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기말고사 후부터 나를 옥죄던
레포트를 다 해결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레포트는 영 쓰레기다.
아니, 내가 쓴 글들이 다 쓰레기지.
하지만 요즘은 특히나 글을 더 못 쓰겠다.
글이 안 써지는 것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란 걸 이제사 좀 알겠군…
그런데 왜 올리냐고?
여긴 난지도라니까…

야생의 사고에 대한 편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합리주의적 전통은 근대 서구 문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명제 하나만으로 근대 서구 문명 전체를 총괄할 수는 없겠으나 자기의식적 이성에 기반한 객관성과 합리성이 근대 서구 문화를 특징짓는 핵심 단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탐구와 논의 속에서 굳건하게 다져진 이 이성적인 문명은 어느 정도 자기 우월감에 도취될 만했다. 세계를 명확하고 분명한 언어로 구축하는 데에 있어 다른 문명권보다 더 빛나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이 우월감 안에서 가장 무시되던 문명이 바로 원시사회였다. 원시라는 단어 자체가 사고의 발전 단계에 있어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모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근대 서구인들은 원시인 또는 야만인이라 불리는 이들 사회의 인간들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란 찾아볼 수 없으며 사고가 무질서한 체계에 함몰되어 있고 단순하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구분이 없거나 양자의 관계를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관념 안에 묶어버리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편견은 과학과 신화적·토템적 사고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후자를 비과학 또는 전과학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처럼 양자를 구분하는 도식을 회의한다. 그가 볼 때 후자, 즉 그의 표현대로 야생의 사고를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사고 방식과 엄격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부당한 대우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편견의 안경을 벗고 야생의 사고를 좀더 공정한 시각에서 이해해 보기를 시도한다.

인식의 기본적인 특징 1)

야생의 사고는 단순하고 무질서하며 체계적이지 못하다라는 근대 서구인들의 편견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웅변한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원시사회에서 사물들을 분류하는 체계들은 그 기준이 모호하며 자연계와 인간을 동일시함으로써 비과학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도 나름의 논리적 체계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밝혀진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체계와 다른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일관된 체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체계적으로 사물들을 분류하고 사고하는 것은 인간 사유 행위의 본질적 측면이라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을 지나는 빛을 우리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가지 색으로 분류하여 인식한다. 거기서 갈라져 나온 빛은 경계가 모호하고 다만 다양한 색상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 그대로는 색상을 분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색을 띤 빛의 그 연속적인 꾸러미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그을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어떤 기준으로 경계를 그을 것인가.

이에 대해 엄격하게 참으로 미리 주어진 공준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문화권에서 이루어져 온 분류의 관습에 의해, 만일 선례에서 그 대상을 분류하는 데에 참고할 만한 방법이 없다면 기존의 분류에 대한 법칙 안에서 적절히 합당한 색의 분류를 위한 경계선을 고안할 것이다. – ‘어떠한 분류도 혼돈보다는 낫기 때문이다’2) –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무한한 색의 연속체를 경계들 사이의 여백에 있었던 다른 색들은 생략하고 다만 위의 일곱가지 색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실용적인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지적 관심이 인도하는 필요성에 의해 수행된다.

