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도 비스타가 출시된 지도 오래됐고 나도 설치해서 쓴 지 한참 됐지만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유저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포스팅해 본다.
나는 필름스캐너를 현재 니콘 Coolscan V ed (LS-50 ed와 동일)를 쓰고 있다.
문제는 니콘 스캐너들이 아직 윈도 비스타를 지원하는 드라이버를 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녀석들이 스캐너쪽 사업을 접으려는 건지 도무지 드라이버 개발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비스타 운영체제를 쓰려는 사람들은 조금 길을 둘러 와야 한다.
하지만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니콘 드라이버를 설치할 때 설치파일(setup.exe 또는 Zip파일 자체)에 마우스 우클릭 – 속성 – 호환성 – 호환모드 – 이 프로그램을 실행할 호환 모드를 Windows XP(서비스팩 2)로 선택한 후 실행하면 된다.
(물론 다른 버전으로 해도 상관없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Nikonscan 4.0을 설치했고 4.02 Updater도 깔았다.
그리고 나는 실버패스트를 스캔 프로그램으로 쓰는데 현재 비스타 드라이버가 나온 스캐너들은 비스타 버전 프로그램을 내 놓고 있지만 역시 니콘 모델들은 XP까지만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냥 비스타에서도 이걸 받아 설치해도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간다.
조금 찝찝하지만, 잘 돌아간다.

추가(2008.03.23) : 니콘에서 드디어 비스타용 스캐너 드라이버를 내 놓았다. 물론 32bit용만이다. 이제 찝찝한 느낌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됐다.

Dressed To Kill 포스터
Dressed To Kill 포스터

같이 일하는 경록씨한테 드레스 투 킬 DVD를 구해서 다시 보게 됐다.
약 10년 전에 이걸 보면서 혼자 아주 열광했던 기억이 있고, 지금도 누누이 침을 튀기며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완전히 내 잘못된 기억, 착각이었다.
그건 그 유명한 박물관 시퀀스다.
중반부에 살해당하는 케이트 밀러 부인의 성적 욕망을 이 장면이 압축하고 상징하고 설명한다.
아들이 밤을 새고 난 뒤라 혼자 박물관에 가게 된 밀러 부인은 품위 있는 중년 부인의 모습으로 박물관의 작품들과 그걸 감상하는 사람들의 군상을 조용히 지켜본다.
한 가족의 어머니, 아내의 위치에서 잠시 벗어난 밀러 부인은 이 박물관에서 한 중년 남자에게 순간 끌리게 된다.
(이 남자는 갑자기 밀러 부인 옆자리에 와서 앉고 밀러 부인과 미묘한 눈빛을 주고 받는다. 밀러 부인의 욕망에는 둘 다 책임이 있어 보인다.)
발을 꼬고 탁탁 바닥을 치며 잠시 고민하다 그 남자에게 접근하려 하지만 이내 남자는 자리를 뜨고, 밀러 부인은 급히 그 남자의 뒤를 쫓는다.
(이 남자는 뒤를 힐긋힐긋 보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나 잡아 봐라 하는 것처럼. 결국 마지막에 이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건 밀러 부인과 중년 남자의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신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은 밀러 부인이 떨어뜨린 장갑이다.
장갑은 밀러 부인이 흘려 놓은 욕망의 물적 단서다.
밀러 부인은 한 번은 욕망의 대상을 따라 추격신을 벌였다면, 다른 한 번은 자신의 욕망을 다시 누르고 자신이 흘린 욕망의 단서를 회수하기 위해 추격신을 벌인다.
그러나 이 단서는 정확히 전해져야 할 사람에게 도착한다.
하나는 그 중년 남자에게, 다른 하나는 (밀러 부인의 욕망을 단죄할) 살인마에게.
달리 말하면 하나는 밀러 부인의 성적 욕망에, 다른 하나는 사건이 벌어지고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영화의 서사의 욕망에.
그러니까 박물관 시퀀스는 밀러 부인의 다른 한 쪽 장갑을 살인마에게 전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쨌든 이 박물관 장면은 중후한 음악과 매끄럽고 치밀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됐다.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한 어이없는 내 착각은…
이 장면이 한 숏으로 구성돼 있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그건 브라이언 드 팔마에 대한 나의 기술적 완성도의 표지 같은 믿음이었는데 이게 내 기억의 속임수였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스태디 캠의 매끄러운 움직임에 매료됐고, 그 완벽한 움직임에 대한 내 환상 같은 것이 이 장면의 여러 숏들을 물리적으로 이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퀀스는 영화적 환상을 보여주는 어떤 정점에 있다고 말할 만 하지만 말이다.

