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공개적인 ‘이념논쟁’을 제안하며
              
  최근 기성 정치권의 대선 주자들 간에 소위 “색깔논쟁”이 치열하다.
  민주당 내의 대선후보 예비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부상하자 이에 맞선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이념과 노선에 대해 공세를 취하더니만, 이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까지 가세하여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후보를 ‘좌파’로 몰아붙이기 시작함으로서 보수정치권의 이념논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작금의 색깔논쟁이 건강한 정책대결이나 생산적인 이념논쟁이 아니라 맹목적 인신공격이나 정략적 흠집내기로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민주당 내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이인제씨가 전세가 역전되자 하루가 멀다하고 노무현씨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도 안타깝고, 대세론이 흔들리고 당내의 경선구도가 급변하자 민주당을 통째로 좌파로 규정하고 인위적인 ‘보-혁 대결’을 조장하는 이회창씨의 모습도 구태의연 그 자체이다.
  뿐만 아니라 공세를 취하는 쪽도 문제이지만 정작 공세를 당하고 있는 노무현씨나 김대중 정부쪽의 태도도 문제이다.  
  양 이씨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는 노무현씨의 처지가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과거의 발언을 스스럼없이 번복하면서 정작 중요한 국가적 현안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는 모습은 과연 노무현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작금의 색깔논쟁은 정책과 노선을 기반으로 한 이념논쟁이 아니라 인신공격과 상호비방에 바탕을 둔 저급한 정치적 공방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이념과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해 온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논쟁의 한 축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번 논쟁은 기성 정치권 내부의 ‘더 보수’와 ‘덜 보수’의 반 쪽짜리 논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한 쪽은 ‘흠집내기’로 덤비고 또 한 쪽은 ‘피해가기’로 일관하는 모습은 당당하고 책임있는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고 반사적인 이익이나 노리고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치꾼의 모습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이념논쟁’을 벌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이제 이회창씨와 이인제씨는 남을 공격하고 비방하기 이전에 ‘보수’라면 보수에 걸맞는 그리고 ‘중도’라면 중도에 어울리는 자신의 이념과 노선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심판을 받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인의 도리이다.
  그리고 노무현씨는 더 이상 번복하거나 피해갈 것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길이고 더 이상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따라서 ▲재벌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조세개혁 ▲의약분업 ▲언론개혁 ▲공교육 확대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용산미군기지 이전 ▲차세대 전투기 사업 ▲남북관계 개선 등 중요한 국가적 10대 현안 문제에 대해 노무현, 이회창, 이인제씨와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간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토론을 가질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만약 후보들 간의 토론이 어렵다면 3당의 책임있는 당국자간의 당대당 토론회도 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색깔론을 들이대고, 진보를 얘기하면 좌파로 규정하고, 좌파는 곧 불순한 것으로 매도하는 낡은 매카시적 수법은 이제 우리 정치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이제 진보와 개혁과 중도와 보수가 각기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정체성을 구체화한다면, 우리도 보수 일색의 낡은 정치구도가 아니라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우리 정치 발전의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여야의 대선 후보들에게 ‘상호 비방’이 아니라 ‘상호 비판’을 통해 그리고 ‘정치 공방’이 아니라 ‘정책 대결’을 통해 ‘구시대적 색깔공세’가 아닌 ‘생산적 이념논쟁’을 할 것을 촉구한다.

                                  2002. 4. 8
                                  민주노동당

이인제 후보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색깔 장난’ 중단해야할 8가지 이유
[정대화 교수의 긴급제언] 이 후보와 그 캠프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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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지난달
30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남 경선이 열렸던 마산실내체육관에서 개표가 발표된 뒤 세 후보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 볼테르. 제정
치하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비판하고 자유와 진보를 추구했던 볼테르는 그가 신봉하는 자유의 정신을 이렇게 설파했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사상을 억압하는 어떠한 행동에 대해서도 함께 투쟁할 것이다."

