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둔

감독 : 마틴 스콜세지
각본 : 멜리사 매티슨
제작 : 바바라 드 피나, 멜리사 매티슨
출연 : 텐진 듀톱 차롱, 규메 테통, 툴쿠 잠양 쿵가 텐진, 텐초 예쉬 파이창, 텐초 걀포, 체왕 미규 캉사
제작년도 : 1998년

‘당신은 진정으로 부다입니까?’ ‘나는 그림자이다. 물 위에 비치는 달과 같다. 중생들은 나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줄 뿐이다. 중생의 열반은 내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중생이 한 명도 남김없이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열반을 유보한 현생 부처 14대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그는 중생의 열반을 위해 14번째의 윤회를 돌아 두 살 박이 아이가 되어, 달라이 라마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섭정에게 인도되어 세상에 나타난다. 그는 공산화된 중국에 침략당하는 티벳을 구제하기 위한 무거운 짐을 안고 태어났다.

사실 그는 모든 티벳인들의 그 순결한 정신이 그 순결한 정신을 끊임없이 더럽히려는 세상에 대해 자신들을 인도할 하나의 기둥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결국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를 달라이 라마답게 할 수 있는 티벳인들의 종교적 정신의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만이라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을 그들에게는 우리는 잃어버린 것 같은 정신의 순결함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종교적 삶이 정치적 현실에 핍박받을 때, 중국이 티벳을 복속시키려 할 때 태어난 티벳의 종교적, 민족적 지도자 쿤둔은 어쩌면 스콜세지의 눈에는 뉴욕의 더러운 거리에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구원의 존재와 겹쳐져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콜세지는 선과 악, 핍박하는 이와 핍박받는 이의 구도는 피하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벳의 종교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범위에서만 틀지워지는 것이 아니어서, 쿤둔은 유럽의 중국에 대한 침략의 역사를 이해하려 하고 모택동을 악인으로 단정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그가 앞으로 비폭력의 투쟁을 해 나갈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혹시 섭정이 아이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라는 쿤둔의 회의에는 정치적 현실에 대해, 고통받는 중생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어 어린 나이에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까지 불러 일으킨다.

정서적으로 동화된 상태에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생기게 되는 티벳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색모래로 쌓아올린 겹겹의 만다라를 쓸어 모아 강물에 경건하게 붓는 신은 티벳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이상을 이 모자란 머리와 가슴에 어렴풋이나마 심어주기 때문이다.

순진하기까지 한 순결한 정신을 만나는 것은 내가 부다에게 입는 은혜일지도 모른다. 헐리웃의 그네들도 그러해서 티벳을 사랑하는 것이겠지?

비포 선라이즈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출연 줄리 델피, 에단 호크
95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내가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보기를 아끼던 ‘비포 선라이즈’가 티비에서 했다. 지나가다 눈에 들어온 영화의 장면은 절대 혼자서는 안 보겠다는 유치한 다짐을 다시금 져버리도록 해 버렸다.

수많은 영화 장르 중에서 보통 영화 속 두 인물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영화는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화해 등에만 관심을 쏟게 한다. 이는 영화가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한 곳에만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인물은 어떻게 그려지는지, 주변 세상은 어떻게 그려지는지 눈여겨 볼 수 없게 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제시와 셀린느 두 인물의 쉴새없는 대화와 그들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비엔나의 전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면죄부가 지닐 수 있는 특권을 미덕으로써 쓰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커플도 있겠다 싶다. 제시는 순진한 소년 같은 열정이 넘치면서도 사람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품는 남자이다. 셀린느는 프랑스인 답게 충분히 철학적이고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또 동시에 충분히 낭만을 즐기는 여자이다. 이 남과 여가 유럽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비엔나에서 내리는 것만도 다분히 그들의 특별함을 말해 주지만 그들이 쉴새 없이 나누는 대화는 그 특별함을 넘어 나에게는 보편성까지 가져다준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전통과 현대, 남성과 여성, 자연과 인위, 만남과 헤어짐, 사랑 등 그들은 인간이 떠올리고 추구하며 고민하는 모든 것을 대화 거리로 풀어낸다. 영화 전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대사는 하나도 놓칠 만한 것이 없더라. 아직 젊어서 세상에 체념하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순수한 열정과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이기에 수다처럼 내뱉는 그들의 대화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리 부모님은 역동의 순간에 젊은 시절을 보냈죠. 전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남들보다 풍요롭게 자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전 갑갑함을 느껴요.  세상 젊은이는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역사를 통해 젊은이들은 다들 고뇌하고 괴로워 하잖아요’, ‘만일 신이 임한다면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에 임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사랑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를 느끼고 그 사람에게 지친다고 했죠? 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에요’라는 식의 대사는 유치할지라도 진실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 남녀의 내면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영화 내내 그들이 우연히 만나서 서로가 사랑의 느낌을 받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우선 제시의 소년같은 눈빛과 열정, 셀린느의 당당하고 솔직하면서도 사려깊음에 반하게 되고, 비엔나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풍경에 반하게 되며 그 안에서 거리를 거닐고 배를 타며 술을 마시면서 대화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셀린느의 말처럼 그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남녀의 애정이 가지는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면서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리차드 링클레이터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반했을 법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그 미모와 연기에도.

