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ize=3>이상수의 동서횡단 ] 2001년05월29일 제3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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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적,
이 성실한 좌파여!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color=#a00000 size=3>육체 노동자에서 정치운동가로 거듭나… 인민의 고통 덜기 위한 사색과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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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스스로를 “천한 사람”(賤人)이라거나,
“촌뜨기”(鄙人)라거나, “들사람”(野人)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모실 일이 없고, 아래로는 밭갈아 농사지을 어려움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기록을 검토해보면 그는 당대 최고의 기술수준을 몸에 지닌 수공업 노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묵자·공수>편에는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혔던 공수반(公輸盤)과 과학기술로 일합을 겨룬 장면이 나온다. 당시 초나라는 명장 공수반의
기계제조기술을 이용해 공격무기를 만들어 송나라의 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묵자는 공수반을 만나 허리띠를 풀어 성 모형을
만들고 나뭇조각으로 기계를 대신해 공수반의 공격무기를 어떻게 방어해낼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공수반이 아홉번이나 방법을 바꾸어 기계로 공격을
가했으나 묵자는 이를 다 방어해냈다. 공수반의 공격방법은 바닥이 났으나 묵자의 방어술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미리 치러본
전쟁에서 공수반이 묵자에게 굴복한 것이다. 이 일화는 묵자가 매우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사해만민의 평등 외친 뛰어난 명장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이면서 맹목적인 기술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공수반과 관련한 또다른 일화에서 이 점이 드러난다. 공수반이 한번은 대와
나무로 까치를 깎아 날렸다. 이 나무 까치는 자그마치 사흘 동안이나 공중에 떠다녔다.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겼고, 공수반 스스로도 자기
기술의 정교함에 도취됐다. 이때 묵자는 공수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까치를 만든 것은 노동자가 수레바퀴의 빗장을 만든 것만도 못한
일입니다. 노동자는 잠깐 동안 세치의 나무를 깎아서 오십석의 무게를 실을 수 있는 수레에 쓰이도록 합니다. 노동의 공을 평가할 때,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정교하다고 하고, 사람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졸렬하다고 하는 겁니다.”(所謂功, 利於人謂之巧; 不利於人謂之拙. <魯問>.
<한비자·외저설좌상>편에는 묵자가 삼년 걸려 정교한 나무 연을 만든 뒤 제자들이 정교하다고 감탄하자 나무 연을 만드는 일은 수레바퀴의
굴대를 만드는 일만 못한 일이라고 자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묵자가 삼년이나 허비해 나무 연을 만든 뒤 그런 평가를 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으므로 <한비자>의 기록보다 <묵자>의 기록을 취하기로 한다).

당대 최고의 장인이던 공수반은 묵자와 몇번의 인연으로 인해 결국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노문>편에는 두 사람의
또다른 대화가 실려 있다. 먼저 공수반이 입을 열었다. “제가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송나라를 얻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만나 배움을
입은 뒤에는 누가 송나라를 제게 준다 해도 의롭지 않다면 그걸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묵자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때
당신은 송나라를 얻으려 했는데, 제가 당신을 만난 뒤로 당신은 누가 송나라를 준다고 해도 의롭지 않다면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송나라를 줄 것입니다. 당신이 의로움을 실천하는 데 힘쓴다면 나는 당신에게 온 천하라도 줄 것입니다.”

과학기술로 서로 쟁패를 벌인 바 있던 당대 최고의 두 지위가 맹목적인 기술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시민으로서 대화를 나누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이던 묵자는 어떻게 즉자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사해만민의 평등을 외치는 정치운동가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묵자는
오려(吳慮)라는 은둔자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의식화’ 과정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오려는 노나라의 남쪽 산골짜기에서 겨울엔 질그릇을 굽고 여름엔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를 순임금과 견주며 살던 사람이었다. 묵자는 일부러 그를 찾아가 만났다. 오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로움, 의로움
하는데, 어찌 그걸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나처럼 산골짜기에 처박혀 나 한몸 의롭게 사는 게 최고 아니겠느냐’란 얘기다.) 묵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선생님께서 말하시는 의로움이란 힘이 있으면 이로써 남을 위해 수고하고, 재산이 있으면 이로써 남에게 나누어주는 걸 말합니까?”
오려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사대부 계급의 세습적 지위 부정

