 우리 역사에서 국가권력이란 개개인을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이었거나 잘 봐주어도 하는 일없이 세금만 축내는 집단이었을 뿐이며, 이런 국가에 대한 불신은 워낙 뿌리깊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어서 국가 따위엔 기대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가족주의적 해결방식은 틀림없이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타당성을 가지는 방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가족주의적 해결방식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오히려 확대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으로 개개인과 개별 가족의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각자 능력껏 해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 속에서 사회 전체의 공공적 이익이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문제의 전체적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누구나 입시위주의 교육현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자기 자식만은 기필코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닥달하는 이율배반 속에서 우리의 교육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지 않는가?

   가족을 위한 희생?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과도한 가족주의는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이라는 자기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가족의 구성원인 개개인에게 전혀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민이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 그만큼 소망스럽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한국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듯 하며 이는 단순히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간 지속적으로 유지·강화되어온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가 마침내는 개별 가족 스스로에게조차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는 생각이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들을 개별 가족의 차원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은 모든 이들을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몬다. 결혼을 해서(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지만) 한 가족을 이루고 난 후 우리들의 삶이 어떠한 식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신혼 초기의 달콤함은 순간일 뿐,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 우리는 정신차릴 새도 없이 거대한 수렁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당장 육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나마 친정이나 시집에 맡길 수 있으면 그래도 괜찮지만(이 역시 가족주의적 해결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럴만한 처지가 못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육아는 말 그대로 ‘전쟁’에 가깝다. 애가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에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믿을만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찾아서 주변을 온통 전전하고 다녀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처절한’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이 문제가 개별 가족의 차원을 넘어 사회가 공공적으로 담당해야 할 영역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처절한 노력을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내 자식만은 남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만 한다는 식으로 거꾸로 가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젊은 부모들은 시설이 안 좋다는 이유로 그나마 있는 국공립 유치원에도 보내지 않고 비싼 사립 유치원을 찾아다니면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일에 매달리곤 한다. 자식에게 보다 ‘훌륭한’ 교육을 시키기 위해 본인들의 ‘처절한’ 노력은 감수하는 이 놀라운 희생정신 — 이걸 언제까지 찬양만 하고 있을 것인가? 하기야 지난 개발독재 시기에 우리의 누이들이 이런 식으로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해 준 것이야말로 박정희의 진정한 위대성이라고 떠들고 있는 이인화 같은 이들에겐 씨도 안 먹힐 이야기지만.

  맞벌이가 아닌 부부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도 없다. 전업주부라는 이유로 육아의 책임을 모두 떠맡게 되는 여자 쪽의 경우, 자신이 집안에 있는 만큼 자식들에게 더 신경을 써서 남들보다는 낫게 키워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개별 가족의 능력에 맡겨지는 상황에서 가족의 경제적인 측면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 내의 가부장적 질서에 알아서 순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맞벌이 부부에게서도 이런 가부장적 질서는 강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전업주부일 경우 더 심한 것이 일반적이다) 남자 쪽에서도 다른 가족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시켜야만 하는 가장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양쪽 모두 집 안팎에서의 노동 중독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가족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실제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이며 모든 문제를 개별 가족에게만 떠넘길 게 아니라 이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 필요함에도 이를 위해 가족 단위를 뛰어넘는 노력을 모색하기보다는 다른 가족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존의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녀 쪽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런 식의 가족주의는 오히려 그들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너희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요즘은 공부가 아닌 다른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긴 했지만 본질은 마찬가지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는 실제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므로 쉽사리 거역하기 힘든 것이 되고, 그런 가운데 대다수의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기를 쓰고 부모의 요구에 따라가다가 그 요구를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게 되면 급격히 좌절하거나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부모와 주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각인되어 온 가족제일주의는 그들이 하나의 독립적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으며, 많은 청소년들을 머리 속에서는 가족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가족에 따르기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신적 아노미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는 신화는 결코 찬양할 것이 못된다. 가족주의에 기반한 이 신화는 오늘날 청소년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노동 중독에 빠뜨린 주범이며, 많은 사회적 의제들이 공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되는 것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부닥친 문제는 결코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혼자서 기를 쓰고 해결하려 할 게 아니라, 공공적 논의로서 제기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 더 첨언하자면, 나는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한국언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의 핵심적인 기능은 공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의제의 설정 및 여론의 형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언론은 수많은 사회문제들을 본격적인 공론의 장에 끌어내기보다는 피상적인 사실보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거니와 조선일보 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임에도 기존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의제설정 그 자체를 아예 묵살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바 있지만, 언론이 바뀌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자 한다)