프랑스의 격조높는
사상과 철학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최근 상황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노무현이
좌파라니… 듣는 좌파 기분 나쁘다." 민주노동당 사람의 가벼운 반응이다. 댓거리할 가치도 못느낀다는 투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좌파냐?" 그러나 본전도 못뺐다. "선생이라는 사람이 어째 질문이 그리 천박합니까?"

"글세,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겠는데 자꾸 후보가 그런 이야기를 하네요." 마산 경선에서 만난 이인제 후보측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음모론’
나왔을 때도 해명이 안돼 곤란했는데 ‘색깔론’까지 나오니 답답해죽겠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노무현이 좌경이면 몇 년간 한 솥
밥먹고 지낸 이인제는 무슨 색깔이냐? 불고지죄 해당사항 아니냐."

익산 경선 현장에서 만난 민주당 관계자의 이야기다. 한 마디 더
물었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고 이인제 후보가 계속 발언하지 않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가버렸다. "딴 생각을 하나보지
뭐."

"급진세력이 ‘좌파적’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이인제 후보의 흥미진진한 ‘좌경’ 이야기 마당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동석했다.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현정부에 ‘좌파적’ 정권, 노무현 진영에 ‘급진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인제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상황인식이 5년만에 다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밴드웨곤’ 효과(bandwagon
effect)라고나 할까,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 이념논쟁에 무임승차해 불로소득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념논쟁이
벌어지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30년간 군사독재정권의 이념공세에 시달려온 민주당 안에서 이념논쟁이 불거지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념논쟁을 못할 것도 없고 꼭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이인제 후보측 말대로 유럽에서도 이념논쟁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과 다르다.

붉은 이념의 족쇄를 걸어 생매장시키는 ‘추악한’ 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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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노무현
후보ⓒ 오마이뉴스 권우성

중국 옛말에 남쪽의 귤이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이념논쟁은 유럽의 이념논쟁과 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목적 자체가 다르다. 유럽의 논쟁이 정책논쟁의 성격인 반면 우리는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이념공세’ 아니면 ‘사상단죄’로서 약하면 ‘때리기’고 심하면 ‘죽이기’가
된다. 붉은 이념과 사상의 족쇄를 걸어 상대방을 생매장시키는 마녀사냥의 ‘추악한 전략’이 우리 이념논쟁의 실상인 것이다.

경선
과정에서 ‘음모론’으로 시작된 이인제 후보측의 공세가 춘천 경선과 ‘사퇴파동’을 거쳐 ‘색깔론’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무한대의 ‘이념공세’로
발전했다.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 동포들에게 "이념은 뼈와 피 속에 박혀 있어 권력을 잡으면 본색이 드러난다"는 식의
절제되지 않은 표현은 지나친 것이다.

한국전쟁과 맞물려 미국에서 시작된 50년대 매카시 상원의원의 매카시즘 활동도 이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정부에 소련의 스파이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총과 칼을 사용해서 삼국지
식으로 자웅을 겨루던 것을 말로 겨루도록 한 근대정치의 제도적 장치이다. 말하자면 전쟁과 같은 폭력적 투쟁을 말로 하는 평화적 투쟁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다른 사람을 해치면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라 ‘총’이요 ‘칼’이다. 이인제 후보가 처한 경선의
딜레마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규칙을 벗어나 ‘금지된 장난’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본인 또한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인제 후보가 ‘색깔론’ 이념공세로 승리한다고 가정할 때 승리 다음에
무엇이 남을지를. 과연 남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고, 그것이 본인에게 돌아왔을 때는 엄청난 눈덩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념공세가 왜 부적절한 전략인가? 여덟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민주당은 보수정당이면서도
한국정치사에서는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정당으로서의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의 뿌리를 더듬어 가면 80년대의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60-70년대의 신민당, 50년대의 민주당이 나온다. 이 점에서 정치지도자 김대중을 표적으로 이념공세가 난무했다. 특히 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안으로 부각되면서 군사정권의 이념공세가 본격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인제 후보가 비록 민주당의 정통
출신은 아니고 그 고난의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상대로 이념공세를
펼치는 것이 민주당의 보편적 정서와 부합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과 당료, 당원과 지지자들이 이념공세의
피해의식에 가위눌릴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이념공세는 단순히 노무현 개인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그것이 확대 증폭될 경우 민주당 자체에 대한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후보는 자기의 정치적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자신의 정치적 토대마저 훼손하는 자가당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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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이인제
후보ⓒ 오마이뉴스 권우성

