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Glenn Jordan
출연 Alec Baldwin, Jessica Lange, John Goodman, Diane Lane, Patricia Herd
원작 테네시 윌리암스의 동명 희곡
1995년 TV(미국)
– TV 방영명 :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 비디오 출시명 :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오늘 성적 편견에 대한 탐구라는 과목 수업 시간에 영화를 하나 봤다. 제목이 ‘StreetCar named Desire’란다. 그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그런데 알렉 볼드윈이 나오고 화면은 칼라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95년에 TV용으로 만든 영화였다.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통해 주어진 과제는 스탠리와 블랑쉬 중 누가 문화인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질문을 계속 던져 봤지만 양자택일하라는 과제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블랑쉬(제시카 랭)는 동성연애자 남성을 남편으로 맞아 결국 남편의 자살로 결혼생활에 파탄을 맞게 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 문란한 생활을 한 여자이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억압받으면서 점점 신경쇠약에 자신만의 망상 속에서 살게 되었다.
어둠의 탈출구를 찾고자 찾은 동생 스텔라(다이안 레인)의 집은 한껏 과장된 고상함과 까다로움을 보여주는 블랑쉬에게는 너무나 너저분하고 누추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근육질의 남성을 대표하는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알렉 볼드윈)가 있다. 스탠리는 처음부터 블랑쉬를 못마땅해 하고 블랑쉬 역시 그러하다. 블랑쉬가 동생 집에 와서 찾게 된 어둠의 탈출구는 바로 스탠리의 친구 미첼(존 굿맨)이었다. 그러나 스탠리가 미치에게 블랑쉬의 과거를 다 밝히고 블랑쉬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빛을 잃어버리고는 더욱더 망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블랑쉬는 세상으로부터 억압당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탠리는 그 억압하는 기존 질서나 규범 체계인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인물 중 누가 더 문명인인가 하는 것이다. 문명인이라는 것이 뭐지? 야생에서 동물에 의해 길러지지 않은 이상 사람이면 다 문명 속에 있는데. 문명에 잘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문명이 이성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할 때에 이성이 잘 발달되어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그러면 스탠리가 문명인인가? 스탠리는 ‘깨끗하지’ 못한 블랑쉬와 마찰을 빚다가 결국은 폭력을 쓰던데. 폭력도 문명의 속성인가?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하던 블랑쉬가 문명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문명이라는 것이 위선과 기만의 가면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본능적 욕망이라는 것이 보통 사용하는 문명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생각될 수 있을까?

도대체가 쉽게 답을 내기가 어렵다. 누구 한 명이 문명을 표상하는 인물이라 볼 수가 없을 뿐더러 문명인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쉽지가 앖다. 이런 과제를 내어 놓고 강사는 5분 내에 네 다섯 줄로 써 내란다. 그것도 스탠리와 블랑쉬 중 한 명을 선택하란다. 여간 황당한 것이 아니다. 참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많겠다. 이 수업처럼 말이다. 어떻게 나를 속이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영화를 보여줄 것이면 오프닝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다 보여줄 것이지 강사는 또 처음 약 5분 가량과 끝 약 5분 가량을 끊어 버린다. 게다가 영화를 보여줄 것이면 엘리아 카잔의 원작을 보여줄 것이지 95년도에 TV용으로 만든 걸 보여주는지.(지는 이 영화를 여러번 봤단다. 원작이 아니라 이 TV용 영화를?)

이런 영화 한 번 보려면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데 괜히 강사는 사람 마음만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억지 답을 요구해 버렸다. 쩝.

