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구슬프다고 느끼는 것은 추워야 할 겨울에 얼어야 할 수증기가 허무하게도 그냥 땅까지 닿아버리기 때문이 아닐까…ㅠ.ㅠ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4-24 21:22)

내 친구와 나눈 짤막한 대화 때문에 내 생각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비약과 단절, 폭력, 극단 등으로부터 비롯하여, 이 영화에 대한 해석 역시 이 영화를 닮아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세간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만큼 그 영화가 현실에 대해 지니는 자세가 논쟁적이라는 뜻일 게다. 나 역시 한쪽 끝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듯하고 나는 양극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제서야 어느 한쪽에 자리잡은 듯한 느낌이다. 한쪽 끝에 머문 만큼 독단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써 본다.

1. 영화는 왜 불쾌를 일으키는가?
영화는 시종일관 한 여성이 일종의 지옥 속으로 무참히 빠져드는 과정을 친절한 설명 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 안의 세계에서는 선화에 대한 그 어떤 동정도 없으며 암묵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는 듯한 폭력이 그녀를 포획할 뿐이다. 우리는 거기서 기타 다른 장면들의 폭력성보다 더한 진정한 폭력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주체할 수 없는 불쾌를 느낀다. 그것은 미학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이기도 한 불쾌감이다.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는 단아한 여대생이 6만원짜리 인생으로 전락하여 사회의 일반에서 이반으로,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한기의 일상으로 강제적으로 편입당한다. 더구나 한기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의 폭력을 사랑이라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는 어처구니없는 내러티브를 목격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책임한 폭력에 나도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여기서 불쾌는 지워지지 않는다.

2.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지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선화에 대한 일방적인 가학이 서서히 마조히즘적인 수긍으로 전화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설령 한기가 선화를 사랑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 이 영화는 모종의 이상적 가치에 대해 철저히 반명제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그 모든 자극적인 이미지로 착색된 이 영화는 자신의 반명제로서의 위치를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이 영화가 우리의 감각에 기입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쓰레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그 자극성 역시 쾌가 아니라 불쾌를 가져다주는 요소인 바에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 그러나 우리는 내러티브만 찬찬히 따라가는 수동성만 담지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다른 김기덕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 자체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의 불친절함이 영화가 주는 자극만 고스란히 받아내지 말라는 권고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쓰레기 같음, 즉 자극성과 폭력성을 그 자체로만 우리 몸에 기입하는 것은 이 영화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스스로가 현실의 모방이 되어 현실의 은폐된 실재, 부정하고 싶지만 결코 부정되지 않는 엄연한 실재를 관객이 단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 이 영화의 언어를 그대로 몸에 기입하면 단지 확인에만 머물 것이다 – 인식함으로써 폭력적 현실을 은폐하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바깥에서 폭력 그 자체를 묵도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다시말해 이 영화는 자신이 구축한 분열되고 기만적인 세계 속에서 오히려 현실 세계를 바라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생각들, 내 기대를 철저히 거스르는 화면을 보면서 왜 그 비난을 현실로 재환원시키지 않고 영화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긍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현실에서는 그 어떤 진정한 사랑의 관념에도 부합되지 않는 추악한 폭력이 사랑으로 가장하고 있으며 설령 내 사랑의 정수를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여도 일그러진 이데올로기에 장악된 현실은 그 사랑을 일그러뜨려 보내진다. 사랑하여 결혼하면 여성은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에서 이중차별을 받는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과잉 교육열과 치마바람으로 일그러진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진짜 좋아해서 하는 행동이 상대에게는 스토킹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극단적으로 말해 ‘사랑해’라는 말을 전하면 상대에게는 ‘십새끼야’가 되어 가닿는 것이다.