둘째, 이인제 후보는 97년 대선 패배 이후 일정한 과도기를
거쳐 국민신당을 들고 민주당에 단체입장했다.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정권의 창출에 기여했다"고 했다. 이 후보가
도운 김대중은 과거 사상시비의 핵심이었던 바로 그 ‘좌경’ 김대중이다. 이 후보가 김대중을 도우고 당을 함께 한다는 것은 정치인 김대중의 과거
사상시비의 피해의식에 공감한다는 뜻이고 볼테르처럼 함께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후보가 자기 당까지 들어바친 민주당 안에서
다른 동료를 이념공세로 밀어내려는 것은 김대통령과 김대중 정권은 물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안에서 김대중 대통령만한 ‘좌경’이 어디 있겠는가? 노무현은 비교도 안된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나왔던 사람들도 모두 정치인 김대중과
비슷하게 오십보 백보 아닌가.

셋째, 김대통령과 민주당이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다음 추진한 사업이 재벌개혁과 언론사 세무조사였고,
야당 시절부터 국가보안법 문제로 고민했다. 민주당이 노동자 정당은 아니지만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강령에 따라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이 후보가 재벌개혁이나 언론사 세무조사에서 특별히 역할을 한 것은 없지만 당의 지도자로서 함께 지지하고 동의한 셈이다.

이인제
후보도 문민정부에서 노동부장관 하면서 재벌의 ‘무노동 무임금’ 정책을 반대하였다. 이 후보식의 표현대로라만 일 안하는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자는
이야기는 월급을 공평하게 나눠갖자는 공산주의보다 훨씬 ‘좌경’ 아닌가? 그런 이 후보가 동료의 약간 ‘특이한’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 후보의 이런 발언에 대해 민주당 젊은 당직자 한 사람은 "눈감고 들으니까 이회창하고 똑같다"고 했다.

비판도
해야 하고 다른 후보의 발언을 문제삼는 것도 일리가 있는 행위지만, 그것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과 자신의 동지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면 당의 지도자로서 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이 후보는 제 발등을 도끼로 찍으면서 통쾌함을 만끽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모순적인 자가당착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후보는 지난 4년간 ‘좌경’과 동거한 것이다

넷째, 이인제 후보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서울도 아닌 시골에서, 경기고나 경복고도 아닌 상고를 나온 촌티나는 더벅머리
아저씨를 이념공세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실례된 표현이지만 대학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노무현 후보가 ‘좌경’이라면 민주당 사람들 대부분이 ‘좌경’이어야 하고, 민주노동당 사람들은 당 간판 내려야 한다. 이후보
또한 지난 4년간 ‘좌경’과 동거하면서 동조한 공범 ‘좌경’이 될 것이다.

표현을 좀 거칠게 하고 말을 세게 한다고 ‘좌경’이라면
박정희, 전두환이 훨씬 ‘좌경’이다. 이 후보가 여러 해를 이어 변함없이 존경해 마지않는 박정희가 진짜 ‘좌경’의 원조라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박정희의 해방 직후 뚜렷한 좌파행적일랑 제쳐두더라도 군사쿠데타 직후 펼쳤던 정책들도 이 후보의 눈으로 보면 ‘좌경’ 그
자체이다. 재벌개혁이나 언론사 세무조사 정도가 아니라, 이병철 씨 등 기업인들을 죄다 집어넣어 버리지 않았던가? 전두환도 그랬다.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고,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재벌그룹을 없애버리는 등 권력을 난폭하게 휘둘렀다.

