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기덕
출연 : 조재현, 서원

이제서야 알았다. 그의 영화들은 유사한 테마들의 변주곡이었다는 것을. 새장 여인숙을 한기(조재현)과 선화(서원) 사랑이 영그는 곳으로 잡은 것, 창녀와 그의 포주 내지 깡패가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이 폭력으로만 표출되는 운명적 상황이 담긴 이미지들.
한기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성대를 잃었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물. 그는 항상 그러하듯 사회의 서출. 어느 한 여대생에게 품은 욕망 또는 사랑의 감정을 창녀로 만들어 자기 주변에 두는 것으로 표현하는 쓰레기 인간.
한 인간의 진심이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전달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과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인 욕망의 응집체인가 하는 것을 항상 그러하듯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김기덕.
대학생이라는 것이 지니는 사회적 고상함의 표상을 무참히 짖이기고 안정의 테두리를 무너뜨려 혼돈의 삶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상하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김기덕의 파괴적 힘.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한기의 진심을 알고 그를 따라 몸을 팔며 떠도는 선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기덕의 진심은 알겠으나 그의 극단적 비유는 폭력적 상황을 정당화하기 쉬운 위험도 안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일까.
나와 이 영화 사이에 벌어지는 이 충돌은 한기와 선화의 관계와 닮아 있지 않은가.
욕망과 폭력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이 조우하면 정말 한 배가 가라앉아야만 하는 것일까.

追記 : 김기덕의 극단성은 미학적 영역에서 현실을 드러내 주는 데 기능한다. 투박하고 급진적이어서 이중 부정의 강한 긍정으로 오독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강한 부정에 기반하여 영화라는 가상의 현실적 존재성을 확보하는 방편이다. 다시말해 김기덕의 영화는 극단성을 외피로 우리 앞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기는 타고난 부정성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사회의 부정성이 각인되어 있고 부정을 긍정으로 기입한 선화에게 그의 것이 전화됨으로써 그의 어둠 속에 감추어진 진심이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가 품는 단순한 질문은 왜 극단적인 폭력적 촉각이 스크린에 새겨져 있는가보다는 왜 한기가 자신의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가이어야 한다. 유운성씨의 표현대로 이 영화의 가상은 폭력적인 현실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둘러쳐진 절규의 향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저주같은 운명에 대해 체념하기보다는 슬픔을 안고 저항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그 때만이 내가 안은 부정성과 영화의 부정성 사이에서 비로소 온전히 소통했다 할 것이므로.

김기덕이란 감독의 이름을 종종 접해봤던 나는 그와 접할 기회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야 파란대문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그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영화에 빠짐없이 나오는 창녀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도 등장한다. 창녀는 공공연히 그 존재를 알면서도 없는 것처럼 애써 부정하는 우리 사회의 위선의 표상이자 이 사회의 일반인들에게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소외된 자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이 창녀(이지은)는 새장 여인숙이라는 곳에서 말 그대로 새장에 갇힌 채 수많은 남자들의 소유와 집착, 그리고 때로는 쾌락의 대상으로 살고 있다. 항상 그녀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돈을 뜯어대는 백수건달이 그렇고 여인숙의 주인 아저씨(장항선)와 심지어 그의 아들(안재모)이 또한 그렇다.

그리고 이 여인숙 주인 딸인 동갑내기 여대생(이혜은)은 이 창녀를 남들에게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자신의 치부로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경멸하고 무시한다.
이렇게 도무지 소통할 곳이 없는 갑갑한 새장 속에서라면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고 나올 생각을 않겠지만 이 창녀는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동갑내기 여대생에게 문을 열어보이는가 하면 파렴치한 건달녀석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그녀는, 어쩌면 감독이 말하려는 바를 그래도 체현하는 페르소나인지도 모른다.

이혜은이 이지은의 뒤를 밟으며 점차 그녀를 닮아가는 모습이나, 창녀를 창녀로만 보지 않았던 해변 안전요원과 그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소외된 이들의 바깥 세상에 대한 소통의 강렬한 소망과 그 소통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영화를 통해서 나는 김기덕이라는 사람이 소외된 이들과 소통의 문제, 그리고 소유와 집착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감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을 뒷골목의 창녀나 남자들의 소유욕에 대한 피해자로 설정하는 점이나 윤리적인 잣대로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설정들(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통해 성병을 얻는다는가 하는 것들)이 이 감독을 주류에서는 좀 빗겨난 컬트 감독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이지은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이 오고가는 길 한가운데에서 헤매고 있는 거북이 한 마리, 그리고 어항 속에 갇혀 있던 붕어 한 마리를 물 속으로 놓아 준다. 타인에게 소유된 존재로서의 자신을 해방시키고, 인간으로서 타인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녀의 강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던 이 장면들이 가장 기억에 남으며 여운을 남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