3. 양날을 가진 면도칼
지금까지 이 영화에 대한 변호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거치면서 일어날 진정한 생성의 가능성을 말했다. 그러나 기실 이 영화가 온갖 불친절하고 부정적이며 위선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영화 그 자체의 부정할 수 없는 정체이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유독 여성에게 가혹한 점과 가학-피학-자학의 트라이앵글이 공고한 점은 그 자체로 쟁점이 될만한 추악한 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어쩌면 김기덕의 무의식이 그러한 설정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만든 영화는 그의 내적 구조에서 떨어져 나가 나름의 구조를 획득하여(나는 이것이 한 작품의 성립에 필요한 단절의 첫 단계라고 본다), 특유의 불친절함과 자극성을 가지고 우리에 대해 타자성을 획득하여 자신을 생소하게 일그러진 실체로 보도록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타자성을 느낄 수 없다면 내 관점에서는 그의 영화와 맺는 불운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 그대로 부정적인 면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난을 영화 자체에도, 다시 현실에도 돌릴 수 있는 것이 관객의 권위이다. 이 권위를 어디에 사용하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일까. – 이를 통해 관객의 심성구조와 미적 취향의 경중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와 현실,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획득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갈 방향타가 있다면 어디로 잡아가는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해 모색하는 의미로 받아주기 바란다 – 영화를 잠시 머물다갈, 그래서 현실에서는 잊어버릴 가상으로만 사용하는 것과 이 수없이 창궐하는 가상들을 현실과 관련지어 나의 생성 안에 참여시키는 데 사용하는 것.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치열한 공방도 양자 사이의 줄다리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디어”
(에르빈 파노프스키)

현시에서 재현으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의 예술은 감각적 자연의 외적 재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의 바탕에 깔려 있는 초감각적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것이 중세 예술의 과제였다. 그 결과 중세 장인들의 창작은 자연과의 직접적 대면을 통해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예술가가 자기 내면의 이미지를 재료에 투사하는 과정이었다. “예술은 세 개의 차원 위에 서 있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도구 속에, 그리고 예술로부터 형태를 얻는 재료 속에.” 라는 단테의 말은 중세의 장인들의 예술의지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에 반해 르네상스의 문헌들은 초기부터 예술의 과제가 현실의 직접적인 모방임을 강조한다. 체니노 체니니는 자연의 습작이 회화를 이끌어주는 “가장 완벽한 지도자”라 불렀다. “산을 잘 그려서 자연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거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커다란 바위들을 취해, 네 통찰이 허락하는 바에 따라 거기에 명암을 주라.”(체니노 체니니 <회화론>) 여기에서 회화는 모델의 사용, 즉 자연의 습작과 함께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결과 르네상스의 회화론에서는 형식적이고 객관적인 정확성, 즉 진리충실성(verisimilitude)이 강조된다.

“회화는 그것이 재현하는 사물과 최대한의 유사성을 가질 때 상찬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연의 사물을 개선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자연의 진리충실한 모방이라는 관념과 함께 자연을 극복한다는 생각도 강조되었다. 회화가 자연을 극복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팬터지를 이용해, 켄타우르스나 키메라처럼 자연이 산출할 수 없는 형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지성을 이용하여 현실 속에서는 결코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는 미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자연을 충실하게 모방하라’는 요구와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선택하여 자연을 극복하라’는 요구. 르네상스인들은 ‘모방자가 되라’는 요구와 ‘교정자가 되라’는 이 두 가지 요구를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족적인 것으로 보았다.

“진리충실한 닮음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미를 부여해야 한다 (…) 고대의 화가 데메트리우스가 최고의 찬사를 받지 못한 것은, 그가 사물들을 마음에 들게 하기보다는 자연에 유사하게 만들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신플라톤주의자 피치노는 미를 “대상과 아이디어의 명확한 일치” 혹은 “물질에 대한 신성한 이성의 승리”로 규정하고, 이를 “신의 얼굴로부터 빛의 방사”로 설명했다. 알베르티는 이런 형이상학적 견해에 반대하며 고대의 순수 현상학적 정의로 돌아가 “미란 부분들 사이의 특정한 일치와 조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플로티누스 이래 중세의 미론을 이루었던 요소 중의 하나, 즉 미에 대한 실질적 정의(mateial definition)는 포기된다. 따라서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신플라톤주의가 회화론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가 초기 르네상스 회화에 끼친 영향은 “아이디어”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피치노에 따르면 ‘아이디어’는 형이상학적 실재다. 그것은 신의 마음속에, 천사의 마음속에 실재하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선(先)존재가 인간의 영혼 속에는 흔적으로, ‘인상'(formulae)으로 존재한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거의 꺼져버린 이 불은 “교육”에 의해 다시 피어오를 수가 있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 생득관념 혹은 본유관념 덕분이며, 이는 미에 대한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관념과 가장 많이 일치하는 하는 대상은 아름다우며, 우리는 감각적 현상을 우리 내면의 생득적 인상(formulae)과 비교함으로써 양자의 일치를 확인한다.