박정희, 전두환이 한 행위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정도 되어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원조 ‘좌경’ 박정희를 ‘몸’과 ‘마음’으로 동경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개혁노선에
‘좌경’ 딱지를 붙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후보는 다른 사람의 ‘좌경’을 걱정하기에 앞서 ‘좌경’ 원조를 모방하려고 애쓰는 자기의 일관성
없는 처신을 먼저 다스려야 할 것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가장 으뜸은 수신이다.

다섯째, 이인제 후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념공세를 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념공세로 경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판 아닌가.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이겼다고
가정해보자. 이 후보가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민주당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겠는가? 이 후보와 함께 연말 대선을 수행할 동지들이 과연
누구일까? 이 후보가 어느 정당에서 누구와 함께 연말 대선을 치르려는 것인지 노선과 전략이 몽롱할 뿐이다.

한나라당과의 관계에서
개혁적인 동료를 급진좌파로 몰면서 자신은 급격하게 우선회하게 된다면 동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본인은 민주당 노선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민주당의 중심세력과도 절연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민주당의 핵심을 잃고 껍데기 후보 자격만 취득하는 승리를 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극히 낮으며, 설사 승리하더라도 본선에 갈 기력이 소진된 상처투성이의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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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
오마이뉴스 권우성

여섯째, "쪽에서 뽑아낸 물은 쪽빛보다 더 푸르다"고
했는데 이인제 후보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개혁정당에서 보수후보를 내는 셈이다.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노선에 이념공세를 취하고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요모조모 비판한다면 이회창 후보의 노선과 구별이 어렵게 된다. 그가 후보가 될 경우 결국 이회창 후보와 보수-보수의 보수적
대결구도를 형성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원조보수인 한나라당에 유리한 선거지형이 형성된다.

보수세력은 개혁정당에서 나온 얼치기 보수를
지지하기보다는 당과 후보가 보수로 일체화된 정통원조보수 한나라당을 지지하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이인제 후보가 출마하더라도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김대중정권을 향해 ‘좌파적 정권’이라는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가? 민주당 지지자들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을
것이고, 민주당을 한국의 민주화와 연관시켰던 당원과 지지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할 것이다.

보수세력은 ‘얼치기
보수’와 ‘정통 보수’ 자임세력 중 누굴 지지할까

일곱째, 이념논쟁은 아직 선언문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이념논쟁은 좌파를 배격하자는 것인데 존재하지도 않는 좌파를 배격하자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한반도에서 김정일보다 더한 조직좌파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식의 이념논쟁을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는 이인제 후보의
통일철학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김정일 위원장과 이념논쟁이라도 할 셈인지 모르겠다.