  확장된 가족주의와 지역감정

  한국사회의 가족주의는 주로 개별 가족의 층위에서 작동하지만, 개별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자기 주변의 친척이나 친지, 지연이나 학연 등을 통한 연고자에게까지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즉, 우리 사회에 만연한 — 흔히 빽이라고 표현되는 — 연고주의의 폐해 역시 본질적으로는 또다른 가족주의의 일종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연고주의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임에도 원론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지역감정의 문제에 대해 가족주의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의 맹목에 가까운 지역감정을 언급하면서 흔히들 이는 아직까지  한국사회가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며 대중들이 지역감정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해에 따른 계급적 자의식을 획득할 때만이 진정한 근대적 주체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지역감정이란 어떤 물적 토대의 반영이라기보다는 대중의 의식 속에 아직까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전근대적 잔재의 표출이며, 이런 비합리적 정서에 따라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전혀 대변하지 못함에도 단지 같은 지역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 좌파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식의 접근에서는 지역감정의 해결책 역시 대중의 계급적·정치적 각성 및 이를 추동할 수 있는 보수 대 진보의 이념정당구도 확립을 그 방안으로 내놓게 된다.

  물론 이런 지적은 틀린 말은 전혀 아니다. 나 역시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이념정당구도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의 대답이 실제로는 일종의 순환론에 빠져서 아무런 실천적 함의를 갖지 못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진보정당이 없어서 지역감정이 지속되고 반대로 그 지역감정 때문에 진보정당이 성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지역감정의 창궐과 진보정당의 미성숙간의 상호악순환에 빠지게 되면 실천적으로는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또한 이런 사고방식 속에는 지역감정이란 전근대의 잔재일 뿐 실제로는 아무런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식으로 일종의 관념론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런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도 반영하지 않는 관념이란 없다. 글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완전한 근대’란 일종의 환상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그 안에 필요한 만큼의 전근대를 포함하고 있다. 지역감정이란 바로 이런 전근대와 긴밀하게 결합된 근대라는 한국적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면, 한국사회의 확장된 가족주의에 의해 공공적 자원의 상당부분이 지역 연고에 따라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현실이 바로 지역감정의 물적 토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확장된 가족주의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는 서구에서라면 사회적 시스템의 차원에서 접근이 이루어질 사회복지의 상당부분을 가족이나 친지들이 담당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못사는 친척이나 친지에 대해 적당한 수준에서 도와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저런 연고를 통해 자기 주변에 여유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기본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결손가정이나 노인문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가 처참할 정도로 사회복지분야의 예산과 사회안전망이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IMF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생각보다는 사회문제로 발전되는 정도가 약했던 것도 한국에서는 국가가 담당해야할 사회복지의 상당부분을 친척 내지 친지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결국 우리 나라에서는 자기 주변의 누군가가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도 그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서구에 비해 아주 높은 편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국가로 대표되는 공공부문의 자금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정식 예산 이외에도 각종 공공기금이나 공사 등 준국가기구가 관장하는 준예산성격의 자금은 우리 나라 정도의 경제규모에서는 매우 큰 편이며, 이것은 대개 정치적으로 배분된다.(정책적 차원에 의해서건 개인적 차원에 의해서건) 즉, 특정지역이 정권을 잡고 있으면 그 지역민들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공공적 자금의 떡고물을 나눠가질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시스템으로 접근되어야 할 사회복지의 문제가 자기 주변에 얼마나 힘센 사람이 있느냐의 문제로 바뀌어 버리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는 지역주의에 기초한 투표행위란 것이 나름대로는 충분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반영이 되며 이에 따라  자기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정당을 지역주의에 의해 지지하는 ‘이변’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지역감정의 극복이란 단순히 계급적 자의식을 가지고 진보정당을 지지해달라는 설득만으로는 가능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극복되고 시민적 합리성이 제대로 형성되어야 해결될 문제이며, 당장에 있어서는 강력한 부패방지법의 제정과 예산의 철저한 감시를 통해 공공적 자금이 권력과 가까운 인사나 지역에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것을 차단하는 한편 사회복지 시스템의 제도화를 통해 지역이 아닌 생활수준에 근거한 공공적 자금에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결국 지역감정의 물질적 토대를 허무는 일이 될 것이며, 이런 과정들 속에서 진보정당의 성장도 가능할 것이다.