감독 : 장이모…(Zhang Yi Mou)
연출작 책상 서랍 속의 동화 (有話好好說: Not One Less) 1999년 중국
집으로 가는 길 (俄的父親母親: The Road Home) 1999년 중국
키프 쿨 (有話好好說: Keep Cool) 1997년 중국/홍콩
트라이어드 (搖?搖, 搖到外婆橋: Shanghai Triad) 1995년 중국/프랑스
인생 (人生 / Lifetimes) 1994년 중국/대만
귀주 이야기 (秋菊打官司: The Story Of Qiu Ju) 1992년 중국
홍등 (大紅燈籠高高掛: Raise The Red Lantern) 1991년 중국/홍콩/대만
국두 (菊豆: Judou) 1990년 중국
대호 미주표 (代號 美洲豹: Codename Cougar) 1989년 중국
붉은 수수밭 (紅高梁 / Red Sorghum) 1988년 중국
제작작 용성정월 (龍城正月: Dragon Town Story) 1997년 홍콩
촬영작 노정 (老井: Old Well) 0000년 중국
출연작 키프 쿨 (有話好好說: Keep Cool) 1997년 중국/홍콩
진용 (秦俑: A Terra-Cotta Warrior) 1991년 홍콩
제작 : 쟈오 위
각본 : 바오 쓰
촬영 : 호유 용
음악 : 싼 바오
주연 : 장쯔이, 순홍레이, 쩡 하모, 쟈오 위에린

나우누리 시네프리에서 연 시사회에 당첨되어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개봉도 하기 전에 보게 되었다. 나같이 게으른 놈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부지런했으면 얼마든지 그러한 기회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중년 남자가 차를 타고 급하게 한가로와 보이는 시골 눈길을 가로질러 온다. 그 남자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간 아버지의 장례를 전통 장례로, 멀리 도시 병원의 영안실에서 산골 구석 마을까지 긴 행렬로 걸어오기를 바라지만 마을 사람들과 아들의 생각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식 사진은 마을 전체에 알려진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아들은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의 구천 돌아가는 길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따라 마중하게 된다.

영화는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급하게 달려오는 아들의 시간, 즉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부모의 시간, 즉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성을 취한다. 보통 흑백이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컬러란 현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반대의 경우로 적용한다. 나는 이 영화가 과거 부모 세대의 삶과 사랑의 모습에 무게가 있다고 느껴지므로, 현재를 잠시 벗어나 과거를 현재처럼 한번 보아 달라는 의미가 아닌가 억측해 본다.

산골 마을에 열여덟의 아릿다운 처녀가 있다. 처녀는 마을에 새로 온 스무살의 젊은 선생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순박한 처녀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학교 건물을 만들 때 공밥을 정성스레 지어 선생이 자신의 밥을 먹어주기를 바라거나 학생들과 함께 노래부르며 걸어가는 길목에서 자주 마주치거나 학교에서 강의하는 선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써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까지 와서 물을 떠 가는 정도 밖에 없다.
선생은 처녀의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갔다가 찜해 놓았던 그녀를 다시금 확인하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그녀에 대한 애정을 쌓아간다. 문화혁명이라는 격동이 밀려오면서 선생 역시 어지러운 세상에 이끌려 잠시 이별을 해야 하지만 머리핀을 자신의 마음의 징표로 전하고 영원히 그 마음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이 둘의 사랑은 요즘 흔히 보는 로맨틱 영화만큼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하다. 촌스럽기 그지없고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손수 짠 붉은 천이나 이별과 만남을 잊지 않으려는 머리핀은 몇 천 송이의 꽃보다 절박하고 진실되게 보인다. 사랑을 확인하려 키스를 하지도 몸을 섞지도, 하다못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하찮게 보이는 사건과 몸짓도 진실된 사랑을 품는 것 같다. 머리핀을 쥐어주고 떠나는 선생에게 먼길 가며 먹으라고 찐 만두를 전하려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잃어버린 머리핀을 찾으려 몇일을 헤매고 텅빈 학교를 예쁘게 단장하고 선생을 기다리다 앓아눕는 처녀는 요즘 사람들 눈에는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게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장예모는 그것이 어리석을 망정 진실된 마음은 담겨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중국 역사가 부정했던 부모세대는,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세대라 부정되었던 당신들은 이제는 그들조차 중국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감정을 흔들면서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란 과거를 보듬는 공간으로 가는 길을 뜻할 것이다.