21세기는 민족통일의 시대이다. 강대국의 개입과
이념대립으로 분단되어 전 민족이 고통받고 있는 한반도에서 민족통일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분단의 상처를 보듬어 나가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특히 다음 대통령은 민족통일의 전도사일 수밖에 없는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남북관계도 아닌 남한 내부의 사소한 정책
차이를 참지 못하여 그것을 이념 차이로 붉게 도배질하면서 어떻게 북한과의 교류협력이나 민족통일을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덟째, 최근 논쟁에서 이념이라는 것이 매우 편향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인제 후보는 노무현 노선에 대한 시비의 근거로
중앙일보의 2월 초 조사결과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 상대평가일 뿐이다. 상대평가에서는 100점 만점에 10점 짜리가 A를 맞기도 하고
90점 짜리가 C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준거집단의 다른 사람보다 개혁적이라고 해서 급진이나 좌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중앙일보가 한 이념적 분류 자체가 문제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북한에 우파가 없는 것처럼 남한에는 좌파가 없는 반쪽짜리 정치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 0부터 10까지 이념구분을 한 것은 매우 허술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자면 좌파구간에 해당하는
0부터 5나 6까지는 비워두고 시작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좌파를 이야기하려면 박헌영과 김일성 정도를 거론하고 이들에게 0이나
1을 주어야 온당하고, 온건좌파인 여운형이나 조봉암에게 4에서 5 정도의 점수를 주어야 정확한 것이다.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이라지만
좌파가 없어졌다고 아무나 좌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정객의 개혁정책에 낡은 좌파상표를 갖다 붙이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념적 몰상식’
그 자체이다. 참으로 마른 먼지 나는 이야기지만 학창시설에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라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현역 정치인의 이념적 위치를 몇 가지 피상적인 정책의 차이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본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언론사의 상업적 동기로 출발해서
재미삼아 한두 번 해보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문적 엄밀성의 관점에서는 함정 투성이다. 이런 식으로 분류한다면 정당 명칭을 국가’사회주의’
정당(National Socialist Party)으로 한 나찌당의 히틀러는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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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영화
‘친구’를 본 떠 고등학생 복장을 한 노무현 후보 지지자.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음지의 냄새나는 이념공세를 양지로
공론화하자

후기 삼아 첨언하자면,

‘사퇴파동’을 전후해서 이인제 후보는 이념논쟁을 선거전략의 중심축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이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일부 보수언론이 이후보의 말을 빌어 이념논쟁을 일파만파로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인데다,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한 이회창 후보가 이념논쟁에 전격적으로 참가하는 등 상황이 추악하게 변질되어가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고 본말이 전도된다는 말이
있다면 지금 상황이 정확하게 그렇다. 선거에서 후보선택을 위한 정책평가가 중심이 되어야 할 시점에 후보와 정책은 뒷전으로 밀리고 따뜻한 봄바람을
황사가 막아버리듯 사상이념 공세가 난무한다면 국민들이 바라는 올바른 선거가 되기 어렵다.

민주당이 국민경선을 치르기로 했을 때
국민경선은 민주당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확대된 이념논쟁 또한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이념논쟁하자고 국민경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아픈 상처를 들추는 일이다. 이런 식의 저급한 논쟁은 그간의 민주적 개혁의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우리 사회를
이념적 석기시대로 후퇴시킬지도 모른다.

이회창, 이인제 후보에게서 볼테르의 관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축적해온 역사발전의 건전한 양식이 발휘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뜻으로 말해야 할 시점이다.

 

독자의견 중…

대학문턱에가도 가야 이념이 있습니까??
이정숙, 2002/04/06 오후 6:43:13
"대학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그참
기사를 읽다가 보니 기분 나쁘네요.
이념이, 그것이 아무리 거창해도 꼭 대학을 나와야 이념이 있습니까.
난 노후보가 그래도 귀하의
표현대로 대학 문턱에도 못갔다처도 누구에게도 뒤지지않는 확실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대학가는 것이 부모의 뒷바라지와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당시 노후보의 청년시절에는 가정환경이 더 큰 문제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요즘이야 상고가 좀 덜한 평가를 받지만
부산상고라면ㄹ 당시 수재들이 가는 학교축에 들었습니다.
문장을 좀 수정하심이 어떨지.
민주노동당 어떤 분 말씀마따가 선생이 왜 그리
천박합니까.

