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데 없는 강자/ 현기영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이었던 송건호 선생이 아직 재야에 몸담고 있을 때 나에게 들려준 것이니까, 벌써 15년 전쯤 이야기다. 그분이 어쩌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방문할 일이 생겨, 그곳 동포들이 마련한 자리에서 강연을 했는데, 호전적 이미지 때문에 람보라는 별명이 붙었던 당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을 조금 비판했더니, 강연 도중에 한 동포 청년이 벌떡 일어나 왜 우리 대통령을 욕하느냐고 노발대발하더라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을 품고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그 젊은이가 얼마나 단기간 안에 정체성의 미국화를 성취해 보려고 부심했으면 그런 어리석은 발언이 나왔을까마는, 어쨌든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투영하여 동일시하려고 했던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처럼 어떤 비교도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슈퍼 파워였다. 지구촌의 유일한 예외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강자이기 때문에 저절로 옳고 완전한 존재인 반면에, 야만과 악덕은 언제나 적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어느 인류학자가 말했듯이, 야만이란 타자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그 자신일 뿐이다.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분쟁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개입해,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의 적들을 수없이 무찔러 `해결사’ 노릇을 해 왔는데, 그것이 그 동포 청년을 포함한 미국 시민의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영화 속의 불사신 람보가 미국과 미국 대통령의 이미지가 되었다. 포화가 빗발치는 적진을 단신으로 종횡무진 누비며 일당백의 가공할 살인기술을 발휘하는 불사신 람보, 그렇게 미국은 상처 없는 완벽한 승자가 되기를 원했다. 저쪽에 엄청난 희생을 안겨준 리비아 공습도, 이라크 공습도 미국쪽에선 사상자가 별무한 안전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자신이 수행하는 전쟁에서 인간의 피와 시체를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피도 신음소리도 없이 위생적으로 처리된 전쟁이었다. 비디오 게임처럼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 버린 전쟁, 엄청난 수효의 민간인 떼죽음은 철저히 묵살당한 채, 티브이 화면에는 오직 아름다운 불꽃들과 경쾌한 폭발음만 존재하지 않았던가. 한국의 우리도 그 화면을 보고 불꽃놀이나 비디오 게임을 연상할 정도였으니, 미국 국민이 그로부터 전쟁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런데 그 불패의 람보가 불의의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는 불가사의한 사건이 지금 발생했다. `안전한 전쟁’이란 모순 어법은 드디어 깨졌다. `안전한 전쟁’에 길들여져, 전쟁을 마치 전문가들이 해외에 출장 가서 벌이는 비즈니스쯤으로 심상하게 여기던 미국 국민들에게 9·11 테러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공포였다. 절대 불가침의 영역인 미국 본토의 심장부가 유린당하다니, 처음에는 지구 밖에서 쳐들어온 유에프오의 공격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단다.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슬픔과 분노, 애국적 열정의 격랑이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드디어 보복전쟁이 시작되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의 이 맹목적인 분노는 지금 세계에 대해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을 무섭게 강요하면서 확전을 획책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진전되지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이 보복전쟁은 미국 내에 조성된 집단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런 통쾌감도 주지 못하고 있다. 무자비함의 극치인 9·11 테러가 낳은 공포는 뒤이은 세균 테러에 의해 더욱 증폭되어 미국 시민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테러 앞에 더이상 숨을 데가 없다는 공포. 그렇다. 그 공포심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다. 보복을 외치던 최초의 분노는 이 생생한 공포에 의해 조만간 압도되어 누그러들고 이성이 되살아날 것이다. 미국 시민은 물론 전세계인의 가슴 속까지 파고들어간 그 공포를 조직하여 집단적인 힘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공포의 9·11은 지금 우리 앞에 우뚝 서서, 이제는 더이상 초법적 강자는 존재할 수 없고 누구라도 폭력 앞에는 평등한 패자일 뿐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현기영/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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