알베르티는 자연에 대한 습작 없이 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 관념을 강하게 비판한다. “아무리 훈련된 정신의 소유자라도 포착하기 힘든 저 미의 관념(=아이디어)은 훈련되지 않은 정신의 품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알베르티조차 신플라톤주의의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나, 여기서 그는 ‘아이디어’라는 관념을 변형시켜, 그것을 신플라톤주의에 대립되는 의미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알베르티가 보기에 미를 포착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은 오직 연습과 훈련에 의해서만 갖출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모방의 적절성에 찾는 견해는 성기 르네상스까지 이어진다.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기 위해 나는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아야 했다 (…)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들의 수는 너무나 적고, 또 제대로 된 판정자 역시 별로 없기에, 나는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어떤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그것이 어떤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떠올리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어떤 ‘내면적 아이디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아이디어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그의 머리에 떠오를 뿐, 그 자신은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물었다면 감각적 경험의 총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내면의 정신적 이미지로 전화한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라파엘의 아이디어는 초월적 근원이 아니라 경험적 근원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에게 경험 없는 아이디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아이디어가 경험에서 나온다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라파엘은 사실상 아이디어에 관한 경험주의적 설명을 주고 있으나, 그것의 근원을 명확히 밝히는 데에 주저한다. 바자리는 아이디어가 경험을 전제한다고 얘기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아이디어가 경험에서 도출된다고 말한다. “세 예술의 아버지인 디자인은 (…) 많은 사물들로부터 일반적 판정을 도출해낸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형태나 관념 (….) ” 여기에서 아이디어는 더 이상 예술가의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재규정된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  

그 어떤 상위의 실재를 전제하지 않고 주체가 의식적 노력에 의해 예술적 생산의 법칙을 획득할 과제를 갖게 될 때, 언제,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예술가가 정확한 법칙을 획득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마니에리스트들이 본격적으로 정식화하게 될 이  주체-객체의 문제가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직 정식화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의 사상가들은 이 문제를 이미 해결된 것으로 간주했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에게 ‘아이디어’는 객체로부터의 주체의 독립을 주장하는 근거 혹은 자연에 대한 주체의 우위를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인들에게 ‘아이디어’는 아직 정신과 자연의 타협으로 여겨졌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은 분리된 부분의 외적 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경험을 하나의 새로운 전체로 통합하는 내적 비전에 있었다. 여기에서 주체와 객체는 자연스레 상응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아이디어’라는 개념은 이미 후에 고전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상’의 의미를 띠게 된다. 알베르티와 라파엘은 ‘아이디어’라는 말을 자연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의 정신적 이미지, 즉 ‘미적 이상’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반면 바자리는 이 말을 예술창작의 바로 전(前)단계로서 예술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관념’, 즉 ‘제재’나 ‘주제’의 의미로 사용한다. 종종 이 두 가지 상이한 어법은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사용되기도 하나,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종종 전자 앞에 “아름다운”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논리적으로는 비교적 명확히 구별되는 이 두 개의 어법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상응의 관계가 있다고 상정되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한편 ‘아이디어’의 개념이 자연의 관찰과 연결되어 형이상학적 차원을 상실하면서, 서서히 오늘날 ‘천재’라 불리워지는 개념의 구성이 가능해진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창작은 이미 주체-객체의 모순적 관계로 여겨졌으나, 아직 그들은 창작과정을 지배하는 초주체적, 초객체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런 초객체적, 초주체적인 법칙의 존재는 주어진 법칙에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재능에 따라 법칙을 부여하는 천재의 개념과 모순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이디어’의 개념이 거기에 덧붙여져 있던 객관주의적 측면, 즉 형이상학적 차원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론’으로 나아가는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