그런데 문제다. 나는 언제쯤에나 이 영화를 나만의 셀린느와 함께 볼 수 있을까…-_-

키즈리턴

그들의 시작에는 빛이 있을까

제작 반다이 비주얼, 오피스 기타노
프로듀서 모리 마사유키, 쓰게 야스시, 요시타 타키오
감독·각본·편집 기타노 다케시
촬영 아나기시마 가즈미
미술 이소다 노리시로
녹음 호류치 센지
음악 히사이시조
조감독 시미즈 히로시
출연 안도 마사노부, 가네코 겐, 오스기 렌
수입 한아미디어 배급 아트에이전시 나다
제작연도 1996년 상영시간 108분 등급 15세 관람가

 드디어 보았다. 학교 영화 동아리가 주최한 영화상영회는 나에게 한가닥 빛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기타노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신지와 마짱은 학교에서 말썽만 피우는 인물들이다. 그들 주위에는 만담가가 되겠다는 녀석들도 있고 커피숍 여인을 사모하는 녀석도 있으며 한결같이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며 꿈을 키우는 녀석들이 있다. 학교에서는 신지와 마짱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다만 피해만 끼치지 말라는 당부만 한다. 신지와 마짱은 바보이다. 그들은 어떠한 재능도 없고 세상에서 불필요한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입시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때 자신의 꿈을 쫓아 내달리는 녀석들이 있으나 마짱과 신지는 그런 부류에 낄만한 꿈도 없다. 자신들이 지닌 재능이란 선생들을 골탕 먹이는 것뿐이다.

 고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은 이미 폭력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강한 자에게 약한 자는 비굴하게 복종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 나가 강한 자의 대열에 서느냐 약한 자의 대열에 서느냐의 기로에 서서 피터지는 경쟁을 해야 한다. 이 피터지는 경쟁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 바람직한 삶과 바람직하지 못한 삶의 구분이란 없다. 경쟁의 양태만 다를 뿐 그들에겐 그다지 다르지 않은 방식의 삶이 기다리는 것이다.
 신지와 마짱은 그 경쟁의 대열에서 이탈해 있다.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도태되어 버린 이 두 녀석들은 우연히 복싱을 접하게 되고, 그 중에서 경쟁력 있는 신지는 그곳에 적을 두게 되고 복싱에서도 도태된 마짱은 예전에 만났던 야쿠자 두목 밑으로 들어간다.

 졸업을 한 아이들은 각기 제 자리를 찾아 사회에 흡수되어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한 녀석도 제대로 적응하는 이들이 없다. 세상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또는 룰을 어기는 반칙을 가르친다.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을 전전긍긍하거나 실패한다. 과연 누가 이 세상을 살 만하다고 하는가.

 여기 폭력이 내재된 반칙 시스템의 가운데에 야쿠자와 복싱이 있으며 그 안에 마짱과 신지가 있다. 잠시 그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약한 자는 강한 자의 한 방에 맞고 쓰러지며 강한 자의 발에 짓밟힌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맛본다.
 그렇게 약지도 똑똑하지도 못해 타인을 짓밟고 일어설 만한 힘도 없고 능력도 없던 그들은 결국 고교 시절의 자전거 타던 순간의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내뱉는다. ‘우리 이제 끝난 걸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그러면서 웃는 그들의 모습 뒤에는 슬픔이 베어 있다. 생존이 걸린 무한 질주의 대열에서 비껴나온 신지와 마짱은 서로를 위안하며 또한번 싸움터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새로운 시작에는 빛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