   가족주의를 넘어서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는 빠른 시일 내에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솔직하게 말해 아직까지는 비관적이다.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단순히 가족주의를 극복하자는 설득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며, 개별 가족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의 접근과 문제해결이 내 가족에게도 실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구체적 경험들이 쌓여갈 때에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나 사회적 권력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은 오랜 역사적 기간을 통해 축적된 것이어서 이런 측면에서의 접근 자체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믿을 것은 내 가족뿐이며 국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라는 사고방식이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불신을 넘어서는 전망을 보여주고 그것이 구체적인 경험 속에 각인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들을 개인이나 개별 가족 차원의 무한경쟁을 통해서 해결하지 않더라도 국가나 시민사회라는 공공적 영역에서의 논의를 통한 사회적 해결책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일부분이라도 이런 해결책이 실제로 관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를 위한 전제로서, 이런 사회적 해결책에 관련한 공공적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공적 의제로 설정함으로써 공공적 논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의제설정기능을 가지고 있는 언론 전반의 개혁이 요구된다. 둘째, 개별 가족의 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시민사회 일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적 합리성을 형성시킬 수 있도록 제반 시민단체의 활동 속에 실제로 시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게끔 해야한다. 셋째, 제반 사회적 해결책의 미흡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의 대사회적 발언을 조직화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기업별 노조(이것 역시 임금상승 등을 통한 개별 가족의 경제적 이익증진을 주내용으로 하는 일종의 가족주의적 기제이다!) 체제에서 벗어나 산별노조를 건설하면서 사회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넷째, 이런 사회적 해결책들이 실제의 정책으로 관철되기 위해서는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힘있는 진보정당이 존재할 때만이 가족을 넘어선 문제해결의 경험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다.

  네 가지 중 어느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가 다른 분야의 성장을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내면적으로 상호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먼저 힘을 집중한 다음 순차적으로 나머지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사고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네 가지 모두가 같이 진행되면서 구체적인 성과들을 만들어 나갈 때만이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 신화는 조금씩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이자 중학교 교사이자 이 사회의 시민인
김인규 씨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단하라!!