장예모의 작품은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밖에 본 것이 없다. 거기서 장예모는 교육, 즉 계몽을 강조한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측면이 보인다. 아버지(선생)는 죽는 순간까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일깨우려 했으며(강의하는 문구도 ‘알아야 한다’라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심지어 학교 건물에는 ‘敎育是建設祖國的武器'(교육은 조국건설의 무기이다)라는 선동적인 문구가 붙어 있다 – 물론 당시 사회상이 그러했겠지만 감독의 의도도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계몽주의적인 의식은 잘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 처녀와 선생의 사랑과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화해, 과거 역사와 현재의 화해 같은 측면에 몰입되기만 했다.
장예모는 시끌벅쩍하게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자, 감동해라’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이렇단다’라고 차분히 풀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장쯔이의 그 진실된 미소와 눈물이라니!!!

대통령의 연인(The American President) 1995년 미국 콜럼비아
감독 : 롭 라이너
출연 : 마이클 더글라스, 아네트 베닝, 마틴 쉰, 마이클 J. 폭스

2000. 10. 22. 일. KBS

미국의 대통령은 정치도 잘하고 인간적이며 연애도 잘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진정으로 국가를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며 정치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로 한다.
멋지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건 마이클 더글라스라는 희대의 플레이보이가 정치가, 그것도 대통령이 되어 일삼는 애정행각에 대한 미묘한 부조화였다. 물론 롭 라이너라는 걸출한 감독이 만들어 정치와 사랑의 간극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재치를 발휘했을 터이지만(개인적으로 그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나는 마이클 더글라스가 아릿다운 아네트 베닝을 상대로 추파를 던지는 게 개인적으로 못마땅하다. 워렌 비티가 아주 못마땅해 했음직하다.(하긴 이제는 유부남이 된 녀석이 이미 유부녀였을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다고 그게 실행에 옮길만한 것이었겠냐마는) 웃음 지을 때에는 다른 어떤 가식도 없이 진실되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표현하고 슬퍼하며 울 때에는 슬픔의 나락에 떨어진 듯하여 가련함을 불러일으키는 아네트 베닝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는 더없는 로맨티스트가 되고 사람을 대통령이라는 권위로 누르지 않고 인간으로 대하며 어미 없는 딸을 자상하게 친구처럼 대해주는 아버지로서의 탈을 쓴 마이클 더글라스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해 보인다.(개인적인 생각이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아네트 베닝을 상대하는 주인공으로서 나와서 못마땅한 것도 있지만, 또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나온 작자가 온화한 아버지에 유머감각까지 겸비한 핸섬한 백인 남성인데다가 미국을 사랑하고 자신이 가장 부강한 국가의 보스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하여튼 헐리웃에서 뽐내고 열렬히 홍보해대고 있는 온갖 미국적 가치의 표상이라는 것도 참 못마땅하다.

하긴, 못마땅할 것도 딱히 없다. 단지 환타지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백마탄 왕자에 대한 현대판 환타지이니까. 아네트 베닝은 단지 현대적인 자질을 갖춘 신데렐라일 뿐이겠지. 환타지로 볼 때 이 영화만큼 완벽한 환타지를 제공해 줄만한 동화도 없을 것이다. 환타지로서 볼 때 이 영화는 참 재미있으니까. 그 사랑이 참 아름답고 환상적이니까…(하긴, 대통령과 눈맞은 여자는 대통령과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는 환경론자 진영 로비스트라니…이만하면 궁색은 갖췄지)

그런데 영화 보고 나서도 환타지 속에서 헤엄치면 어떡하지…
p.s–>지금은 병들어 얼굴을 볼 수 없는 마이클 J.폭스의 멀쩡할 때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갑고 즐거운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였다. 재미있었다…나는 헐리웃의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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