이 대목에서 묵자는 자신이 왜 노동자에서 정치운동가로 변신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저는 일찍이 계산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농사지어서
천하의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겠는지를. 제아무리 풍년이 든다 해도 겨우 농가 한집의 수확량에 해당할 겁니다. 이걸 천하에 고루 나눈다고 하면
한 사람 앞에 좁쌀 한되도 돌아가게 할 수 없을 겁니다. 설사 좁쌀 한되씩 세상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 치더라도, 그걸로 천하의 굶주린 이들을
배부르게 할 수 없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베틀을 돌려서 천하 사람들을 입힐 수 있겠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여염집 아낙네가 짜는 만큼의 베를 짜낼 수 있겠지요. 그걸 천하에 고루 나눈다면 한 사람 앞에 헝겊조각 하나씩 돌아가게 하기도
힘들겠지요. 설사 사람들에게 헝겊조각 하나씩 돌아가게 한다 한들 그걸로 세상의 헐벗은 이들을 따뜻하게 하기에 역부족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갑옷을 입고 예리한 병장기를 들고 각국의 환란을 구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잘돼야 전투에서 사내 한 사람의 몫을
감당하겠지요. 한 사람의 전투원이 싸워서 대군을 막아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지요. 저는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게 (…) 통치계급과 평민을
설득하는 것만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 저는 비록 농사를 지어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베틀을 돌려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있지는
않지만, (세상의 통치계급과 평민에게 사해만민 평등사상을 펴고 다니는 일이)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공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魯問>)

노동자 묵적이 정치운동가, 정치사상가로 변신한 변은 이러하다. 묵자의 이 말을, 전에 인용했던 맹자의 말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마음을 써서 수고하고, 어떤 이는 힘을 써서 수고한다. 마음을 써서 수고하는 이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써서 수고하는 이는 남의 다스림을 받는 법이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살리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게
얻어먹는 게 하늘 아래 일반적인 이치이다.” 맹자는 왕공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정사를 맡고, 농공상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묵자는 노동자였지만, 한 사람의 노동자로 남는 대신 세상에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밝히는 정치운동가로 변신했다.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선택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전제로 깔려 있는 사고는 사대부 계급의 세습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는 맹자와 전혀
맥락이 다르다.

여러 학파의 주장 정밀하게 검토

그는 노동자였지만 통치계급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인민이 고통받는 걸 목도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치밀한 대안적 사색을 거듭한다. 사색만
한 게 아니라, 당시 통치계급이 읽고 배우던 <상서>와 <시경> 등 역사·정치·문학에도 통달한다. 그가 세상을 떠돌며
반전·평화·평등·박애의 사상을 외치고 다니면서도 얼마나 많은 책을 꾸준히 읽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귀의>편에 남아 있다.
그가 남쪽 나라들을 돌며 유세하다 위나라를 지날 때였다. 위나라의 묵가 조직에 속해 있던 현당자란 인물이 묵자를 맞이했는데, 묵자의 수레에 책이
가득 실려 있는 걸 보았다(묵자는 기본적으로 책을 가지고 제자들을 ‘의식화’시킨 사람이 아니었다). 현당자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묵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곧고 굽은 걸 분별할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레에 실린 책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곧음과 굽음을 분별할 수 있는 실천적 안목이 있으면 될 뿐, 이론 자체를 탐닉할 필요는 없다고 하시던 분이 웬 책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시냐는 얘기다. 묵자는 이렇게 답한다. “옛날 주공 단은 매일 아침마다 글을 백편씩 읽었고, 저녁에는 일흔명의 선비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자를 보필하는 재상이 될 수 있었고, 그가 닦은 일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내가 듣기에 ‘세상의
이치는 하나로 돌아가지만, 사람들의 말에는 잘잘못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듣는 말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책이
많아진 거지요. 만약 지금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거듭 정밀하게 생각해본다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하나로 돌아가는 요점을 알게 될 것이므로 책으로
가르치지는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가요?” 그는 제자들에게 책을 권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은 세상의 온갖 책을 두루 읽어 여러
학파들의 다양한 주장을 정밀하게 검토해왔음을 알 수 있다. 묵적, 이 성실한 좌파여!

이렇게 많은 학설을 파악하고 거기서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묵자는 일정한 ‘표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공자의 정명론, 노자의
무명론과 구별되는 묵자 사상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xuande@hanmail.net

묵적, 이 성실한 좌파여 – 한겨레21”에 대한 한 개의 댓글

  1. 묵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노나라 대부였으면 수많은 전국시대 제왕들을 만나 천하를 논의한 현자입니다. 그는 당시의 지배적 가치관인 천신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개마무사이기도 한 골수 우파 즉 극우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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