누가 지성적이며 저항적인 작품에 ‘음란함’을 덧씌우는가? 누가 ‘외설적인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선택한 ‘중학교 선생님’의 몸에 ‘음란함’을 덧칠하는가? 지난 26일 서천 비인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중인 작가 김인규 씨가 서천경찰서에 긴급 체포된 사건은 우리 사회의 몰상식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작가 김인규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작품 중 작가 자신과 부인의 나체를 찍은 사진에 대해 ‘음란물 유포죄’를 적용한 이번 처사는, 굳이 예술작품의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이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인규 씨는 그 동안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작품을 소개해왔던 바, 이번 그의 체포에 결정적인 사유로 지목된 ‘문제의 사진’은 작가 김인규가 ‘몸’에 대해 상업적이고 남성 편향적인 우리 사회의 ‘외설적인 시각’에 던진 하나의 외침이다. "신데렐라가 될 수 없는 우리의 몸"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작가 김인규 씨의 홈페이지에 나타나는 전 작품과의 연관을 볼 때 ‘반성적인 시선’을 마치는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는 사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품의 의미를 판단하는 데 앞서,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의 예술적 비판력과 상상력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폭력이며, 전 사회를 퇴행시키는 만행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자신의 나체를 반성적인 시선으로 촬영하여 전시회를 열거나 도판을 만들어 배포한 수많은 작가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또한 이들의 작품이 평단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김인규 씨의 작품이 ‘음란물’로 규정되어 법적인 제재를 받아야 한다면, 그들 모두가 ‘음란물’을 만들고 유포한 범법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이들 사진이 사회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모두 범법 행위라면, 같은 이유로 인간의 신체를 그린 모든 그림은 작가 구속의 ‘증거물’로 밖에는 기능할 수 없게 된다. 당장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린 누드화와 인사동, 청담동 화랑에 걸린 수많은 작품은 모두 떼어져야 한다. 이는 ‘몸’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잃어버리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며,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사회인 김인규 씨에게 가해진 악의적인 탄압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중학교 미술선생님으로서의 김인규 씨는 최초 홈페이지에서 이 사진을 삭제하거나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던 바, 이는 작가의 양심과 사회인으로서의 신분 중 하나를 택하라는 극히 폭력적인 주문인 것이다.

우리는 반성적인 작가 김인규 씨가 ‘열성적이고 창의적인 미술교사’라는 평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한 김인규 씨에 대해 그의 작품을 이유로 교단을 떠나라는 주문은 지극히 비교육적인 주장임과 동시에 교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주문은 ‘몸에 대한 반성’을 하는 모든 작가에게서 ‘사회권’을 빼앗는 심각한 폭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김인규 씨에게 가해진 언어폭력,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은 괜찮지만 홈페이지는 안 된다"에 대해서도 우리는 시민의 이름으로 분노한다. 이미 화랑과 미술관이 시민들의 삶에서 멀어진 현재, 인터넷에 작가의 작품을 올리고 이를 시민들과 함께 토론하는 문화는 예술과 시민의 삶을 소통시키는 작업으로, 오히려 시민들의 문화 향수권을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의 공공적인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작업은 음향·시각·글자들이 서로 어울려 새로운 체험을 하도록 만드는 예술행위로 이를 통해 시민들은 스스로의 상상력을 계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시민들의 문화적 향수권과 새로운 감각의 체험을 ‘음란한 상상력’을 이유로 단죄하려 드는가?

우리는 반성적인 작가 김인규 씨, 서천 비인중학교 미술교사 김인규 씨, 시민의 문화 향수권을 향상시키는 김인규 씨가 모두 무죄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한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작가이자 선생님이자 시민인 김인규 씨에 대한 법적·물리적·정신적인 모든 탄압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나갈 것임을 밝힌다.

2001. 5. 28
도서관운동연구회, 독립예술제사무국, 동성애자인권연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인터넷분과, 민족미술인협회, 민주노동당,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 부산정보연대PIN, 성남청년정보센터, 새사회연대,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안티조선우리모두, 우리만화발전을위한연대모임, 여성영화인모임, 영화인회의, 인권운동사랑방, 인터넷신문대자보, 전국공권력피해자연맹, 전국민조노동조합총연맹, 전국아마추어만화동아리협회, 젊은만화작가회, 진보네트워크센터, 통신연대사이버권리팀,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 평화인권연대, 학생행동연대정보통신연대I’m,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만화가협회, 한국만화탄압비대위, 한국민족음악인협회,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끼리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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