밀러 부인 옆에 한 중년 남자가 와 앉는다. 밀러 부인은 발을 꼬고 바닥을 톡톡 치며 심리의 변화를 보인다.
밀러 부인 옆에 한 중년 남자가 와 앉는다. 밀러 부인은 발을 꼬고 바닥을 톡톡 치며 심리의 변화를 보인다.
밀러 부인은 중년 남자와 미묘한 눈빛을 주고 받는다.
밀러 부인은 중년 남자와 미묘한 눈빛을 주고 받는다.
결혼반지. 밀러 부인의 심리는 지금 복잡하다.
결혼반지. 밀러 부인의 심리는 지금 복잡하다.
떨어뜨린 장갑.
떨어뜨린 장갑.
그녀의 장갑은 수취인에게 전해진다.
그녀의 장갑은 수취인에게 전해진다.
밀러 부인은 자신의 욕망의 증거물을 보고 반사적으로 놀라 도망간다.
밀러 부인은 자신의 욕망의 증거물을 보고 반사적으로 놀라 도망간다.
잠시 후 중년남자의 손에 자신의 장갑이 끼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드 팔마가 즐기는 분할화면.
잠시 후 중년남자의 손에 자신의 장갑이 끼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드 팔마가 즐기는 분할화면.
이 중년 남자는 도망가듯 움직이며 종종 뒤를 힐긋 본다. 밀러 부인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년 남자는 도망가듯 움직이며 종종 뒤를 힐긋 본다. 밀러 부인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중년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까지 밀러 부인을 유인해 냈다. 그녀의 장갑이라는 미끼를 하늘거리면서.
중년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까지 밀러 부인을 유인해 냈다. 그녀의 장갑이라는 미끼를 하늘거리면서.
그리고 밀러 부인의 다른 한 쪽 장갑은...
그리고 밀러 부인의 다른 한 쪽 장갑은…
살인마의 몫이다. 이제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을 위한 사전 준비는 완벽해졌다.
살인마의 몫이다. 이제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을 위한 사전 준비는 완벽해졌다.
택시 안에서의 정사.
택시 안에서의 정사.
그녀의 욕망에 대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물.
그녀의 욕망에 대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물.

http://yhhan.tistory.com/entry/어떤-포스트-구조주의자에게

http://blog.jinbo.net/chasm/?pid=34

http://blog.jinbo.net/chasm/?pid=22#more_anchor22

읽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복잡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젝이 항상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생각을 진전시키지도 못하고 몇 년을 떠나 보내 있어서인지도.
아니, 생각하는 데 게을렀던 시간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레비나스라는 양반은 진중권의 디빠 비판은, 똘레랑스와 비평의 합리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는 진짜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말인 거 맞겠지?
그리고 그 문제 중 하나는 디빠를 의식화된 다중으로 제대로 인정해야 하고, 그러한 다중이 되기 위해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대중이 다중이 되기 위해, 다시말해 주체가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고맙게도 링크로 찾은 캐즘님의 블로그 글은, 관용-똘레랑스라는 가치가 타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동일자의 질서 유지 기능을 한다는 내용은 정말 생각해 보게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타자가 주체의 (환상으로 유지되는) 일관성을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그럼으로써 타자를 규율하고 지배적 질서를 유지한다.
그 규율의 한계를 넘어서는 타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똘레랑스는 보수적이라는 거다.
타자의 주체에 대한 파괴적 본성은 똘레랑스가 넘어설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어두운 타자’, 즉 주체를 붕괴시키는 진정한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7-80년대 학출 노동자처럼 타자 속으로 뛰어 들어서 자신의 주체를 ‘죽이고’ 난 후 만들어지는 주체의 가치를 얘기한다. 이게 이제는 기억도 흐릿하지만 아직끼지도 풀리지 않는 암호처럼 나를 괴롭히는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단절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인가?)
팔레스타인 저항단체의 비행기 납치 사건에 대한 푸코의 발언이나 프랑스에서 벌어진 폭동 사례를 똘레랑스가 실패하는 예로 들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주변부 국가들의) 테러에 대한 (중심부 국가들의) 세계적인 반대 연합도 세계 공존이라는 똘레랑스를 얘기하면서-동시에 타자들의 치명적인 반항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중심부 국가의 지배를 유지하는 전략의 한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도 똘레랑스를 어떤 도덕적 선으로 생각했지만 내가 소수 의견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을 때 상대방의 똘레랑스는 내가 의도한 문제의 근원을 끄집어 내지 못하도록 봉합해 버리는 것 같은 찝찝함을 남기고는 했었다.
그런데, 책은 읽어야 하지 않겠니?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