고대 로마법에 노예는 전쟁포로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노예제 사회였던 로마에 노예는 특정 인종에 국한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 제국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쟁 포로는 아마도 백인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노예는 흑인의 대명사이다. 왜 그럴까? 피부색이 다르고 다른 지역에서 사는 흑인들이 왜 그처럼 저열한 수식어를 부여받아야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측면은 부가 소수에게만 집중된다는 점이다. 자본이 자본일 수 있는 것은 부가 소수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그것을 다른 곳에 재투자할 수 있을 때이다. 보통 사람들(중산층)이 1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돈을 모은다고 해도 많아봤자 1-2억 이상 되기는 힘들다. 이 돈으로는 그럭저럭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들을 아쉬움 없이 누릴 수는 있지만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턱없는 짓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주변부에 속한다. 이들이 다수를 점하고 사회의 그늘에 구겨 박힌 주변부 인간들이 또 나머지를 점하고 남는 부분은 소위 중심부 자본가들이 자리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부가 집중되고 그들로 인해 한 사회의 부가 운영된다. 이처럼 위계적인 분배 구조의 형성이 자본주의가 태동기에 있던 16세기 유럽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월러스틴은 말한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를 ‘세계체제’라는 특정 경제체제의 형태로서 규정한다. 경제체제로서의 세계체제는 핵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구성된 차별적인 분배 구조를 다층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자본주의적 시장)이다. 서구 유럽이 하나의 세계체제를 형성하고 있을 때쯤 노예를 동원한 단순노동 분야의 사업은 반주변부 국가의 효과적인 소득원이었다고 한다. 주로 사탕수수 수확이나 금광 채굴에 동원됐던 노예 노동은 핵심부의 공업 도시 형성을 위해 필요한 다량의 식량 및 귀금속, 화폐 공급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또한 주변부, 반주변부 국가의 지배 계급이었던 지주나 귀족, 부르주아 등은 이 거대한 블랙홀의 일부분에서 충분히 이윤을 챙길 수 있으니 아주 그럴싸한 거래였다. 아무튼 그들은 노예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체제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로마 시대 노예가 자급자족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 시대 노예는 세계체제 내에서 거래될 상품의 생산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며, 더 궁극적으로는 그 지역의 자연, 사회, 경제, 인구가 어떻게 되든 (유럽) 세계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지역에서 노예를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는 유럽 외부에서 끌어와야 했고 그 주된 대상으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선택됐던 것이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노예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초기 1500만명 가량의 인구였던 멕시코 지역이 훗날 250만명 가량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고 한다. 인간으로 생각지 않고 착취하고서는 죽어나가자 아프리카에서 다시 노예를 – 아메리카인도 아프리카인도 전쟁 포로가 아니라 단지 세계체제 외부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 끌어왔다.
따라서 자본주의 성립기에 노예는, 마지막에는 흑인이었다.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노예는 흑인 – 조금 멀리 인디언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 뿐이었다. 아니, 유럽을 세계로 상정하고 공동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태동기의 노예들이었다. 인종주의는 그렇게 자신의 착취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기만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세계 체제 내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특정 국가, 특정 지역, 특정 계급에 국한된 일인 것은 자명하다. 당시 중심부 국가의 노동자조차도 정당한 임금을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해야 했다. 불평등한 분배구조, 부의 집중은 다층적, 복합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국가간, 미시적으로는 한 사회내 계급간의 불평등을 담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종주의는 세계체제 내의 착취 계급들에게 자신의 착취받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것의 은폐물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내 눈 앞의 착취는 ‘세계 바깥’의 착취를 빌어 가려졌던 것이다. 인종주의는 지배 계급에게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피지배 계급에게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을 망각케 해 주는 아편이었다.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거친 지금, 세계체제는 말 그대로 세계를 아우르게 되었고 세계 안의 나라들은 형식적인 자유, 강요된 세계화 안에 통합되어 있다. 로마가, 중국이, 몽골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세계 자체라는 관념은 말 그대로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지만 그 정확한 중심은 서구이며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제 각 사회가 다양하고 고유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믿었던 모순들이 궁극으로는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 와 있고, 이식된 모순 안에서 전체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순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그 모순을 지워버리는 데 더 익숙하다. 그래서 인종주의와 유사하게, 타인 또는 자신의 차별을 운명으로 여기라는 저열한 아편에 몸을 내맡기려 하는가 보다.

어제 어디선가 영국에 유학가면 어디선가 (아주) 가끔 돌이 날아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