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정연한’ 법은 정의상 ‘맹목적’이고, 무지하며, 특수한 열정들 위에 일으켜 세워져 있다.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어떤 특수한 것도 의미하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의미’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그/그녀 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기표를 통해서 결합된다.

天地不仁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구호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행동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없애는 일이다. 맑은 공기와 자유로운 공간에 대한 그의 욕구는 어떠한 증오보다도 강하다.
파괴적 성격은 젊고 쾌활하다. 왜냐하면 파괴한다는 것은 우리들 본래의 나이의 흔적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괴한다는 것은 사람을 쾌활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은 파괴하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완전한 환원, 아니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성격은 지속적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길을 보게 된다.
…또 그는 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언제나 교차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다음의 순간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현존하는 것을 그는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짝을 이루어야 해”와 같은 말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할 때,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연애 또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실천을 담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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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는 정신분열은, 말 그대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정신적 공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자아와 이론적․실천적 자아 사이에 일어나는 분열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후자의 분열이 비교적 간단한 수준에서 벌어졌다면, 요즘의 나는 전자에 입각한, 후자의 분열이기 때문에 더 복합적이다.
친구는 나를 이해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이해 못한다. 한편에서 나는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런 면에서 친구가 나를 이해하기 바라는 것은 ‘정상적이고 공식적인’ 주체로서의 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는가. 최대한으로 “나는 말할 수 없어”이어야 했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렸다. 나라는 주체의 오만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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