원시사회의 분류체계

원시사회에서의 사물에 대한 분류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미국 동북부 인디언이나 시베리아 여러 부족, 오이로트족 등 세계 각지의 여러 원시 부족들에서 나타나는 각종 동식물에 대한 치밀한 분류와 그것의 사용의 예를 레비-스트로스는 동식물의 유용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지식이 있고 거기서 유용성을 창출해 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다시말해 인간의 필요 이전에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그들은 동식물들을 분류하는 것이다.3) 또한 그러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분류의 체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인간을 성에 따라 구분하고 방위를 구분하며 심지어 구체적인 장소들마저 분절화시켜 개체화시킨다. 그들과 우리의 사유가 지니는 교차점은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사물의 질서있는 분류에 대한 욕구.
야생의 사고도, 과학적 사고도 분절화에 입각한 분류를 통해 인식을 성립시킴으로써 무질서한 외부 세계를 질서있는 체계로서 구성하려는 기본적인 관심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관심은 특정한 사고의 구조적 형태를 구축하면서 향후의 분류에 대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원시사회도 사물을 분류하는 체계는 생각보다 엄밀하며 정확한 관찰력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원시인들도 대상과 대상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안다. 때로는 대상에 따라 우리보다도 더 세밀한 부분에서의 차이점까지 파악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통해 양자를 대립시킴으로써 분류를 시작한다. 이렇게 이원 체계에서 시작하는 분류는 대립을 만들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며 그것은 일차원적이기보다는 다층적인 이원 체계의 결합에 의해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예컨대 볼리비아의 고원에 사는 아이마라 인디언은 농식물을 단순히 익혀서 먹는 것과 각각 얼리거나 발효시켜 먹는 것으로 구분하고 동시에 평평한 것, 두꺼운 것, 나선형인 것 등의 형태를 기준으로 이항 대립을 적용하여 약 250종 정도의 변종들을 분류해 낸다.4) 이처럼 그들의 분류 방식도 이원 체계의 결합에 있어 엄밀함을 유지하고 있고 다층적인 결합도 치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들의 분류도 나름의 체계 안에서 논리적임을 밝힌다.

사물들에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엄밀하다 함은 그러한 분류 방식의 체계에 그 구체적 사물들의 명칭들이 부합되는 정도가 엄밀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레비-스트로스의 표현대로 범주와 개체라는 분류 형식의 양극이 엄밀하게 상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신화적·토템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자연계와 인간의 동일시는 이같이 분류 형식의 양극이 엄밀하게 상응하는 과정에서 그 양자 사이에 상호 침투가 일어나면서 형성된다.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의 중요한 차이점은 여기서 나타난다. 전자는 개별 사물,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에 의하면 우연이나 사건과 구조 사이의 구분을 애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의 대립의 초월 또는 통합을 시도한다. 반면에 과학적 사고는 ‘우연과 필연의 구분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또한 사건과 구조를 구별짓는 것이다.’5) 야생의 사고가 지니는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브리콜뢰르, 즉 손재주꾼의 예이다. 손재주꾼은 주변에 주어져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엄밀한 작업 절차를 숙지하지 않고서도 무의식적인 구조의 질서에 이끌려 필요로 하는 물건을 능히 만들어 낸다. 특정 공정과 도구나 시설이 구축되어 있어야 생산을 할 수 있는 엔지니어와는 달리 그는 주어진 여건 안에서 거뜬히 자신의 필요를 해결한다. 새로운 개념 수준의 체계를 생성하고 그 기반에서만 세계를 구성하는 과학과는 달리, 야생의 사고는 손재주꾼과 같이 주어진 질료들로서의 자연 사물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문화와 세계에 대한 인식 체계를 멋지게 수립해 낸다.

야생의 사고는 사물을 개별 속성의 차이에 따라 분류한다. 이 속성은 어느정도 균일하게 범주화되어 있는데 이 범주에는 자연계의 동식물이나 인간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대응된다. 일대다대응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범주와 개체들 사이의 상응 방식으로 인해 동식물들이 때로는 개념 수준의 이차적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이 이차적 의미는 인간의 문화 속에서 하나의 ‘부호’로서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인간의 행위나 의례, 복식, 작명 등에 직접적인 표상이 된다. 다시말해 주어진 자연계의 사물들을 질료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문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동식물의 이차적 의미는 본래의 일차적 의미와 융화되면서 토템적 신앙 체계를 만들어 낸다. 성과 속, 또는 숭배되는 것과 금기시되는 것들의 체계가 자연물에 투영된다. 즉 한 개별 사물들의 의미의 체계가 다른 영역의 체계에 이전 또는 변환된다. 여기서 구체와 추상 사이에 일종의 초월적인 종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고는 사물들을 구체화시키면서 동시에 추상화라는 또하나의 극단으로 치닫는 분류의 지속이다.

야생의 사고와 과학의 최종적 교차점

이러한 분류 체계는 근대 사회에서도 예술이나 기타 통속적인 관념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성적·과학적 사고는 자연의 분류와 인간의 분류 사이에서 의미들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고 그 둘은 서로 다른 분류 방식을 따른다. 자연 사물들 간의 구분도 명확하고 마찬가지로 분류 방식도 각기 다르다. 분류의 방식이나 체계는 각 부분들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만 완전하다. 이처럼 철저히 사물들을 분절된 각각의 체계 안에서만 파악하는 것, 또는 자연계와 인간 사이에 엄밀한 구분선을 상정하는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양적 방식으로 파악하고 사물들을 동일하거나 유사한 체계 내에서 종합적·동시적으로 파악하거나 자연에 인간을 귀속 또는 동일시하는 야생의 사고를 질적 방식으로 파악한다. 양자는 상이한 방법으로 사고를 구체화해 나간다. 전자는 세계를 끊임없이 객관화해 나가고 후자는 세계를 주관화해 나간다. 전자는 분리된 체계 안에서만 끊임없이 분석해 들어가지만 후자는 분석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이고자 하며 또 양 방향의 극한까지 진행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동시에 그 양극 간의 조종 능력을 보유하려고 한다.6)

전자는 분석을 개별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수행하지만 그 작업이 한계에 이르면 종합의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해 신화적 사고가 수행하는 분석과 종합의 동시적 수행이 일정 단계에서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수반된다.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확보되었다면 그것을 인간적 의미 체계 안에서 융화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 지점은 양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상의, 또는 구조상의 차이점으로 인해 애둘러 왔던 길이 다시한번 엇갈리며 만나는 교차점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는 양자의 상이한 사고 유형은 다른 구조라는 입지적 여건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며 결국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나름의 형태들일 뿐 신화적 사고가 사고 발달 단계에서 뒤쳐진 형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러한 신화적 사고, 야생의 사고는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사고 유형이며 과학적 사고와 상호침투하면서 우리의 사고 저변에서 활동적으로 움직히고 있다. 그들과 우리의 사고 사이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형성된 편견에 의해 화석화된 야생의 사고는 이렇게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회복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사고 저변에서 역동적으로 제한하는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 사고의 원형질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준 것이다.

보편성을 통한 타자의 인정

레비-스트로스가 관심을 지니는 부분은 상이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그는 구조를 빌어 지극히 상이한 원시사회와 과학적 사고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다. 사고가 인간의 인식 구조의 본질적 특성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이한 두 문화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기서 나타나는 논리적 도식은 문화는 개별적인 현상이며 그 이면에는 하나의 본질로서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기본적인 관심은 무질서한 현상 이면의 질서정연한 본질을 밝힘으로써 진리를 찾아내려는 기존의 서구 사상사의 주요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사고 이면의 구조에 대한 그의 발견은 다양성 사이에서 보편성을 밝혀내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레비-스트로스는 근대 서구인의 관점에서 타자로 분류되는 원시사회에 대한 인정을 보편성의 차원에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의 구조주의 인류학의 체계 안에서는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을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보편적 범주가 존재함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르트르를 맹공격하면서 근대 서구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였지만 종국에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그가 교집합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타자는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만약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보이는 광인, 즉 완벽한 타자의 경우에 레비-스트로스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확연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참여적인 관찰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나 대화 자체가 – 적어도 지금까지는 – 불가능한 광인은 실로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일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이 어리석은 의문은 이 정도 수준에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타자는 우리의 인지 영역 바깥의 문제이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중요한 것은 면밀한 접근을 통해 얼마든지 이해 가능한 영역 안에서의 타자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타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1)이 부분은 전공 수업인 지식사회학 강의 중에 언급된 부분을 참고하여 레비-스트로스가 보는 인식의 기본적인 특징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2)’야생의 사고'(한길사) p68.

3)같은 책 p60∼61.

4)같은 책 p104.

5)같은 책 p76.

6)같은 책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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